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자
실비아 플라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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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억압에 대한 인식과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질병. 

어느 한쪽에 무게를 실을 수가 없다. 

페미니즘으로 나아가기엔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멈춰졌으며, 개인적 영역으로만 몰기엔 시대와 상황이 그녀의 병을 열심히도 악화시켰다. 

그녀의 혼란과 함께 나조차 머릿속이 뱅글뱅글.

어지럽다. 


대학졸업반의 에스더 그린우드. 

지역 신문의 대학 통신원이자 문예지의 편집자, 우등생위원회의 간사이고, 유명 여류 시인인 교수의 대학원 추천서와 전액 장학금이 약속되어있다. 

소설은 그녀가 잘나가는 패션잡지사에서 뽑은 열두 명의 객원기자 중 한 명이 되어 뉴욕에서 여름을 보낸던 때부터 시작된다.

이제 패션 잡지의 최고 편집자에게 일을 배우게 되기까지 했으니, 그녀의 선택만이 남았다. 교수, 편집자, 소설가 혹은 아내 등등. 

하지만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로젠버그 부부가 매카시즘에 의해 전기의자로 처형되던 1953년.

"그 여름, 내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로젠버그 부부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인식하고, 그것에 무지한 자들에게 분노를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 

더불어, 그 사형 방식이 후일 그녀를 괴롭히는 전기에 의한 것이라는 것에도 시선이 간다. 


가능한 많은 미래가 있지만, 어떤 것도 결정할 수가 없는 에스더. 

"열매를 몽땅 따고 싶었다. 하나만 고르는 것은 나머지 모두를 잃는다는 뜻이었다. 결정을 못 하고 그렇게 앉아 있는 사이, 무화과는 쪼글쪼글 검게 변하더니, 하나씩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지내지 못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런 질문을 떠올리자 슬프고 고단했다. 이어서 어째서 하면 안 되는 일을 하면서 지내지 못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오랫동안 교제한 버디와 그의 가족은 자연스레 그들이 결혼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또 버디는 뻔히 알지 않느냐는 듯 못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아이를 가지면 느낌이 달라질 거라고, 그때는 시를 쓰고 싶지 않을 거라고. 여자가 결혼을 해서 자식을 가지면 세뇌가 되고, 나중에는 전체주의 국가에 사는 노예처럼 둔해지는 게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또한, 버디는 그녀에게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보였던 듯하다. 

"여자는 순결한 삶만 살아야 하는데, 남자는 순결한 삶과 그렇지 않은 삶, 두 가지를 산다는 생각을 참을 수가 없었다."

버디가 성경험을 고백하자, 그녀는 그를 상종못할 위선자로 여긴다. 


유엔의 통역사인 콘스탄틴과의 데이트는 아버지와 함께 했던 아홉살 이후 "가장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하나, 그를 선택할 수도 없다.

"(...) 나는 결혼 생활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결혼 전에 남자는 장미며 키스며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를 퍼부으면서도, 속으로는 결혼식만 끝나면 여자가 윌라드 부인의 부엌 매트처럼 자기 발밑에 납작 엎드리기를 바란다는 것을."


그녀가 느끼는 부조리와 분노는 건강하게 밖으로 표출될 기회를 찾지 못하고 그녀를 더욱 안으로만 침잠하게 만든다. 

그녀에게 나머지 열한 명의 평범한 일행들은 "지긋지긋하게 따분"하고, "메스껍"게 보일 뿐이다.

자신도 찾아간 극장, 뻔한 내용의 영화. "관객들은 하나같이 멍청이로 보였다."

"사람들은 먼지 덩어리에 불과했고, 그런 먼지 덩어리를 치료하는 게 시를 쓰는 일보다 뭐가 대단한지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오던 남자에 대한 말은 어떤가.

"귀가 튀어나오거나 이가 이상하거나, 다리가 불구인 창백한 남자가 있었다. (...) 내가 왜 그런 꼴을 당해야 하나. 내가 모자란 것도 아닌데, 그저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고, 언제 멈추어야 할지 모르는 것뿐인데."


나는 이런 그녀의 시각이 진심으로, 참 안타깝다. 

자신만이 특별하다는 생각. 그 덫. 

그렇게 완벽하게만 보이던 모범생 에스더의 마음 속엔 지옥이 있다. 

"다른 사람이 난처한 상황에 처한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교통사고가 나거나, 길에서 싸움이 벌어지거나, 실험실 유리병에 담긴 아기를 발견하면, 난 걸음을 멈추고 구경했다. 어찌나 골똘히 봤던지 그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노이로제, 우울증, 신경쇠약,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병은 점점 깊어간다. 

그녀의 병이 깊어갈수록, 소설은 점점 읽기 힘들어진다. 그녀의 병을 지켜보는 것이 고통스럽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내지도 않는 그녀의 모습은 섬뜩하다. 

"핏자국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고 볼 만해서, 그대로 놔두고 돌아다니기로 했다. 마른 자국이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죽은 연인의 유품이라도 되는 양 간직할 작정이었다."

"왜 사람들이 날 빤히 쳐다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보다 이상한 사람들도 많은데, 뭐."


집에 돌아와 소설을 써보려고도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제야 문제가 뭔지 알았다. 난 경험이 필요했다. 남자랑 자본 적도 없고, 아기를 낳아본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이 죽는 걸 본 적도 없이 어떻게 인생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을까?"

독일에 갈까, 논문을 쓸까, 무엇을 할까 생각해보지만, 이런저런 공상들만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뿐,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열아홉 번째 전봇대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든 엄마를 보고 하는 생각 역시 또 한 번의 섬뜩함을 불러일으킨다.

"돼지 소리 같은 소음이 짜증스러웠다. 코 고는 소리를 멈추게 할 방법은, 소리를 내는 살과 그 안의 움푹한 부분을 양손으로 잡고 비트는 길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행동엔 한층 광기가 어리고, 결국, 자살에 골몰하기 시작한다.

투신한 자살자의 신문기사를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일본인의 할복을 상상한다. 손목을 그을까, 익사를 할까 생각한다.

"익사가 가장 친절하게 죽는 방법이라면, 최악의 방법은 불에 타 죽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목에서, 저자 실비아 플라스가 -불에 탄 것은 아니라 해도- 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녹초가 될 때까지 수영하며,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 하는 대목에서, 그녀가 나아지길 기도한다.

그러나 그 날, 그녀는 목매달기에 실패하고 약물을 과량 복용하나 역시 미수에 그쳐,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병원에서의 치료는 충격적이다. 

의사는 당시의 의학대로 제 역할을 하는 듯 하지만 그녀의 마음 속을 바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고, 충격요법이라는 전기치료는 끔찍할 뿐이다.

딸을 사랑하는 엄마는 그녀 때문에 하얗게 질리고 울며 고통스러워하지만, 그녀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엄마는 말했다. 자기에 대해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생긴 병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 게 치료법이라고. 그래서 테레사는 나를 동네 병원의 자원 봉사자로 등록해주었다."

엄마는 그녀를 그렇게 진단하고, 의사들은 엄마의 양육과정을 확인하며 문제 삼는다. 

어쩌면 그들의 판단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아팠다. 왜 수상한 늙은 여자들이 내게 관심을 퍼부을까? 그 유명한 시인, 필로메나 기니, 제이 시, <크리스천 사이언티스트>지 여자 상사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날 옆에 두려 했다. 보살피고 영향을 주어서 자기를 닮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무엇이 진짜 원인이었든, 어디서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고립감은 그녀를 또 한 번의 벨자(종 모양 유리그릇)에 가두지 않았을까. 


퇴원을 앞두고, 엄마는 지난 일이 나쁜 꿈이었던 것처럼 행동하자고 한다. 

"나쁜 꿈.

 벨자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죽은 아기처럼 텅 비고 멈춰버린 사람에게 세상은 그 자체가 나쁜 꿈인 것을."

"내가 돌아갈 대학의 브리지 게임을 하고 소문에 대해 떠들고 공부하는 여학생들과, 벨사이즈의 우리와 무엇이 다를까? 그 여학생들 역시 어떤 종류의 벨자 밑에 앉아 있는 것을."


결국 퇴원하지만, 그녀는 달라지지 않았다. 

"예전부터 퇴원할 때는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을 알고 확신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내가 '분석'되었으니 모든 게 분명해질 터였다. 그런데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물음표뿐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작가 자신일 것이라는 진부한 오해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문학을 이해하지 못해 발생하는 오해인데다가,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들의 입을 막는 부당한 도구가 될 수 있으므로. 

그러나. 

이 소설이 너무도 명백히 자전적 소설로 보인다는 것에, 깊은 안타까움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러니까, 에스더는 가공의 인물이지만, 

나는 그녀가 글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퇴원 후 주어졌던 십년은 그녀에게 무엇이었을까. 

축복이었을까. 재앙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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