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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아무리 생각해도 난 ....

어느날 후배가 내게 물었다.

후배 : 선배님 온정주의 기억하시죠?
누군가에게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맘 속 깊은 이야기를 하고싶을땐...어떻게 해야하나요? 그냥 삼키나요. 아님 그냥 상대방을 고려치 않고 해버리나요. 나이가 30이 되어가니 이제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예전처럼 질러버리고 연소해버리고 그렇지 못하겠어요. 그래서 병이 나나봐요.

선배 : 이야기는 때로 바위더라. 가령, 그대가 유부녀가 되어 넌 나름대로 너무나 행복한 어느날...
한때 사랑했으나 이루어질 수 없었던, 그럼에도 여전히 그 흔적들이 몸이든, 마음이든 어딘가에 남아 있는데, 과거의 그가 네게 "널 아직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걸 듣고 싶을까? 아니면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건 눈치챘지만 그 사람이 끝까지 그 말을 입안에 담고 있길 바라니... 나라면 그 사람이 그저 입 안에 담고 있길 바라겠어. 왜냐구? 더이상 그 사람의 마음이 지닌 무게까지 감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최소한 그 사람이 입 밖에 내기 전까진 서로 모른 척 할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종종 모르는 척하지 못한다. 제 감정을 앞세워 제 속의 돌덩이들을 이리저리 게워내는 거겠지. 참 잔인한 일이다. 그건 내 마음의 돌덩이를 남에게 옮겨 놓는 건... 그게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정 참을 수 없다면 그도 하는 수 없는 거겠지. 일단 이기적이려거든... 그냥 이기적이면 되는 거다. 제 감정을 그저 토해내는 것뿐이면서, 스스로를 선량하가고 속이며 남 생각까지 해주는 척, 남 생각까지 해주는 착한 이미지까지 얻으려는 건 때로 너무 잔인하거든...

못된 사람이 착한 척까지 하려는 건 참 가증스러워.

-------------------------- 난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맘 좋은 선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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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어떤 절망에 대하여...

속삭이신 어느 분에게.....
이 글은 전에 제게 절망에 대해, 고통에 대해 물어온 어느 친구에게 해준 답글입니다. 상상컨대, 당신은 이글을 제가 주었던 그 젊은이보다는 훨씬 나이든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물어온 이야기의 형태도 많이 다릅니다만.... 제 답은 그저 그렇습니다.

궁구하시길.... 답이 찾아질리 없더라도.....
우리네 가슴은, 심장박동은 .... 영원히 포개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슬퍼할 일도 아닙니다. 심장은 영원히 포개지지 않습니다만, 입은 하나이니 포개질 수 있는 것이고, 서로 포개는 동안 양가슴을 마주 덥힐 수도 있겠지요. 그러다 서로의 심장을 한 방향으로 포개고 싶다면 마주 서지 않고, 함께 바라보는 길도 있을 겁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저도 대책없기는 매일반입니다..... 그저 살아갈 밖에요. 무엇이 옳은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해서 희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지금 옳다고 느끼는 걸 서로 행하며 살아갈밖에요....

신도 우리에게 그 이상의 권한은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에반게리온"을 처절하게 이해하고 가슴에 담은 사람 중 하나이다.
흔히 "에바"라고 약칭해서 말하는 이 애니메이션에 뭐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되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에바"에서 내 고통의 처절한 근원 같은 것을 끝까지 밀고 가게 되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보았다. 악마가 사랑하는 영혼은 고아들의 영혼이라 한다.

내 안에 깃든 악마를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를 아는 만큼 그도 나를 자세히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악마에게 잠식당해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때로 그 기운이 날 지배하듯 엄습해오는 경험들을 종종 하지만, 대개의 경우 벼랑 끝에서 나는 멈춰선다.
내 안에 깃든 악마는 날 파괴하기 보다는 날 살려두고 오래도록 괴롭히고 싶어 한다.
마치 온몸을 갉아먹은 뒤에는 저도 살 수 없음을 아는 기생충처럼 그는 영악하다.

총 몇 편이 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에바 전편을 본 것은 단 한 번.
그 한 번의 기억으로 나는 "에바"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썼다.
단 한 번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에바"의 궁극적인 지향이 단 한 마디 "외롭다, 나는 외롭다."임을 알았다.
나는 "섹스 = 대화"라고 생각한다.
 "오르가즘"이란 한 여자와 한 남자가 혹은 동성간이라 할지라도 단지 배꼽을 맞추고 쾌락을 나누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건 외로움을 달래는 제의같은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섹스 혹은 대화 중독증이다.

"합일 = 싱크로"

"에바"에서 나는 섹스로 가득찬 기호들을 읽어들이기도 했다.
눈을 뜨면 낯선 천장이 영화 "그랑 블루"처럼 시야로 쏟아져 내린다.
얇은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을 눈에 가득 띄운채 이대로 그냥 죽었으면 한 적도 무척이나 많았다.
따스한 햇살, 잘 말라서 서걱거리는 햇이불의 느낌, 적당하게 허기진 창자를 떠올리며
햇살 속으로 부유하는 먼지들을 바라보며 문득 이대로 죽는다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나는 진정으로 죽음을 고민해보지 않았다.
그것이 종말이란 생각은 늘 하면서도.....
그것이 두렵다거나 피하고 싶다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삶도 고민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는 오늘 이 순간 늘 내 인생의 전성기를 살고 있다.

삶을 긍정하는 자세라고 누군가 생각한다면
나는 코웃음을 칠 것이다.
나는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내게 삶은 그저 견디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의 흉내를 내며 살아간다.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이야기한다."
부처가 염하시중의 미소를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사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심전심을 말할 때 역시 그것도 사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그렇게 손쉬운 것이라면 그것을 불경에 기록하여, 부처의 역사로, 산증거로 제시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도통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지금 당신의 엄지 발톱이 생살을 파고드는 그 고통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나의 고통이 아닐뿐더러 내 엄지 발톱은 곱게 자라나고 있다.
그러나 알지 못하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나는 또한 믿지 않는다.

안다는 것이 반드시 타인의 고통을 나도 똑같이 느낀다는 등가성의 원리에
지배당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간 내가 해온 모든 일들은 사기에 해당한다.
나는 아팠고, 남의 아픔을 내 수준에서 이해하느라 또 아팠다.

내가 처절하게 그들의 아픔에 모두 공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도 안다.
내가 아픈 이들과 똑같이 아프지는 않다는 것을, 그들도 역시 자신들의 경험에 비춰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연극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황석영의 단편 <몰개월의 새>를 읽으며 감동했던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것은 어쩌면 연극과 같다.
우리는 영화가 아무리 그럴 듯한 연출 속에 진행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연출이며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남자로 태어나, 남자로 자랐고, 남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여자로 자라나지 않았으며 여자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를 친구로 두고,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으며,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평생 단 한 번도 여자였던 적이 없으므로 이런 나의 모든 행위는 연극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기인가?

우린 우리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가?
시시각각 변화해가는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다만 그 시시각각 변화해가는 나의 추이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나의 통제 아래 나를 두고자 노력할 뿐이다.
그런데 변화해가는 내가 나인지, 그것을 다시 바로 잡으려는 것이 나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그 두 존재가 다 합쳐져야 비로소 나이다.

나는 어렸을 때 하도 잘 울어서 뒤통수에 수도꼭지를 박았느냐는 어른들의 타박을 들었다.
그리고 조금 자라나면서 우는 것을 어른들이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무엇을 원하더라도 그것을 곧이 곧대로 말하면 얻을 수 없다는 사실도 일찌감치 깨달았다.
이것이 나만 그런 줄 알고 여태 살았다면 바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와 비슷하게 살았다.
나는 모든 사람은 다 다르다고 믿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또한 다 비슷하다.

인류가 언어를 발명한 이래 수없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성품을 묘사하거나 모사하는 말을 만들어냈지만
그 어휘들을 죄다 합쳐봐야 얼마나 될까.
누군가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구사할 수 있는 어휘들을 모두 동원해보라.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다 비슷하다.
나는 나만 특별하다는 생각을 별로 해보지 않았지만, 내가 특별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잘났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그나마 생각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존재,
내 사유의 한계 속에 가둬둘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나라는 점에서
그걸 긍정하는 것이다.

내가 일상 생활에서 "타인에게 말걸기"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책임과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누군가에게 어느 물건이 참으로 좋으니 구입하라는 충고를 해줄 수도 있다.
그 사람이 나의 말을 듣고 그 물건을 사던, 그렇지 않던 결국 그 사람의 책임이다.
이곳에서 내가 당신에게 어떤 미소를 짓던, 심각하고, 진지한 태도로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다면 그것 역시 당신의 책임이다.

내가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많이 알고, 많이 사랑하고, 많이 이해하고 있는지 그것은 당신이 판단할 일이라는 것이다.
나의 충고가 진지하게 먹힌다면
그것은 당신이 판단하기에 나의 말이 쓸모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네가 아니다."와 "나는 너다"라는 어떤 구호는 결국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너와 내가 남이므로, 아니므로 나는 너의 삶에 영향을 주고
그 반대로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시종일관 자신에게만 영향을 주는 자아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생명을 먹고 산다.
그러는 이상 우리가 제 아무리 도를 터득한다핟라도 세상 모든 존재에게 영향을 미친다.
나는 인연의 끈을 아무리 안으로 잡아들이려 해도 결국 세상(즉, 타아)과 인연이
다 끊길 수 없는 것임을 경험으로 알았다. 세상과 인연을 끊었던 나에게선 새로운 인연이 자라났다.

그것은 나의 영혼과 그대의 영혼이 하나의 용액 속에 녹아들어
결국 너도 나도 없는 절대고독 같은 따위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세계.
현실 속에서 불가능한 세계를 꿈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바"의 써드 임팩트가 만들어낸 세상, 신인류의 세상은 결국 아메바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대와 다르지 않다.
또한 그대와 다르다.
남에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는 일이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 어떤 간섭도 실질적으론 존재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사실에선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걸 섹스라 부르지 않고, 정신적 자위행위라 부르는 것과 같다.
어느 한 사건이 모든 경우, 상황과 같을 수는 없다.
당신의 아픔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같이 공감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고마울 수도 있고,
너의 아픔을 내게 말하기 보다는 단지 안으로 삭이는 것이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고마울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엔 무책임한 사기 같다고 욕할 수 있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엔 냉혈한의 자세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전자든 후자든 본인이 무책임하다고 여기면 어떤 자세를 취하든 무책임해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명제로 되돌아오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 방식은 여러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프면 아프고, 아파서 참을 수 없으면 비명을 지르고, 그것을 참아야겠다면 참으라고 충고해준다.
결국 내가 해주는 충고라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다.
아프면 아프라는 말이 대관절 충고 축에나 들 수 있겠는가?
나는 결코 희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나도 내 인생에 빛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남이 보기엔 전혀 빛나지 않는 빛을 보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빛을 안다.
그대에게 이 빛을 그대로 전해줄 수는 없다.
그것은 옮겨지는 순간 이미 빛이 아닐 것이며,
그대가 아파하면서 간구하고, 견디며 깨달아 자신의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결국 내가 해주는 모든 말은 무효다.

나도 너만큼 아파 봤으며, 나도 그대가 하는 모든 짓거리들을 해봤다고 말한다.
남이 내게 그리 말해주는 것도 나는 참았고, 욕지기도 견뎠다.
왜 그대라고 그런 말 한 번 안 듣고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삶이란 어느 정도의 굴욕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는 것이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내 생각도 그와 같다.
나는 어느날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고, 나역시 누군가에게는 어느날 모욕을 준다.

그것이 내가 깨우친 인생이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굴욕이며, 내일 나는 또 누군가에게 모욕의 대상이 된다.
그 쳇바퀴를 계속 굴리며 고민하는 것도 그대의 몫이다.
내 고민이 여태 끝나지 않은 것처럼...

나는 단지 너의 아픔을 '성장통'이라고 규정지어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들은 가령 이런 것들이다.

"넌 좋은 놈이다. 이 말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난 니가 나쁜 놈일 때도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도 안다. 난 널 아낀다. 이 말에 너무 기분 좋아하지 마라. 내 인생을 송두리째 너에게 줄 정도로 아낀다는 말은 아니다. 난 네가 진지하게 아파하고 있다고 믿는다. 설령 그게 뺑끼라도 나는 좋다. 나도 늘 진지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때로 남들에게 폼 잡고 싶어서 짐짓 거짓으로 나의 통증을 확대해 본 적도 있다. 내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해본적도 있다. 내가 너에게 욕을 해줄 때도 너에게 칭찬을 해줄 때도 난 여러 생각을 한다. 내가 넌 좋은 놈이다라고 해서 내가 나빴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대가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그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니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그건 내 한계 안의 일이다. 그러므로 너의 주관적인 처방에 맞는 해법을 찾는 너는 옳다. 다만 어른이 되면 그런 과정이 끝날 것이라고 믿지 않겠지? 나는 바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건 바빠서 그런 고민들을 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지, 그런 고민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끔 성인(成人)이 된다는 것을 성인(聖人)이 된다는 것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긴 글 썼더니 배고프구나.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고 다니거라!"

부디, 어떤 절망도 스스로를 파괴할 수 없을 만큼 영악한 인간이었기를...

그리고 나중에 혹여 내 먼저 죽거든, 괜히 잡생각하지 말고 펑펑 울어주기 바란다.
연극이라도 좋으니....눈물 나려는데 공연히 잡생각하며 안 울려고, 생떼쓰지 말고...
주변 의식하지 말고 펑펑 울어주길....뭐 어차피 죽은 뒤에야 내 알까?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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