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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평점 :
소파에 늘어져 읽을까 하다가, 첫장부터 나를 일으켜 책상 앞에 앉게 했다.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낯익은 이 문구, 이 책에서 나온 것일까 하며.
삶에 대해 방관하고 냉소하며 스물 다섯 해를 살아온 스스로를 반성한 안진진.
어느 날 아침 불현듯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다짐한다.
동어반복 같은 그 말, 사실은 진리와 같은 그 말에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인생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에 내 생애를 걸어야겠는가. 시작부터 그녀를 응원한다.
그녀는 일란성 쌍둥이인 엄마와 이모, 그리고 아버지의 삶을 돌아본다.
"내 삶을 변명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삶을 들춰내야 한다는 일은 정말 어리석은 변명처럼 들린다. 게다가 스물다섯의 다 커 버린 나이에는 수치스러운 변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검토할 수도 있다고 나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내 삶의 뿌리를 더듬기 위해 어머니가 등장하는 것이 꼭 부끄러운 일만은 아니다."
쌍둥이로, 똑같은 조건 속에서 출발한 엄마와 이모의 삶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던 그녀는,
일찍이 삶에 대한 동기를 잃어버렸던 것을 직시한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 엄마 탓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오히려, 가정, 사회, 제도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영악함만 있고 자존심은 없는 인간들"을 경멸하는 우리의 안진진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며, 인생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나의 인생에 있어 '나'는 당연히 행복해야 할 존재였다. 나라는 개체는 이다지도 나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해서 꼭 부끄러워 할 일만은 아니라는 깨달음,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안진진은 결혼을 다짐한다.
내가 뭔가를 의아하게 여길만하면, 어김없이 작가의 대답이 들려왔다.
가령, 인생에 생애를 걸겠다는 다짐이 결혼으로 이어져야겠느냐, 는 의문에 그녀는 답한다.
"내가 결혼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제발, 부탁이니, 누구도 비난하지 말기를 바란다" 며,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본인 역시 이미 충분히 사색하지 않았겠느냐고.
"나는 나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이상 나를 학대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특별하고 한적한 오솔길을 찾는 대신 많은 인생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택하기로 했다. 삶의 비밀은 그 보편적인 길에 더 많이 묻혀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으므로."
아무렴, 나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할 뿐.
결혼을 마음 먹었으나 사랑이 뭔지 알길이 없어, 안진진은 나영규와 김장우 사이에서 갈등한다.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유사 사랑인지 알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위한 그녀의 고군분투.
"나는 감상과 유치함에 대해 언제나 과감하게 적대적이었으니까." 라고 말하는 안진진이지만,
그녀의 로맨스는 확실히 오글오글한 면이 있었다. 그게 싫지 않고, 귀여웠다.
그 덕분에 묵직한 제목에 비해 책은 전체적으로 명랑한 색채를 띠고 있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안진진은 스물 다섯이니까.
이런 생각 역시 풋풋했다.
"마음에 어떤 표시가 나타나야 결혼을 결정하게 되는 것인지 나는 정녕 알 수 없었다."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사랑이 뭘까 탐구하는 그녀의 고군분투를 따라가며 열렬히 응원했다.
결국 그녀가 찾은 사랑은, 나의 사랑과는 완전히 다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사랑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자에게는 스스럼없이 누추한 현실을 보여 줄 수 있다.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그 일이 쉽지 않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이었다."
"남김없이 다 솔직해 버리면 사랑이 누추해지니까. 사랑은 솔직함을 원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사랑 역시,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똑같은 사랑을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안진진은 <새의 선물>의 진희를 떠올리게도 했다. <모순>을 먼저 봤다면 <새의 선물>을 보며, 안진진을 떠올렸을 것이다.
안진진의 어린 모습이 진희구나, 하고.
스스로를 영악하다 생각하나 한없이 순진무구한, 아이.
생각할 줄 아는 근사한 아이.
모순 뿐인 세상을 기꺼이 들여다볼 줄 아는 아이.
어떤 표독스러운 말을 할지라도, 사실은 그 누구도 미워할 줄 모르는 착해 빠진 아이.
그것은 어머니와도 같다. 술주정뱅이에, 일생을 부랑하던, 못 고칠 병을 얻고서야 집에 들어온 남편을 받아주는 안진진의 엄마.
"어머니는 아버지를 용서했을뿐만 아니라 포기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안진진 역시, 삶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나는 그날 아침 마침내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어머니를 사랑했으므로 나와 진모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또한 절대적이었을 것임을. 우리 모두를 한없이 사랑했으므로, 그러므로 내 아버지는 세 겹의 쇠창살문에 갇힌 것이었다. 아버지가 탈출을 꿈꾸며 길고 긴 투쟁을 벌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면에서, 안진진과 퍽 대조적인 사촌 주리가 등장한다.
끝내 안진진에게, 너희 아버지는 가족을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에 옳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촌 주리.
동의 여부를 떠나, 그녀가 무례했음을 성토하고 싶은 나를 두고, 안진진은 말한다.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우리들 머릿속을 오고 가는 생각, 그것을 빼고 나면 무엇으로 살았다는 증거를 삼을 수 있을까. 우리들 삶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것이 아버지가 가르쳐 준 중요한 진리였어."
"그것으로 이미 우리 아버지는 자식한테 해줘야 할 모든 의무를 다했어."
끝내 주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진리란, 오직 하나만이 존재하므로.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안진진은 그녀를 이해할 것을 그만둔다.
"탐험해봐야 할 수많은 인생의 비밀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주리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었다. 그것 또한 재미있는 인생의 비밀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말이다."
안진진은 주리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이모와 이모부 때문에 철저히 원천봉쇄되었다 생각한다.
단지 유예된 것은 아닐까.
살면서 오는 고통은, 그 고통 자체의 크기보다, 내가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을 테니.
몸이 아픈 것마저 "그게 다 응석인 거야. 평생 늘어진 팔자에 할 일이 그것말고 뭐 있어야지"라고 엄마에게 평가받던 이모가,
자살을 택하고 말았던 것처럼.
"이모는 자신의 죽음으로 자식들의 삶이 완벽하게 지리멸렬해지는 것을 막아냈다. 주리와 주혁은 평생 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반추하며 살아갈 것이었다."
스물 다섯의 안진진을 보며 나를 떠올리기란, 겸연쩍은 면이 없지 않다.
작가 나이 불혹이 넘어 썼으니 그때 가질 수 있는 삶의 통찰이 담겨있다해도, 안진진이 그 나이인데는 이유가 있는 법.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가끔은 과거의 나뿐만 아니라 현재의 나, 미래의 나마저 엿보았음을.
안진진이 아닌 양귀자로부터 나온 말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었다.
"이십대의 젊음이라는 것은 어떤 조건과도 싸워 이길 수 있는 천하무적의 무기이니까."
"이십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안진진으로부터 나왔다면, 모자란 나보다 진작 삶을 통달했다고 인정해줘야겠다.
불혹이 넘어 이십대를 떠올린 것이 아니라, 스물 다섯에 이십대의 찬란함을 깨쳤다면 안진진, 진작 내 친구 삼았어야 하는데!
읽으며 이거다, 하고 무릎을 탁! 쳤다.
이 책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도 해 본다.
나의 이십대에 읽었다면, 나를 조금 더 흔들었을까, 흔들리는 나를 붙들어주었을까.
이제는 쓸모없는, 무용한 생각.
순간의 무용함 또한,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니까.
'순간'에 방점을 찍는다.
결국, 무엇보다 유용하다고.
다시 옮기는 안진진의 말.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우리들 머릿속을 오고 가는 생각, 그것을 빼고 나면 무엇으로 살았다는 증거를 삼을 수 있을까. 우리들 삶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것이 아버지가 가르쳐 준 중요한 진리였어."
나는 문학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