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도코노 이야기 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꽤 오래전에 티비에서 '환상특급'이란 외화를 본 적이 있다. 20분 가량의 짧은 단편이었는데 4차원의 세계 같은 묘한 분위기에 마지막엔 항상 예상보다 강도 높은 반전이 기다리고 있어 여러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판타지를 표방하는 단편이긴 하지만 느낌이 아주 묘하고 강렬해서 그 여운이 참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래서 뭔가 기괴한 느낌의 책이나 영화를 볼 때면 항상 연상작용으로 그 때 본 '환상특급'이 떠오르곤 한다.

최근 미야베 미유키와 함께 일본문학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온다 리쿠. 그 입소문 자자한 <굽이치는 강가에서>도 책장에 예쁘게 꽂아만 두고 아직 읽어보질 못한 터라(^ ^;;) 온다 리쿠의 작품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 할 입장은 못 되지만, 그녀의 전작 <밤의 피크닉>, <굽이치는 강가에서>, <삼월은 붉은 구렁을> 등의 뜨거운 반응과 함께 여러 작품이 동시다발적으로 출간되는 걸 보니 이미 그 인기가 장난이 아닌 듯 하다. 나도 그 열기에 살짝 편승해 이 책 <빛의 제국>을 질러주는 센쓰를 발휘했다;; ^ ^;;


'도코노 이야기_첫번째'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책의 관건은 도대체 '도코노는 누구인가?'이다. 모든 이야기가 '도코노'에서 시작되어 '도코노'로 끝이 난다. 그러나 '도코노'가 도대체 뭐에 쓰는 건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읽기 시작한 첫 단편 '커다란 서랍'은 읽는내내 미스테리 투성이였다. 뭘 넣어두고 뭘 울리는지, 도대체 그 가족은 뭐하는 사람들이고, 왜 그렇게 급히 떠나야 하는지.. 그러나 그 궁금증은 뒤이어 펼쳐지는 다른 이야기들을 통해 조금씩 해결되며, 이야기의 중반을 넘어서면 그렇게 모아진 정보를 토대로 도코노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읽는 재미를 위해 '도코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련다. ^ ^;)

<빛의 제국>은 열 개의 단편 - 열 가지의 도코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단편마다 새로운 인물들이 새로운 사건에 맞닥뜨리고 그것을 해결하면서 완결된다. 여러 시대에 걸친 긴 여생 덕에 몇 편의 이야기에 연달아 모습을 드러내는 '두루미 선생' 같은 캐릭터가 있긴 하지만 그 외엔 중복되는 인물도 거의 없다. 그러나 독립된 각각의 이야기들은 각 편마다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모두 특별한 능력을 가진 도코노 일족이라는 거대한 공통점으로 연결된다.

 
깊은 부정(父情)을 보여주는 '커다란 서랍'을 시작으로 서서히 도코노의 실체가 드러나는 '두 개의 찻종', '다루마 산으로 가는 길', '오셀로 게임', '편지' 등을 여러 이야기를 거쳐 이 책의 제목으로도 쓰인 '빛의 제국'에 이르면 가슴이 아려온다. 도코노라는 가상의 인물들에게 드리워진 전쟁의 아픔이 마냥 판타지로만 느껴지지 않음은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중편에 가까운 '빛의 제국'을 지나 '역사의 시간'을 거쳐 '검은 탑'에 이르면 애잔한 부모님의 사랑에 고개 숙이게 된다. 앞에 나왔던 '오셀로 게임'이랑도 약간 연관성이 있는 '잡초 뽑기'는 짧지만 가장 섬뜩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남겼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탐욕을 부리며 삶을 살고 있는 걸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마지막 '국도를 벗어나'는 로맨스가 곁들여진, 열 편 중 가장 상큼한 이야기였다. ^ ^

- 매일을 소중하게 살아. 눈을 크게 뜨고, 귓속도 깨끗하게 후비고, 시야 끄트머리에서 일어나는 일도 놓치지 마. 그러면 자네 등에는 잡초가 안 나. 잡초가 안 나는 사람이 세상에 난 잡초를 뽑는 거야. (215 쪽, '잡초 뽑기' 중)

 

'도코노'라는 이상야릇한 판타지의 세계로 나를 안내해 준 <빛의 제국>. 책을 덮고 나니 예전 그 '환상특급'의 기묘한 느낌이 남아있다. 물론 입을 못 다물게 하는 엄청난 미스테리와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각각의 이야기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겨준다. 그 여운이 참 복잡미묘하다.

이제 <빛의 제국>을 끝냈으니, 그동안 책장에서 잠자고 있던 <굽이치는 강가에서>를 시작으로 그녀의 다른 작품에도 손을 뻗어봐야겠다. 한동안 온다 리쿠에게 빠져들 것 같은 예감이 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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