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평점 :
<강신주의 감정수업> 이 책은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다. 인문학이 대세가 된 지금, 유명한 인문학자 중에 한 사람인 '철학자 강신주가 읽어주는 욕망의 인문학'이라는 표지의 글과 선명한 노란색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렇지만 500페이지라는 책의 무게 때문에 쉽게 선택하지 못했는데, 읽고 보니 전혀 두껍지 않게 느껴졌다. 48가지 감정을 48개의 문학 작품과 함께 설명하고 있기에 비소설이지만 소설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직장 상사 앞에서, 학교 선생님이나 교수들 앞에서, 시부모 앞에서, 경찰이나 검찰 앞에서, 조직 폭력배 앞에서, 아니면 사회 통념이나 정치 권력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 감정을 죽이는 것, 혹은 감정을 누르는 것은 불행일 수 밖에 없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척하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겠는가. 그러니 다시 감정을 살려내야만 한다. 이것은 삶의 본능이자 삶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과거보다 팍팍해진 우리 시대의 삶은 행복에서 더 멀어지게 하고, 삶의 조건이 악화된 만큼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게 된다. 그렇지만 '어떤 감정이든지 간에 그것이 내 안에서 발생하고, 또 나 자신을 감정들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기에, 저자는 우리는 감정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구분하고 연습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48가지의 감정들은 철학자들 중 거의 유일하게 개개인의 감정에 주목하여 '감정의 윤리학'을 옹호한 스피노자의 도움으로 배울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을 48가지로 나누어 각각의 본질을 명확히 규정했다. 더불어 각각의 감정들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굴곡지게 하는지 굵직굵직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로 더욱 쉽게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서 사랑마저 집어삼키는 괴물인 '탐욕'을,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을 통해서 타인에게 사랑이라는 착각을 만들 수도 있는 '연민'을,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을 통해서 수치심이 잔인한 행동이 되게 만드는 '분노'를, 토마스 하디의 소설 「캐스터브리지의 읍장」을 통해서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나약함인 '후회'를 알려준다. 그리고 스피노자와 대문호를 통해 받은 감정수업이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 놓치기 쉽다는 노파심에 '철학자의 어드바이스'라는 것도 각 장마다 추가해놓았다.

스피노자와 문학 작품을 통해서 당연하게 느꼈던 감정들, 그리고 혼동하고 있었던 감정들을 조금 더 명확하게 알게 되어서 무척 좋았다. 그 중에서도 '연민'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몇 번이나 스피노자의 정의를 읽게 되었다.
연민(commiseratio)이란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한마디로 연민이라는 감정은 스피노자가「에티카」에서 간단히 정의한 것처럼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도 슬픔이다. …… 그렇지만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으로 바뀔 수 없다. 왜 그럴까?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초조한 마음」에는 서로 다른 감정을 지닌 두 남녀가 등장한다. 호프밀러라는 젊은 장교는 바로 이 연민 때문에 계속 에디트라는 불구의 몸을 가진 여인을 찾아간다. 그렇지만 에디트는 호프밀러를 사랑했다. 에디트는 키스를 통해서 호프밀러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연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호프밀러는 자신의 연민을 애써 사랑이라고 포장하게 되고, 결국 호프밀러 자신은 물론 에디트까지 불행해질 수 밖에 없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연민이란 감정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기쁨의 감정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슬픔의 감정이다. 처음에는 기쁨의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를 좀먹는 슬픔의 관계라는 사실에 봉착하게 될테니까. 연민으로 상대방을 만나는 사람은 내심 상대방의 불행에 기대면 산다는 것, 극단적으로 남의 불행을 자양분으로 삶을 영위하는 흡혈귀와 다를 바 없다.

펄 벅의 소설「동풍 서풍」을 통해서 평소의 소신이나 가치관, 심지어 종교까지 기꺼이 내던져 버리고, 자발적인 노예 상태에 빠지는 것으로 '사랑'을 48가지 감정 중의 하나로 설명하고 있지만, 다른 감정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 바탕이 되는 감정 또한 기쁨과 슬픔을 모두 만들어내는 '사랑'이다. 사랑 때문에 자긍심, 경탄, 대담함, 감사, 확신 등의 기쁨이 있고, 사랑 때문에 경쟁심, 탐욕, 경멸, 절망, 질투, 후회, 복수심등의 슬픔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48가지의 감정수업도 받을 수 있지만 대문호들의 문학 작품을 통해서 다양한 사랑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아내라는 존재는 청혼에 응하는 그 운명적인 순간부터 여자라는 종에서 벗어나 별도의 잡종이 된다."
관계가 "범상함을 초월하려는" 노력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말해 "너절한 탄성에 따라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경탄의 존재로 남을 수 없게 된다. 어쩌면 애인이나 부부 관계보다 불륜이 사랑을 유지하는 데 더 유리한 조건인지도 모른다. 정상적이라고 인정된 남녀관계는 "게으르게 마냥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을 테니까 - 사랑이라는 감정의 바로미터, 「경탄」중에서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야심에 동시에 묶일 수 밖에 없다." 스피노자의 이 씁쓸한 당부를 읽는 순간, 우리는 서글퍼지지 않을 수 없다. 아, 사랑에도 이미 야심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구나!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약점 「야심」중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자기 파괴의 위험을 감당하며 사랑의 모험에 과감히 뛰어들지 않으면, 순간적으로는 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편리한 안일함은 우리의 삶을 무기력하고 무겁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결국 아주 천천히 우리 삶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파괴되어 갈 것이다. - 작은 불행을 선택하는 비극, 「소심함」중에서
부와 사랑, 둘 중 어느 것이 기쁨을 주고 어느 것이 슬픔을 주는지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자본주의 자체가 바로 슬픔의 기원이라는 통찰일 테니까 말이다. - 비극을 예감하는 둔탁한 무거움, 「슬픔」중에서
읽기 어려운 문학 작품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이 있다. 나도 그런 책을 좋아하는 독자 중에 한 명이다. 이 책이 그러한 책들과 다른 점은 책을 전체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읽고 나서, 여기에 나왔던 책을 읽을 때, 이 책에 소개되었던 감정에 치우쳐서 다른 것들을 놓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직 내 깜냥이 그렇게 넓지 않기에 그런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또한 문학작품과 그 작품의 작가들에 대해서도 소개를 하고 있어서 그 문학작품을 이해하는데 더욱 도움이 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까지 중간에 삽입되어 있어서, 감정수업, 문학작품에 대한 프리뷰, 그리고 그림까지 일석삼조를 얻을 수 있다.
…… 48가지의 감정들을 조심스레 성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쁜 감정인데 좋은 감정이라고 착각하거나, 반대로 좋은 감정인데 나쁜 감정이라고 혼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감정의 혼동은 삶의 혼돈을 낳고, 마침내 자신을 불신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기 쉽기 때문이다. 48가지의 얼굴로 드러나는 인간의 감정에 능통해져야만 한다. 그만큼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고, 당연히 '좋음과 나쁨'이라는 행동 기준을 더 단호하게 삶에 관철시킬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