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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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은 결코 할부로 오지 않아. 불행은 반드시 일시불로 오지. 그래서 항상 처리하기가 곤란한 거야. (164쪽)

이 책의 카피로도 쓰인 위의 말은 순.식.간.에. 지금 나에게 더이상 적절할 수 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_-;; 안그래도 낮부터 인터넷 직거래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마음을 억누르고 이 책의 리뷰를 써내려갔다. 겨우 다 쓰고는 막 '확인' 버튼을 누르기 직전 바로 위↑의 저 문장을 더 써넣으려고 시도하던 찰나.. 도대체 뭐가 잘못 되어버렸는지 페이지가 뒤로 넘어가버렸다; -0-; 그리고 그 결과.. 당연히-_-;; 내 리뷰는 모두 날아갔다. 한 시간이 넘게 공들여 쓴 리뷰는 그렇게 순식간에 어이없이 공중분해 되어 버리고, 열을 받을대로 받은 나는 완전공감할 수 밖에 없는 윗 문장의 '일시불 불행'을 온 몸으로 뼈져리게 느끼며 앞의 리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리뷰를 써내려가고 있다. ㅡㅡ;

역시~ 불행은 할부보다는 일시불을 좋아하나 보다. 오래 전부터 나름 기대를 걸었던 일은 오늘 아침부터에 산산조각 났고, 인터넷에서 개인거래를 하기로 한 사람은 돈 문제를 앞두고 하루종일 연락두절 상태로 일관해 나를 거품물고 분개하게 만들었으며, 그래도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리뷰를 써내려가던 나의 피땀어린 노력엔 아랑곳 않는 냉정하고도 멍청한 컴퓨터에 의해 내 피같은 리뷰는 눈 깜짝하기도 힘든 시간에 공중분해 되어버렸다. 이 책의 작가 김언수는 진정~ 명언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나, 지금 현재.. 어찌 일시불 불행을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ㅠ ㅠ;


심사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제 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 <캐비닛>은 온통 작가의 상상력과 유머로 넘쳐난다. 그의 상상력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으며, 순간순간 치고 빠지는 그의 유머감각에 감탄만을 보낼 뿐이다. -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 라는 서문으로 문을 연 이 책은, 쏟아지는 현란한 구라들과 어디로 돌출할지 모르는 작가의 상상력과 뜻하지 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으로 인해 나의 상상력 그 이상을 맛볼 수 있는 책이었다.

<캐비닛>이란 제목처럼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13호 캐비닛'이다. 아니 그 캐비닛이 품고 있는 자료들 속에 살아있는 '심토머'들이다. 이 책에서 '징후를 가진 사람들'로 정의되는 '심토머(symptomer)'로는 '세상의 이런 일이'에 나오는 기인열전을 뛰어넘는 이들이 등장한다. 손가락에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람, 남녀의 성기를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 몸의 일부에서 도마뱀의 형질을 나타내는 사람,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시간을 잃어버리는 사람 등 누가 들어도 '구라'라고 여길만한 사람들이 실제로 13호 캐비닛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진행되는 <캐비닛>은 이런 각각의 증상을 가진 심토머들을 만나며 풍성한 이야기 꺼리를 만들어간다.

여기에서 '나'는 이런 심토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매개체의 역할에 충실을 행하며 때때로 충분한 보충설명까지 들려준다. 더불어 심토머들의 이야기와는 별도로 '내'가 어쩌다 이런 요상한 일에 엮이게 되었는지, 권박사는 누구이며 그 연구는 무엇인지에 대한 에피소드도 곁들인다. 권박사의 죽음과 함께 순식간에 '나'에게 펼쳐지는 일들은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얼떨떨하게 삽시간에 진행되어 버린다. 코믹물이 갑자기 공포물로 변환되는 느낌??

- 우리는 불안 때문에 삶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삶을 맞춘다. 우리는 삶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든다. 습관과 규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삶이라니 그런 삶이 세상에 있을까. 혹시 효율적인 삶이라는 건 늘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기억할 만한 멋진 날이 몇 개 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182쪽)



<캐비닛> 속에 담겨있는 수많은 심토머들의 이야기는 처음엔 그들만의 고민일 뿐이었다. 그런데 하나둘 듣다보니 이건 괴상한 괴물의 모습을 한 심토머들만의 아픔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민이자 아픔들이었다. 작가는 심토머라는 특이한 존재들을 통해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새 나도 심토머들을 바라보던 냉랭한 시선을 거두고 작가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고, 좌절과 체념에 함께 가슴 아파한다.

이 책은 심상찮은 서문부터 책을 덮는 마지막까지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과 유쾌한 유머들을 경험할 수 있다. 진실여부가 고민스러울 정도로 거침없이 쏟아지는 하이테크 구라들과 스피드하게 읽혀지는 빠른 전개로 독자를 압도하는 이 작품은, 무엇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이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한다.

삶이 무료하고 따분한가? 그렇다면 지금 '13호 캐비닛' 속으로 들어가 보자.
화려한 총천연색 구라의 향연 속을 헤매다 보면 어느새 당신도 기분좋은 유쾌함에 감염될테니 말이다. ^ ^




- 혹시 타임머신 같은 게 발명된다면 당신이 삭제한 1998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 돌아가고 싶어요. 솔직히 1998년에서 기억나는 거라고는 홍당무 밖에 없지만.
- 무섭지 않나요?
- 무서워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시절은 없어요. 그런 시절이 있다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않을 거예요. 우리는 행복한 기억으로 살죠. 하지만 우리는 불행한 기억으로도 살아요. 상실과 폐허의 힘으로 말입니다.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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