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노라 에프런 지음, 박산호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크리스마스 이브날 눈도 살짝 내려주는 저녁, 언니들과 함께 간 영화관에서 (혹자는 '시애틀의 불면증'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ㅋㅋ)>을 봤던 기억이 난다. 라디오 청취자 사연을 통한 편지왕래와 크리스마스 이브날 저녁 엠파이어스테이츠 빌딩에서 아슬아슬하게 만난 사랑을 속삭이는 그들의 달콤한 로맨스는, 90년대의 아날로그적 향기를 한껏 담아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고, 로맨스의 환상을 품게 만들었으며,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푹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교과서로 불리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의 감독 노라 애프런의 수필집이 나왔다. 앞서 말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강한 향수에 이끌려 그녀의 책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영화의 시나리오와 감독을 했다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일본소설풍의 표지 일러스트는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로맨틱 코미디의 귀재 노라 애프런의 인생 이야기는 과연 어떠할까 하는 궁금증에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대로 잔뜩 부풀어 넘긴 책의 첫글은 솔직히 시큰둥했다. 목의 주름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이어지고, 목주름에 모든 것을 건 것처럼 흥분해서 떠드는 그 마음을 내 기준으론 이해하기 힘들었다. 마치 외모에 집착하는 부유한 중년의 푸념같다. 그래도 책장을 계속 넘긴다. 목주름으로도 모자른지 헤어, 제모, 손톱손질, 염색 등등 끝없는 외모 이야기가 이어진다. 내가 이상한 건가. 여전히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 부유한 그녀, 핸드백같은 소품에 큰 돈 쓰기는 아까워하나보다. 시장표 핸드백을 자랑스레 얘기한다. 음. 소탈한 면도 있는데. 그러다 방 8개 달린 뉴욕의 아파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헉; 방 8개라.. 도무지 감정이입이 안된다; OTL

그러나 이젠 안다. 부유하지만 소탈하고 치밀하지만 덜렁대는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소재가 목주름과 헤어손질과 핸드백과 방 8개짜리 아파트였을 뿐이라는 것을. 두번 이혼하고 세번 결혼한 자신의 개인사까지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부유한 중년 여성의 자랑과 과시가 아니라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감없이 솔직하게 털어내어 들려준다는 것을. 그녀가 방 8개의 호화로운 뉴욕 아파트를 떠나면서 나의 지루함도 함께 사라졌다. 노라 애프런의 유머가 쏟아져 나오는 '나와 JFK : 이제는 말할 수 있다'부터는 그녀의 글들은 하나같이 재밌고 즐겁다. 


자신의 심란했던 뽀글뽀글 파마머리 때문에 케네디가 유일하게 추파를 던지지 않은 사람이 자신일 거라는 농담을 통해 케네디의 추문을 얘기하고, 클린턴에 대한 애정을 쏟아내는 듯하면서 그의 과거 스캔들과 더 나아가 부시의 전쟁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은연중에 곁들인다. 그런가 하면 어린 날 즐겨 먹었던 향수어린 음식을 찾기 위해, 또한 새로운 요리법을 배우기 위해 걸어온 파란만장한 여정길 같은 소소하지만 공감할 만한 이야기도 있다. 결혼과 육아 과정 속에서 여자와 엄마 사이의 갈등을 유쾌하게 언급하기도 한다. 그중 책에 대한 노라의 사랑이 듬뿍 표현된 '내 인생은 판타지'는 특히 좋았다. 

돋보기 없이 불편해지는 나이 덕분에 지도나 약병에 적힌 글자를 읽기는 거의 포기했으며 집안 곳곳에 돋보기를 뿌려놔도 불편함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노라 애프런. 그러나 그녀는 나이 먹는 것의 서글픔과 아쉬움을 토론하면서도 라스베이거스에서 먹고 마시고 도박을 즐기며 60세 생일을 보낼 만큼 씩씩하게 노년을 즐기고 있다. 이제 슬슬 주변 사람들이 떠나가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야 할 시점에 이른 노라. 그녀는 칙칙해지지 말자고, 크게 웃으며 순간에 충실하자고 외친다. 죽음 앞에서 아무리 고민한들 무엇하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에 충실하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 "내가 죽다니, 믿을 수 있어?" 그녀가 말했다. 아니. 난 믿을 수 없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칙칙해지지 말자.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자. 크게 소리 내어 웃어보자. 먹고, 마시고, 흥겨워해라. 순간에 충실해라. 삶은 계속된다.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말을 되뇌어라. '그렇다고 별 수 있나?' 여기,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다. 뭘 해야 하는 걸까? (198쪽)


유쾌하게 나이들기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는 무겁거나 칙칙하지 않다. 오히려 밝고 경쾌하다. 노라 애프런의 에세이집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는 이렇게 고상한'척'이나 우아한'척' 하지 않고 자신의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책이다. 가식없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낸 글들엔 적절하고 상큼한 유머가 섞여 그녀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처럼 유쾌하다. 그리고 마냥 가벼운 듯 하면서도 그 안에 인생의 보편적인 이야기와 자기 성찰이 담겨 있다. 그래서 시작은 시큰둥했지만 마지막엔 웃으며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육십을 넘긴 노라 애프런의 솔직함과 엉뚱함과 유쾌함이 마냥 사랑스러워진다.







해리) 당신 인생에 대해 얘기해 볼래요?
샐리) 내 인생이요?
해리) 뉴욕에 도착할 때까지 18시간이나 남았잖아요.
샐리) 내 이야기는 시카고도 못 가서 끝나버릴 걸요. 별거 없어요. 그래서 뉴욕에 가는 거니까.
해리) 뉴욕에 가면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기나요?
샐리) 그렇죠.
해리) 예를 들면?
샐리) 신문방송학을 전공해서 기자가 될 거예요.
해리)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을 쓰시겠다?
샐리) 그런 식으로 볼 수도 있겠죠.
해리) 그럼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수도 있겠네? 죽을 때까지 거기에 살았는데 별 거 없으면. 아무도 못 사귀고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어버렸는데, 복도에 썩은 내가 진동할 때까지 2주가 넘도록 아무도 모르면? 뉴욕에선 그런다던데.

-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