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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평점 :
특별한 듯 아닌 듯, 아슬아슬 줄타기 하며 내달리는 이야기 폭포.
끊임없이 숨겨진 이야기와 다음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든다.
장르를 넘나드는 즐거움은 기본, 여성, 가족, 사랑, 결혼, 삶 등등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독창성이란 고명까지 기막히게 얹어져 있으니, 내가 원하는 소설의 모든 요소 충족.
[대괄호]를 이용하여 지문처럼, 해설처럼, 작가 자신처럼 등장하는 -옮긴이가 부르는 말로- 코러스는,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자신이 단 한 명의 사랑을 받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마틸드와 "모두의 사랑을 원하"는 로토.
1부는 <운명>, 로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전쟁은 아주 먼 곳의 이야기인 이 번영의 시대에, 남자로, 부자로, 백인으로, 미국인으로 태어"난 로토의 이야기로.
로토는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어머니에 의해 뉴햄프셔의 부유한 학생들이 있는 기숙 학교에 가게 된다.
그 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마틸드를 만나기 전까지, "영혼을 섹스에 헌납했다고 생각"하며 방탕한 나날을 보낸다.
마틸드를 만나고, 그야말로 첫눈에 반해 그 자리에서 청혼하고, 결혼. 앤트워넷은 그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로토는 배우로 성공할 것을 꿈꾸지만 좀처럼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마틸드는 장시간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 날, 로토는 자신의 실패에 대해 절망하다가 술에 취해 글을 쓰고, 마틸드는 그의 재능을 알아본다.
이후 극작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다.
마흔 여섯. 마틸드에게 한 때 다른 남자(에어리얼)가 있었음을 알게 되고 혼란을 느끼다가, 가족 내력인 동맥류로 사망한다.
2부, <분노>. 마틸드의 이야기.
로토가 모르던 많은 비밀이 드러난다.
로토의 분노는 그녀가 그가 만든 이미지 "착한 여자! 아름다운 여자! 사랑스러운 여자!"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는 그녀를 잘 알았을까?
마틸드는 네 살 때 동생의 죽음을 방치(또는 유도)했다는 이유로 부모로부터, 할머니로부터 버려진다.
매춘으로 살던 외할머니마저 죽자, 냉담한 외삼촌에게 맡겨지고, 그는 어떠한 애정도 관심도 없이 그녀를 법적 의무기한인 열 여덟살까지만 부양한다.
학비와 생계비가 필요했던 마틸드는 에어리얼과 소위 '비즈니스' 관계를 맺게 된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그 관계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다 부유한 로토를 알게 되고, 계획적으로 접근, 결혼에 골인한다.
마틸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앤트워넷은 그들을 갈라놓으려 하고, 그들은 평생 악의에 찬 메시지를 주고 받는다.
그녀는 결혼생활에 충실하며 남편의 성공을 위해 모든 일을 다한다.
생계를 유지하고,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아이디어를 주고, 삼촌을 협박해 그의 작품 초연을 지원받는 등.
이 정도가 큰 줄거리다. 말하지 않은 내용이 더 많다.
동생의 죽음을 지켜본 나이, 네 살.
그녀에게 진정 악의가 있었을까. 진실은 알 수 없다. 있었다면, 그것이 정말 '악의'인지도.
다른 사람에 의해 편집된 이야기는 "믿을 수 없었지만 그녀 안에는 믿는 그녀가 존재했고, 그녀가 품은 이 모순은 그녀에게 모든 것의 근원이 되었다."
훗날, 또 한 명의 중요한 등장인물이 하는 말. 어쩌면 어린 그녀가 하고 싶었을 말.
"나를 행복하게 해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자신을 만든 사람에게 간청했다. 그러면 나도 다시 도덕성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일찍이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그녀.
스스로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남편을 만나 사랑하면서도 무작정 행복에 몸을 맡기지 못한다.
"그녀는 이렇게 순수한 형태의 기쁨은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로토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평생을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 살아간다.
그가 죽은 뒤에야 뒤늦게 깨닫는 것. 미리 알 수 없었던,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
"로토는 나를 결코 떠나지 않았을 거야. 그 사실은 내 뼛속 깊이 알 수 있어. 당신이 무슨 짓을 했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없었을 거야.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했던 삶은 당신이 무슨 짓을 해서 망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어."
작가가 드러내놓고 천착하는 것은 이것으로 보인다.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의 문제. 태양의 위치에서 보면 결국 인류란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는 그저 회전하며 깜박거리는 빛일 뿐이다. (...) 구체적인 것은 한곳에 초점을 맞출 때에야 보인다. 콧구멍 옆의 점, 잠자는 동안 건조해진 아랫입술에 들러붙은 치아, 겨드랑이의 종잇장 같은 피부."
"비극, 희극. 그건 오로지 관점의 문제다."
내가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을 이유이기도.
결혼에 대한 서사 또한 이 소설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결혼이 뭐냐는 질문에 로토는 말한다. "끝나지 않는 향연. 먹고 또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것."
마틸드는 말한다. "키플링은 그걸 아주 긴 대화라고 했어."
로토의 환상 속에서 엄마 앤트워넷이 말하길,
"결혼이란 건 거짓말투성이야. 대체로는 친절한 거짓말이지만. 말하지 않는 거짓말 말이지. 날마다 배우자에 대한 생각을 입 밖에 내어 말한다면 결혼생활을 짓밟아 뭉개는 거나 마찬가지일 거야."
그녀가 정의하는 결혼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눈이 번쩍 뜨이는 흥미로움은, 그 역시 하나의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줄거리를 요약하며, 나는 과연 로토가 아내를 잘 알았을까, 질문했다.
사실, 나는 그가 그녀를 아주 잘 알았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오해가 있긴 했지만.
"결혼생활의 패러독스, 즉 결코 누군가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를 완전히 알고 있음을."
그가 아는 그녀 역시, 분명한 그녀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긍정적으로 미화된 모습뿐 아니라, 그가 느끼는 막연한 옭아맴도, 그녀를 "자신의 표현 수단을 찾지 못한 예술가" 같다고 보는 면도.
물론, 그럼에도 따로 또 함께, 동상이몽은 삶의 묘미 정도가 아닐지.
어느 날, 마틸드는 말 그대로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피했다는 사실에 "감사와 죄의식과 두려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울고", 로토는 그 울음이 "그들에게는 자식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함께 운다. 그렇게 다른 생각으로 울고, "벌어졌던 그들 사이에 다리가 놓였고, 그들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로토와 마틸드 부부뿐만 아니라, 앤트워넷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남편에게 신앙을 갖게 하는 것에 실패하자, 아들을 위해 한밤중에 묵시록을 읽어주는 장면은 일면 소름이 끼친다.
"그녀는 구름 속에 마련된 자신들의 자리에서 아들과 함께 슬픔에 잠겨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 두 사람(남편과 시누이)이 저 아래에서 영원히 불타는 것을. 로토만큼은 기필코 구원해야 했다."
신앙 또한,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전술한 것처럼, 대괄호 코러스는 기막히게 활용되는데 가령 이런 식이다.
"[이 죽은 소녀를, 이 죽은 소년을 소환해 성적으로 흥분시킨 뒤 섹스를 하게 하는 건 어딘가 잘못되었다.]"
때로 잔인한 이야기도 해야 하는 작가의 숙명이자 죄의식으로 읽혔다.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께와 성인에게 적당할 문장과 내용 전개 등은 이 책의 호불호를 확연히 갈라놓을 듯하다.
누군가 한줄평을 묻는다면, 앞의 열 장쯤 읽어 보라는 말로 대신하겠다. 딱 열 장 정도야.
인내력 발휘할 필요없이 결정날 듯하다. 집어 던질지, 밤을 꼴딱 새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