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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친구와 두서없는 수다 중 내가 한 유명인의 미모에 감탄을 표했다.
친구는 말했다.
그거 성차별적 언사라더라.
으응?
친구에 의하면 한동안 SNS에서 핫한 주제였다고.
대충 넘어갔지만 의문이 남았다.
예뻐서 예쁘다고 말하는 게 성차별인가?
예쁘지만 예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게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남녀평등일까?
페미니즘의 왜곡이라 생각했다.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확산시키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퍼뜨리는 루머 같은 것.
만약 아니라면, 그것이 진짜 페미니즘이라면 어쩌지.
나는 안티 페미니스트였던가.
<나쁜 페미니스트>란, "규범화된 페미니즘은 불편하지만 자기만의 신념은 숨기지 않겠다는 '나의 페미니즘'이다." - 추천사 중
저자의 고백은 아주 진솔하다.
스스로 다이아몬드와 호화로운 결혼식을 좋아하며, 어떤 집안일은 남녀 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말하고,
아이를 갖고 싶고, 그것을 위해 일을 줄이고, 육아에 집중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본인은 나쁜 페미니스트일지도 모른다고.
"아, 불쌍한 페미니즘이여,
페미니즘의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 운동의 일차적 목표는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임을 잊지 말자."
저자는 페미니즘에도 문제와 결함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시시각각 변하는 이 사회를 중심을 갖고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목소리로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페미니즘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 일을 수행한 특정한 인간들에게 결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페미니즘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정죄하는 태도를 지적한다.
페미니즘과 '전문가적 페미니스트'를 구분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페미니스트로 대표되는 소수의 누군가를 추앙하는 것도, 그들이 실망스러웠다고 해서 페미니즘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결론내리는 것도 경계해야 함을 분명히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인간애와 정기적으로 의절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한다.
스스로 모순덩어리의 엉망진창인 인간이라고 말하며, 모든 해답을 갖고 있지도, 언제나 옳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지지하고, 이 세상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내 글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도 온전히 나 자신으로 남고 싶을 뿐이다."
그녀는 페미니즘이 어렵고 복잡하기도 하고, 빈틈이 많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오직 이성애자 백인 여성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훨씬 더 많은 투자를 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단순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 여성에게 자신의 몸을 지킬 자유가 있음을, 같은 일을 했을 땐 남녀 공히 동등한 임금을 받아야 함을 주장하는 것, 이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이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페미니즘에 관한 책이지만 인종차별, 문학이나 TV쇼 등의 문화비평, 프라이버시와 계급 등 방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다른 문화권의 독자로서, 모르는 대상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매우 흥미로웠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는 재미도 있었고, 독특한 유머도 좋았다.
누군가와 솔직한 수다를 떠는 기분이었고, 진짜 그녀와 실컷 수다를 떨고 싶어졌다.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쓰는 에세이스트가 이렇게 유쾌하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페미니즘에 대한 내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무엇보다 가장 압권은, 그 두서없어 보이는 다양한 화제들이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
그녀가 바라보는 '차별'의 테마는 성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종, 국적, 빈부, 계급, 외모 등등 모든 것과도 맥락이 닿아있다.
우리는 언제나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다.
모두가 연대해야 함을 시종일관 느끼게 한다.
사랑하기에 남자에게 맞아도 좋다고 말하는 여성들을 향해 끝없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여성의 인권을 수차례 유린한 유명인사들을 사회가 너무도 쉽게 용서했기에 "우리가 당신을 망쳐놓았다"고 말한다.
사회가 보여주는 외모에 대한 편견을 말한다.
뚱뚱하면 유전적이든, 의학적 문제이든, 의지박약이든, 뭔가 이유가 있어야만 사람들은 직성이 풀린다.
<스키니>라는 소설을 언급하며, 뚱뚱한 사람의 인생은 날씬한 사람의 인생과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견을 꼬집는다.
<남성의 몰락: 그리고 여성의 비상>이라는 책을 말하며, 왜 그 몰락과 비상이 맞물려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왜 함께 비상할 수 없는가.
여성의 지위가 충분히 올라갔다면, 왜 힐러리 클린턴은 여전히 패션에 관한 질문을 받아야하며,
무려 CNN이 여성은 투표할 때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다는 기사를 써내릴 수 있겠는가에 관한 의문 또한.
죄 없는 흑인 청년이 사살되었을 때 그것을 보도하던 미디어,
말끔하게 생긴 백인 청년이 살인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보도하던 미디어의 교묘한 태도를 지적한다.
우리 모두의 인종차별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실 모두 조금씩은 인종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인종 편견은 어느 정도까지 드러내는가의 문제가 아니고 언제 드러내느냐의 문제이다."
과연 우리는 자유로울까.
백인에게 한국은 아주 살기 좋은 나라라고 들었다. 흑인에게, 또 다른 유색인종에겐 녹록치 않다는 말을 들었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오던 비행기 안, 중년의 여성 둘이 아이를 안고 있는 베트남인 젊은 여성에게 계속해서 집요하게 캐물어댔다.
몇살인지, 베트남에 왜 갔다 오는지, 한국의 집은 어디인지 등등.
그리고 그들은 대놓고 혀를 차댔다. 애가 애를 낳았어, 쯔쯔쯔, 얘들은 다 이러지, 쯔쯔쯔.
남의 일에 상관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지 못하는 내 소심함이 싫었다. 질문공세를 받던 그녀는 무표정했다. 한국에서의 시간동안 얼마나 단련되었을까.
물론 우리는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저자의 일화는 한국인인 나를 순간 멈칫하게 만든다.
아래층에 살던 한국인 이웃이 나간 뒤, 아파트 관리인이 "그 지독한 냄새"를 빼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며 떠들었다고.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이 딸려나온다.
호주에서 만났던 대규모 농장주.
그는 자신의 농장에 일하는 사람 중 80%가 한국인이라며, 한국인의 성실성을 추켜세웠다.
가벼운 사교적 언어로서 좌중을 유쾌하게 하려고 한 것이 전부였으나, 그 자리의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나는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백인들은 도저히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쉬는 시간을 챙겨줘야 해서, 동작이 느려서.
가장 선호하는 국적은 인도라고 했던가, 파키스탄이라고 했던가.
어느 한 부분에서도 웃을 수 없었다.
우리에게 내재한 인종주의가 조금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해답일까.
어쩌면 최소한, '솔직함' 이라는 미덕인양 떠벌리지 않고,
그것을, 그 자신의 인종주의를 감히 당당하게 입에 올릴 수 없는 교양과 지성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 누구에게도.
그리하여 언젠간 역사 속으로 말끔히 사라져버리도록.
특권에 대해 말한다.
인종적, 젠더적, 경제적, 교육적, 종교적, 이성애자로서의, 비장애인으로서의 특권 등등.
가진 것 없다 생각해도, 돌아보면 내가 가진 특권 역시 많다.
그녀는 이 특권을 인정하자고 말한다.
"그저 당신 특권의 범위와 영향력을 이해하고 당신이 전혀 감도 못 잡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가고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 인식하고 있으면 된다.
(중략) 당신의 그 특권을 더 큰 사회적 선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사회 정의를 위해 일하고, 특권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권리를 박탈당하는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불충분하다는 의미로서의 "나쁜" 페미니스트라 칭했지만, 더이상 근사할 수 없다.
가지지 못한 것을 갖겠다는 투쟁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등, 사회적 연대를 지향한다.
또한 비극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말한다.
"나는 동정과 연민이 한정된 자원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도 않다.
크건. 작건. 비극이. 부르면. 연민이. 응답한다. 가슴이. 응답한다."
저자는 자신이 갖고 있던 페미니스트에 대한 편견을 고백한다.
과거의 그녀에게 페미니스트란 "성깔있고 섹스 싫어하고 남성 혐오에 찌든, 여자 같지 않은 여자사람"이었고, 그리하여 페미니즘을 부인했었다고.
고백하건대, 내가 가진 페미니스트에 대한 편견은 '상처받은 여자'라는 것이었다.
경미하든, 중대하든,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개인적이든, 공적인 폭력이건간에,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는 좀 불편했다.
맹세컨대, 그들이 받은 상처가 그들이 불러일으킨 일이라는 따위의 미친놈 같은 생각은 해본적 없다.
다만, 그네들이 그 아픈 상처를 드러내면서까지 이루고자 하는 것이 그렇게 가치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그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백명을 구하고자 한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에 대해 아직도 결정내리지 못한 인간이라서.
그러나 책을 읽고, 나는 반성한다.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부정하고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걸 거부하면서 페미니즘에서 잉태된 모든 발전과 변화를 지지한다고 말할 때는 솔직히 화가 난다."
작건 크건 그들이 떨어뜨려주는 콩고물을 날름 받아먹으면서도, 나는 유별난 여자가 아니라며 거리를 두려던 치사함.
또한, 앞장 선 그들은 누군가에 의해 등떠밀려 나온 것이 아닌 것을.
그들 스스로 상처를 다시 덧나게 하는 것이 아닌, 세상 밖으로 목소리를 내며 치유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며, 나로선 그들의 용기를 지지하면 그만인 것을.
무엇보다, 이 모순 투성이 세상에서 나도, 너도, 우리 모두, 예의 그 상처받은 사람인 것을.
왜 나는 홀로 상처받지 않은 척 하고 싶어했던가.
늘 남녀평등이 이뤄져야만 한다고, 내 작은 세상 속에선 주장해왔다.
그것은 분명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남성들이 받고 있는 압박 또한 가볍게 할 수 있는, 남녀 모두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고.
이것이 페미니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자의 주장은 간결하다.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진 못할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한껏 빠져들었으면서도,
그녀가 내내 주장한, 페미니즘에 대한 경계를 허물고 우리 모두 부족할지언정 자신의 신념을 품은 페미니스트가 되자는 말에 강하게 동요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책을 덮자마자 배척하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혹은 이해 못한 멍청이거나.
그러나 우리 모두 민주주의자이지만 -여기서 민주주의자의 반대는 반민주주의자이다-,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호칭하진 않는 정도의 수줍음이라 말하며 조금은 비겁하게 도망가련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
나 역시, 내가 아는 고운 님들 역시, 모두 페미니스트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스스로 공표를 하든, 하지 않든, 자각이 있든 없든간에.
우리 모두는 페미니스트.
자, 처음에 가진 내 의문으로 돌아가본다.
예쁜 여성에게 예쁘다 말하는 것은 페미니즘에 어긋날까.
(동성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이성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은 해답이 될 것 같지 않다.)
저자가 자세히 다루진 않지만, 책엔 '근본주의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단 하나의 진짜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 인류를 지배한다는" 개념.
그녀는 "근본주의 페미니즘이 실제로 있거나 혹은 내가 무언가를 근본주의로 인식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단서를 붙이면서도,
페미니즘의 정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나 장기간 오인 받아왔던 것들의 예시를 든다.
가령 분노, 유머 감각 없음, 적합한 페미니스트 여성이 되는 방법을 주장하고, 포르노그래피를 싫어하고, 여성의 대상화는 무조건 매도하고, 남성들의 시선에 부응하지 않고, 섹스를 싫어하고, 일에만 열중하며 제모를 하지 않는 등.
그녀는 말한다. "전투적이고 정치적이며 인간으로서 완벽하고 남자를 증오하고 유머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부정확한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정확하지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파악한 바,
예쁜 것을 예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페미니즘이라 하는 것은 소위 근본주의 페미니즘이거나, 그 페미니즘에 덧씌우고 싶어하는 편견이다.
혹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의도된 왜곡.
정확히 같은 말일지라도 때와 장소, 사람 등에 따라 충분히 성희롱과 성차별이 될 수 있다.
내가 들은 가장 끔찍했던 내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던 말은, 다른 사람과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던 말이었다.
그가, 그 자리에서, 내게 하면 안됐던 말이지.
도저히 때와 장소를 가릴 수 없는 사람이라면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때와 장소, 사람, 상황에 따른 구분 없이 모든 것을 단순화해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페미니즘이 예쁜 것을 예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내 페미니즘을 정의해본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을만큼 좋은 책이었다.
저자처럼,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하자. 페미니즘은 남녀 평등 아니겠는가.
우리 모두는 페미니스트임이 분명하다.
- 매우 좋았으나, 사소한 불만은 있었다.
노예제를 이야기하다가,
"대저택이건 목화 농장이건 아마 나는 그 마을 최악의 노예로 뽑혔을 것이며 하루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
난 이런 말이 좀 고깝다. 그 시절을 견뎌온 사람들은 당신과 달리 자존감이 없어서 버텼을 것 같은가, 타고난 힘이 좋아 버텼을 것 같은가.
남들이 버텨온 세월에 대해, 난 아마 죽어버렸을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적당한 위로일까. 모욕은 아닐까.
- 사소한 오류들도 있었다.
가령 고등교육을 받고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부터가 고등교육이다.
내용이 워낙 좋다보니 그런 부분들까지도 유쾌하게 웃으며 넘겼다.
"두꺼운 성기"가 기억에 남는다.
<나쁜 페미니스트 -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사이행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