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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 - 사랑이거나 사랑이 아니어서 죽도록 쓸쓸한 서른두 편의 이야기
김종관 글.사진 / 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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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와 제목을 보고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그리고 잠자리에 누워서 한 장, 한 장 읽어내려갔다. 읽은지는 오래 되었는데, 어떻게 리뷰를 써야 할까 오랫동안 망설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학창 시절 부모님 몰래 친구들과 성인 비디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이 서른이 넘은 성인이지만, 아직도 내게 이런 사랑 이야기는 낯설었다. 

  

참기 어려운 욕망, 분출하고 싶은 욕구, 가슴이 쿵쾅거리고, 몸에서 열이 나고 땀이 흐르는 순간, 이 책에는 그런 묘한 순간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단순히 야한 섹스 한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에스프레소처럼 진한 사랑의 페이소스와 짙은 서늘함이 들어 있다. 세상이 무너질 듯 간절했다가 또 어느샌가 세상에 더없이 시시하고 시큰둥해지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그 시작과 끝이 들어 있다. 물론, 그 중간 어디쯤도 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의 굴곡이 모조리 들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 권으로 한 편의 옴니버스 영화가 된다. - 출판사 리뷰 중에서

 

처음에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하다가 깜짝 놀랐다. 표지에 19세라고 적어놔야 하는건 아닌가 괜한 걱정도 들었다. 남녀의 관계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들 때문이다. 그렇지만 너무나 솔직하고 담담해서, 그냥 계속해서 읽어나가게 된다. 신체접촉으로 시작된 사랑 이야기들이 씁쓸하고, 쓸쓸하지만 계속 읽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픽션이기도 하고 논픽션이기도 한 이야기들이 어디까지가 논픽션일까 궁금해진다.

 

손을 꽉 잡고 어둠을 가르는 연인들의 성욕은 항상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손을 꽉 잡고 비에 젖은 밤길을 걸으며, 음식물 냄새 나는 골목을 돌아서며, 인파들의 어깨를 부딪히며 아름다운 세계를 본다. 둘은 같은 공간을 보고 같은 추위를 느끼며 같이 아름답다 느낀다. 새벽이 다 되도록 잠이 오지 않는다. 술은 늦게까지 깨지 않으며 감각은 모두가 살아 있다. 그들은 걷는다. 사랑하기 위해서. - [단잠] 중에서  

 

'사랑이거나 사랑이 아니어서 죽도록 쓸쓸한 서른두 편의 이야기'들은 어쩌면 나도 모르는 내 속에 감춰친 내면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나이 서른이 넘고, 결혼한 친구들 혹은 아직 미혼인 친구들과 함께 만나면 우리들도 자연스레 남자 이야기, 성적인 농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래서 마냥 낯설다고,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헤어지려고 백 번을 잔 커플이 있다. 다시 타오를 수 없는 불씨가 오래갔다. 그들은 증오의 침을 뱉고 발기하고 같이 자고 서로 다른 꾸을 안고 헤어진다. 어느 한쪽에서 불씨가 댕겨지고 둘은 주먹을 쥐고 만난다. 한 방 먹이고 싶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 안기고 싶은 서로의 가슴을 본다. 그들은 헤어졌고 불씨는 겨우 꺼졌다. 고무를 태우는 것 같은 역한 냄새가 남았다. 그들은 오랜 시간을 보냈고 냄새는 옅어지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아직 무언가를 태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 p. 238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는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아름답고 밝은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 속의 이야기들처럼 지긋지긋하지만 끊을 수 없는 관계들도 있다. 사랑이거나 사랑이 아니어서 죽도록 쓸쓸한 이야기들, 이것도 결국은 사랑 이야기다.

 

시간은 흐르고 무수한 선택으로 우리는 현재를 만났다. 변한 것과 그대로인 것, 선택한 길과 선택하지 않은 길이 남았다. 어둠 속에 가둔 가능성들 속에서 다른 운명으로 흘러간 나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야기들은 가끔 그곳에서 온다. 벽 너머 어둠 속에 잊혀진 기억 몇 개와 선택하지 않은 길들에 상상을 덧대어 다른 세계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나와 다르게 움직이는 거울 속의 나를 보게 되지만 그 환영들이 빛이 닿는 곳에 머물 수는 없다. - [도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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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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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전세계적인 인기로 인기 작가가 된 스웨덴의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신작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가 나왔다.「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영화화가 되고 우리나라에서도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 다시 베스트셀러에 올라오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그게 소설의 매력이기에 나도 재밌게 읽었었다. 

 

그리고 요나스 요나손이 낸 두번째 소설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역시 전작의 인기 때문인지 출간되자마자 인기가 많다. 나도 그러한 독자 중에 한 사람이라서 그의 신간을 구매해서 읽었다. 재미있다. 가독성도 좋다. 그렇지만 너무 전작과 비슷하다. 전작과 너무 비슷한 레파토리 때문에 재밌게는 읽었지만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빈민촌 소웨토의 공동변소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섯살 때부터 분뇨통을 나르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소녀 놈베코는 빈민촌의 다른 사람들처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숫자에 대해서만큼은 천재성을 타고 났다. '까막눈이'는 소웨토의 빈민촌의 흑인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당연히 글자를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백인들이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어느 날 그녀는 동료들 앞에서 이 <변화>는 그들 모두의 삶에도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소장이 정치 얘기를 한다고 투덜거렸다. 온종일 똥을 나르는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이제는 똥 같은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 p. 33

 다섯살부터 자기 몸뚱이만한 분뇨통을 나르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셈을 하면서 숫자에 대해 천재성을 가진 놈베코는, 숫자 뿐만 아니라 눈치도 빠르고 세상 물정에도 밝았다. 열네살에 공동변소의 관리소장이 된 놈베코는 변태, 호색학이지만 소웨토에서 유일하게 글자를 알고 문학 애호가인 옆집 타보 아저씨를 통해 글자도 배우며, 라디오를 들으며 똑똑하게 말하는 방법도 터득한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다이아몬드 28개를 얻게 된 놈베코는 빈민촌은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 말라깽이 소녀가 나중에 커서 왕들과 대통령들과 사귀고, 열국을 벌벌 떨게 하고, 또 세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고 상상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맞는 말이다. 만일 그녀가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하지만 그녀는 그녀였다. - p. 18

 빈민촌을 탈출한 놈베코는 여러가지 우연한 사건들과 복잡한 사정 끝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핵폭탄을 개발하는 비밀 연구소 펠린다바에 갇혀서 청소부이자 하녀로 지내게 된다. 그렇지만 재능 없이 부친의 권력으로 남아공 최고의 핵전문가가 된 연구소장인 엔지니어를 도우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핵폭탄 개발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엔지니어의 실수로 원래는 만들려고 했던 6기 외에 하나의 핵폭탄을 더 만들게 되고, 이 핵폭탄 때문에 놈베코의 험난한 여정이 계속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험난한 여정을 보내는 놈베코의 이야기와 더불어 스웨덴 왕립 우체국의 말단 직원인 잉마르의 이야기가 함께 전개된다. 어릴적 우연히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에게 머리를 쓰다듬게 된 잉마르는 그 후로 스웨덴의 가장 열렬한 군주제의 지지자가 되어 다시 국왕을 만나기 위해 말도 되지 않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쌍둥이 아들 홀예르 1과 홀예르 2를 낳고 난 후에도 그의 국왕을 만나기 위한 여정은 계속된다. 그러나 우연한 구스타프 5세와의 만남 이후에 그는 이제 왕가를 없애는데 평생을 바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쌍둥이 아들 중 무뇌아라고 할 수 있는 홀예르 1은 아버지를 따라서 군주제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과격한 공화주의자가 되어 군주제를 폐지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다. 반면 한 명만 출생 신고를 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들인 홀예르 2는 달랐다. 그리고 홀예르 2가 핵폭탄을 가진 놈베코와 스웨덴에서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합쳐지고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주인공 알란만큼, 아니 그보다 더 기이하고 험난한 여정을 살아가는 놈베코가 100살 쯤 되어서 자신의 삶을 회상한다면 '분뇨통을 벗어 던진 까막눈이 여자' 정도의 이야기로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핵개발 엔지니어, 이스라엘의 정보국 요원, 열렬한 군주제의 지지자였다가 과격한 공화주의자가 된 아버지와 쌍둥이 형, 은행가 아버지를 두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되어 과격한 공화주의자 쌍둥이 형과 연인이 된 휘발유녀, 한나라의 토우를 위조하여 파는 중국인 세 자매 등 비정상적인 등장인물들과 비정상적인 상황이 가득한 이야기 속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놈베코와 홀예르 2의 고군분투기는 눈물겹기까지 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홀예르가 물었다.

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어. 놈베코가 대답했다. 왜냐하면 삶이란 원래 이런 식인 것 같으니까. -p. 227

이 소설은 1960년대부터 2010년까지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책 속에 나오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무기 개발과 포기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핵무기 6기가 개발되었다가 모두 폐기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가끔씩 언급되는 넬슨 만델라를 통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 갈등과 인종주의적 편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사실 나도 예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프리카에 위치한 나라라서 모두 흑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백인이 많아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무기의 개발과 폐기라는 역사적 사실을 비롯한 스웨덴의 군주제, 미국과 중국의 정치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작가의 이야기는 전작만큼이나 절묘하고, 기발하고 재미있다. 그리고 정치와 권력에 대한 풍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몇십년동안 핵폭탄과 함께 살아가는 놈베코를 통해서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핵폭탄이 주요 소재라는 점, 서로 다른 두가지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합쳐지는 것, 그리고 경찰에 쫓기는 상황 등 전작과 너무 비슷한 전개와 레파토리 때문에 재미 있는 소설이긴 하지만 ​식상하다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수 없다. 사람에 따라 그렇겠지만 읽는 내내 전작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떠올랐다. 

 

재밌는 소설을 써줬는데도, 재미있게 잘 읽어놓고도 투덜대는 나 같은 독자가 까탈스럽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작 덕분에 작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기에 그런것 같다. 소설이 줄 수 있는 기발함과 즐거움, 그리고 가독성도 좋은 이 책은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놓칠 수 없는 책이다. 그렇기에 요나스 요나손의 다음 작품이 더욱 기다려진다. ​

 


무심코 겉표지를 뒤집어서 봤더니 예쁜 보라색 바탕에 놈베코의 여정이 그려져 있었다. 책을 읽고 나면 이 그림들이 다 이해가 간다.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 안 뒤집어봤으면 어쩔뻔 했니. 이 표지도 너무 맘에 든다. 
 

5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인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가독성 좋은 기발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찾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전작인「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읽어본 독자라면 더욱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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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저기까지만, - 혼자 여행하기 누군가와 여행하기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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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빨리 '어른'이라는 장소로 도망쳐 오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에게, 그녀에게 빔을 보냈다. 

어른이 되면 좀 자유롭단다. 혼자 여행을 떠나도 괜찮아.  

 

29살 처음으로 떠난 파리 여행 이후, 나는 혼자서 여행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먹어갈수록 혼자 여행하는 것이 편해졌다. 예전에는 여행을 함께 갈 친구가 없으면 어디 갈 생각도 못했지만, 이젠 함께 갈 누군가가 없으면 '혼자 가지 뭐' 하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혼자보다는 마음 맞는 누군가와 여행하는 것이 더욱 좋지만.

 

이번 2박 3일간의 짧은 여름 휴가 기간 동안 함께한 마스다 미리의 책 「잠깐 저기까지만」은 이번 휴가 동안 나의 친구가 되어줬다.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그리고 지하철 안에서, 카페에서 버려질 수 있는 시간들을 알차게 채워주었다. 무엇보다도 어른이 되어서 이제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돌아다녀도 부모님이 뭐라고 하지 않는 여자 어른의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나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이 책은 40대의 여자 어른인 마스다 미리가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일본에서의 국내 여행과 핀란드 해외 여행 등 19가지의 소소한 여행기를 담은 책이다. 마스다 미리 혼자 떠난 여행도 있고, 일흔을 바라보는 엄마와 떠난 여행도 있고, 마음 맞는 여자 친구나 남자친구와 떠난 여행도 있다. 혼자 핀란드로 떠난 여행 말고는 대부분 '잠깐 저기까지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 여행들이다.



마스다 미리와 나는 여행하는 방법에서 같은 점도 있고, 다른점도 있다. 여행지에서 맛있는 것을 지나치지 못하고, 여행지에서는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서 줄을 서고, 여행지에서는 사고 싶은 건 꼭 사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 등이다. 그렇지만 다른 점이라면 마스다 미리는 여행사에서 나온 상품들, 패키지 여행 상품을 잘 이용한다는 점이다. 

 

혼자 간 파리 자유 여행 이후로 패키지 상품보다는 자유 여행을 선호하게 되었는데, 여행사의 특가 상품이나 저가 상품으로도 근교를 여행하고 오는 마스다 미리를 보면서 나도 다음엔 여행사를 한 번 이용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 여행에서는 보고 싶은 것을 볼 때, 사고 싶은 것을 살 때, '나중에'는 금물이야. - p. 74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다음에도 같은 여행이 될리는 없다. 기분, 날씨, 몸 컨디션. 각각의 균형으로 여행의 온도는 결정된다. 같은 여행은 두번 다시 할 수 없다. 그걸 알기 때문에 언제나 헤어지기 섭섭한 것이다. - p. 141


여행이란 비일상이어서 때때로 '일'을 집어넣지 않으면 죄책감에 시달리는 건지도 모르곘다. 탁탁 빨래를 펴서 욕실에 걸어두면 내 여행을 하루가 끝난다. - p. 150

 



여행지에 대한 거창한 설명이나 정보는 없지만 소소한 마스다 미리의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여행에 대한 단상, 그리고 삶에 대한 단상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마스다 미리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청춘'이란 지난 뒤에도 어딘가 가까이 있다가 이따금 얼굴을 내미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p. 38


마흔을 넘어 뭔가가 해결된 게 아니다. 막연한 불안을 떨쳐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순간의 행복을 인정할 수 있는 힘을 갖추었다. 헬싱키 거리를 마음대로 걷고 있을 때 나의  '행복'은 완벽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를 현혹시키는 것은 무엇 하나 없었다. - p. 174

 

  

특히 나도 재미있게 봤던 영화 《카모메 식당》의 배경인 핀란드 여행기를 읽으며 핀란드가, 북유럽이 너무나 가고 싶었다. 원래 유럽은 나에게 항상 가고 싶은 장소였지만, 이 책을 보니 유럽병이 다시 도지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은 익숙하지 않은 일본의 지명이었다. 교토나 오사카, 나라 등 익숙한 곳도 있었지만,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 더 많았다. 그래서 이 지역이 일본의 어디쯤에 있는지 검색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나도 '잠깐 저기까지만' 하는 마음으로 여행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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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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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감정수업> 이 책은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다. 인문학이 대세가 된 지금, 유명한 인문학자 중에 한 사람인 '철학자 강신주가 읽어주는 욕망의 인문학'이라는 표지의 글과 선명한 노란색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렇지만 500페이지라는 책의 무게 때문에 쉽게 선택하지 못했는데, 읽고 보니 전혀 두껍지 않게 느껴졌다. 48가지 감정을 48개의 문학 작품과 함께 설명하고 있기에 비소설이지만 소설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직장 상사 앞에서, 학교 선생님이나 교수들 앞에서, 시부모 앞에서, 경찰이나 검찰 앞에서, 조직 폭력배 앞에서, 아니면 사회 통념이나 정치 권력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 감정을 죽이는 것, 혹은 감정을 누르는 것은 불행일 수 밖에 없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척하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겠는가. 그러니 다시 감정을 살려내야만 한다. 이것은 삶의 본능이자 삶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과거보다 팍팍해진 우리 시대의 삶은 행복에서 더 멀어지게 하고, 삶의 조건이 악화된 만큼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게 된다. 그렇지만 '어떤 감정이든지 간에 그것이 내 안에서 발생하고, 또 나 자신을 감정들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기에, 저자는 우리는 감정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구분하고 연습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48가지의 감정들은 철학자들 중 거의 유일하게 개개인의 감정에 주목하여 '감정의 윤리학'을 옹호한 스피노자의 도움으로 배울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을 48가지로 나누어 각각의 본질을 명확히 규정했다. 더불어 각각의 감정들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굴곡지게 하는지 굵직굵직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로 더욱 쉽게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서 사랑마저 집어삼키는 괴물인 '탐욕'을,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을 통해서 타인에게 사랑이라는 착각을 만들 수도 있는 '연민'을,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을 통해서 수치심이 잔인한 행동이 되게 만드는 '분노'를, 토마스 하디의 소설 「캐스터브리지의 읍장」을 통해서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나약함인 '후회'를 알려준다. 그리고 스피노자와 대문호를 통해 받은 감정수업이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 놓치기 쉽다는 노파심에 '철학자의 어드바이스'라는 것도 각 장마다 추가해놓았다. 

 


 

스피노자와 문학 작품을 통해서 당연하게 느꼈던 감정들, 그리고 혼동하고 있었던 감정들을 조금 더 명확하게 알게 되어서 무척 좋았다. 그 중에서도 '연민'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몇 번이나 스피노자의 정의를 읽게 되었다.

 

연민(commiseratio)이란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한마디로 연민이라는 감정은 스피노자가「에티카」에서 간단히 정의한 것처럼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도 슬픔이다. …… 그렇지만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으로 바뀔 수 없다. 왜 그럴까?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초조한 마음」에는 서로 다른 감정을 지닌 두 남녀가 등장한다. 호프밀러라는 젊은 장교는 바로 이 연민 때문에 계속 에디트라는 불구의 몸을 가진 여인을 찾아간다. 그렇지만 에디트는 호프밀러를 사랑했다. 에디트는 키스를 통해서 호프밀러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연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호프밀러는 자신의 연민을 애써 사랑이라고 포장하게 되고, 결국 호프밀러 자신은 물론 에디트까지 불행해질 수 밖에 없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연민이란 감정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기쁨의 감정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슬픔의 감정이다. 처음에는 기쁨의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를 좀먹는 슬픔의 관계라는 사실에 봉착하게 될테니까. 연민으로 상대방을 만나는 사람은 내심 상대방의 불행에 기대면 산다는 것, 극단적으로 남의 불행을 자양분으로 삶을 영위하는 흡혈귀와 다를 바 없다. 

 

  

펄 벅의 소설「동풍 서풍」을 통해서 평소의 소신이나 가치관, 심지어 종교까지 기꺼이 내던져 버리고, 자발적인 노예 상태에 빠지는 것으로 '사랑'을 48가지 감정 중의 하나로 설명하고 있지만, 다른 감정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 바탕이 되는 감정 또한 기쁨과 슬픔을 모두 만들어내는 '사랑'이다. 사랑 때문에 자긍심, 경탄, 대담함, 감사, 확신 등의 기쁨이 있고, 사랑 때문에 경쟁심, 탐욕, 경멸, 절망, 질투, 후회, 복수심등의 슬픔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48가지의 감정수업도 받을 수 있지만 대문호들의 문학 작품을 통해서 다양한 사랑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아내라는 존재는 청혼에 응하는 그 운명적인 순간부터 여자라는 종에서 벗어나 별도의 잡종이 된다."

 

관계가 "범상함을 초월하려는" 노력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말해 "너절한 탄성에 따라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경탄의 존재로 남을 수 없게 된다. 어쩌면 애인이나 부부 관계보다 불륜이 사랑을 유지하는 데 더 유리한 조건인지도 모른다. 정상적이라고 인정된 남녀관계는 "게으르게 마냥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을 테니까 - 사랑이라는 감정의 바로미터, 「경탄」중에서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야심에 동시에 묶일 수 밖에 없다." 스피노자의 이 씁쓸한 당부를 읽는 순간, 우리는 서글퍼지지 않을 수 없다. 아, 사랑에도 이미 야심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구나!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약점 「야심」중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자기 파괴의 위험을 감당하며 사랑의 모험에 과감히 뛰어들지 않으면, 순간적으로는 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편리한 안일함은 우리의 삶을 무기력하고 무겁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결국 아주 천천히 우리 삶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파괴되어 갈 것이다. - 작은 불행을 선택하는 비극, 「소심함」중에서

 

부와 사랑, 둘 중 어느 것이 기쁨을 주고 어느 것이 슬픔을 주는지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자본주의 자체가 바로 슬픔의 기원이라는 통찰일 테니까 말이다. - 비극을 예감하는 둔탁한 무거움, 「슬픔」중에서

 

읽기 어려운 문학 작품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이 있다. 나도 그런 책을 좋아하는 독자 중에 한 명이다. 이 책이 그러한 책들과 다른 점은 책을 전체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읽고 나서, 여기에 나왔던 책을 읽을 때, 이 책에 소개되었던 감정에 치우쳐서 다른 것들을 놓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직 내 깜냥이 그렇게 넓지 않기에 그런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또한 문학작품과 그 작품의 작가들에 대해서도 소개를 하고 있어서 그 문학작품을 이해하는데 더욱 도움이 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까지 중간에 삽입되어 있어서, 감정수업, 문학작품에 대한 프리뷰, 그리고 그림까지 일석삼조를 얻을 수 있다.

 

…… 48가지의 감정들을 조심스레 성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쁜 감정인데 좋은 감정이라고 착각하거나, 반대로 좋은 감정인데 나쁜 감정이라고 혼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감정의 혼동은 삶의 혼돈을 낳고, 마침내 자신을 불신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기 쉽기 때문이다. 48가지의 얼굴로 드러나는 인간의 감정에 능통해져야만 한다. 그만큼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고, 당연히 '좋음과 나쁨'이라는 행동 기준을 더 단호하게 삶에 관철시킬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 에필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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