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열차 - 꿈꾸는 여행자의 산책로
에릭 파이 지음, 김민정 옮김 / 푸른숲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내가 언제 야간열차를 타봤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정동진으로 향하던 밤기차가 떠올랐다. <모래시계> 이후 유명해진 정동진역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지만 너무 멀어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던 곳이었다. 그렇지만 밤기차를 타면 새벽녘 정동진에 도착해 바로 앞에 펼쳐진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에 매혹당한 나와 친구는 큰 마음을 먹고 정동진으로 떠났다. 정동진 직행기차의 시간이 맞지 않았던 터라 영주에서 바꿔타는 경로를 택했는데, 여름으로 가는 길목이었지만 밤 1시에 기차를 기다리며 보냈던 영주역사의 두 시간은 꽤 쌀쌀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기차 도착! 덜컹거리는 정동진행 무궁화호 기차에 몸을 싣고 뜨뜻~한(때론 묘한 냄새를 품고 있는) 공기에 몸을 녹이며 정동진으로 향하던 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어느새 슬며시 잠이 들어버렸다.

잠결에 중간중간 바라보던 창 밖에는 까만 배경에 불빛 몇 개만 보였었는데 어느 순간 환해진 창 밖으로 파랗게 철썩이는 바다가 펼쳐졌다. 그 바다를 보는 순간 천근만근하던 눈이 번쩍 떠졌고, 삐그덕 거리던 의자의 불편함에 쑤시던 온 몸이 갑자기 가뿐해졌다. 그리고 친구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야~ 바다다! (사실 나는 요즘도 늘~ 맘만 먹으면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에 살고 있지만 그 바다는 왠지 특별해 보였다; ^ ^;;)

부랴부랴 짐을 챙겨들고 기차에서 내려선 우리. 날은 벌써 환해졌고 해도 꽤나 떠오른 뒤였지만 아직 눈곱도 제대로 떼지 않은 졸음 가득한 눈에 펼쳐지던 그 바다와 태양은 잊을 수가 없다. 더불어 내 볼을 스쳐가는 그 상큼한 바람, 기분좋은 바다냄새까지도. 그리고 그 장면은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머리속에서 연속재상영된다. 그날의 그 막연한 기분좋음을 가득 싣고 말이다. ^ ^ (그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기차에서 내리 7시간을 시달리다가 허리 부러질 뻔 했지만;; -0-;;)



이런 여행의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해서 읽게 된 <야간열차>.
우선 이 책, 참 이쁘다. 작은 양장본의 크기로 야간 열차의 그림이 담긴 매력적인 외모다. 게다가 읽기 전에 휘리릭~ 대충 넘겨볼 때 중간중간 보이는 삽화들은 뭔가 모험이 가득찬 여행이야기가 담겨있음을 암시하는 듯 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예상은 절반은 맞았고 절반은 틀렸다.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깊이있는' 문학과 영화에 대한 작가적 견해와 철학적 사유가 어우러진 여행에세이로, 몸으로 부딪치고 만나는 외적 모험보다는 정서적 충격으로 접하는 내적 모험이 주를 이루고 있는 책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각각의 장소에서 그와 관계되는 작가와 그의 작품들, 영화에서 연상되는 장면들을 줄줄이 읊어대는 저자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잘 모르는 작가나 작품들의 언급이 계속되면 조금 의기소침해며 몸으로 겪는 모험이 조금 그리워지기도 했다. (공산권 국가에서 그들이 맞게 되는 상황이 그런 갈증을 어느정도 채워주긴 했지만서두;;)

카프카를 찾던 프라하와 뒤렌마트와 상드라르를 떠올리던 스위스의 이야기보다 지나 철의 장막이 제거되던 역사적인 순간에 베를린에 있던 이야기가 좀 더 흥미로웠다. 특별히 독일에 관심이 있는건 아니지만 우리와 비슷한 처지였고, 그 아픔을 우리보다 먼저 이겨낸 나라이기에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대한 그의 이야기에 자연히 귀 기울여졌으리라. 또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던 그를 뒤쫓으면서 여행한 황하와 몽골, 북경 등은 서양인의 눈으로 보고 느낀 모습들을 담아놓은 터라 우리와 다른 그들의 관점을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ㅎㅎ;;



야간열차, 그것도 몇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급행열차가 아니라 느리게느리게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야간열차를 너무 사랑하는 저자, 에릭 파이. 그와 함께 야간열차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그의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겨진 수많은 작가와 감독들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행지를 돌아보면서 그곳의 풍경과 감상만을 담아두지 않고, 저자는 책 곳곳에 자신이 사랑하는 수많은 작가의 말과 그 작품들, 감독과 그의 작품속의 장면들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나면 책 한 권이 아니라 여러 책과 영화를 섭렵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미처 몰랐거나 예전엔 별로 관심 가지지 않았던 그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기존의 여행서와는 차별성을 갖는다. 그러나 너무 자주 깊이로의 사색을 시도하는 터라, 나처럼 고전문학이나 고전영화 등에 관한 사전지식이 빈약한 독자는 자칫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음을 미리 말하고 싶다. 물론, 그런 작품들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여행이 될테지만. 야간열차 여행에서 만난 여러 모습에서 수많은 사유를 쏟아내는 깊이있는 여행에세이를 찾고 있는 당신이라면 이 야간열차에 동행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









* 뒷담화;;

- 무식하게도 나는, 책 날개에 저자가 프랑스 작가라고 소개되어 있음에도 그걸 미처 잊어버렸다. 그리곤 프롤로그속 저자가 인용한 영화 '킹덤'의 감독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각주를 잘못 이해해 그걸 이 책 저자의 이력으로 오해해 버린채 책을 읽는 사태가 벌어졌다;; -_-;; 덴마크 영화감독이라고 굳건히 믿고 책을 읽으니 책속에서 작가가 프랑스말을 하고 프랑스 이야기를 하는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 밖에;; ㅡㅡ; 앞으로 작가 소개 제대로 보고, 각주를 잘 구별해서 보자!!! ㅠ

- 어느 나라를 가게 될 때 그 나라의 인사말과 간단한 표현 정도는 준비하는게 여행자의 센스~가 아닐까 싶다. 단지 세계 공용어 '영어'만을 가진채 조금의 준비도 없이 중국이나 몽골을 들른 저자가 그들이 영어를 못한다고 타박할 형편은 아니라고 본다. 그의 말처럼 다음에는 부디 간단한 표현 정도는 준비하는 센스를 발휘하시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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