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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 (리커버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2월
평점 :
<파이 이야기>를 쓴 얀 마텔의 초기 중단편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은 에이즈로 앓다 죽은 친구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나'와 잘 어울려 다니던 후배 폴의 건강이 악화되고, 그 원인이 에이즈로 밝혀진다. 에이즈 감염경로는 교통사고로 인한 수혈이다. 폴의 가족은 패닉에 빠진다. '나' 역시 학교생활을 엉망으로 하게 되고, 폴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한다. TV를 하고, 게임을 하고, 무력한 시간들을 흘려 보낸다. 급격하게 악화되어 가는 폴을 지켜보던 '나'는, 그와 함께 소설을 창작할 것을 결심한다.
"어쨌거나 폴은 열아홉 살이었다. 열아홉 살인 사람은 어떤가? 백지다. 모든 소망과 꿈과 불확실성이다. 모든 미래며 작은 철학이다. 우리 둘이 건설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무에서 유를, 헛소리에서 그럴 법한 것을, 삶과 죽음, 신, 우주, 그 모든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초월해서 실제로 그것들이고 싶었다." (p23)
'나'가 소설 창작을 할 것을 결심했을 때, 나는 쾌재를 불렀다. 마음 속에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거다. 우리는 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야기가 있을 때, 이야기를 남길 수 있을 때, 그 누구도, 그 무엇에도 지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그거였다. 상상력을 변형시키는 재주를 부리는 것. 보카치오가 14세기에 했던 일을 우리가 20세기에 해보는 거야. (중략) 세상을 끌어안는 이야기꾼이 되는 것……. 폴과 내가 그렇게 공허를 부수어야지." (pp23-24)
자신들이 창조한 헬싱키의 로카마티오 일가의 이야기를 쓰되, 각각의 에피소드는 20세기의 역사상 있었던 큰 사건들과 유기적인 연관을 맺도록 하는 것이 규칙이다. '나'는 최대한 이성적이면서도 낙관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애쓰나, 폴은 건강이 악화될수록 부정적인 이야기를 이끈다. '나'는 "이 모든 것에서 백육십만 킬로미터쯤 떨어져 있고 싶"(p66)을 정도로 괴로워하지만, 폴의 곁을 한결같이 지킨다.
"폴만, 로카마티오 일가만 생각한다." (p82)
결국 폴은 죽고(그의 죽음은 본문이 시작하자마자 나왔으니 스포일러는 아닐 테다), '나'에게 폴이 남긴 마지막 역사적 사건이 전달된다. 신파적 감수성을 배제한 채 재치있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결국은 날 울렸다. 삶은, 의미있다. 죽음이 있기에 더욱. 이야기, 그리고 삶에 관한 소설이다. 얀 마텔, 거장의 탄생할 것을 예고한 작품이다.
두번째 단편은 《미국 작곡가 존 모턴의 <도널드 J. 랭킨 일병 불협화음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었을 때》다. 워싱턴을 관광하던 '나'는 우연히 철거중인 극장에서, '월남 참전 용사들의 바로크 실내악 앙상블' 공연을 보게 된다. 단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보게 된 이 음악회에서, '나'는 예상치 못한 뜨거운 감동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일생에 한번 만날까 말까한, 천지가 찢어지는 경험이다. 음악이 완벽하지 못했음에도 '나'는 감동이란 말로는 부족한, 뜨거운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몇 분 동안 내 삶의 모든 것은 쓰레기였고, 고민과 어리석은 소리는 저만치 밀려났다 ㅡ 구름이 갈라지듯이. 난 숭고함을 보았다." (p114)
공연이 끝나고, '나'는 충동적으로 연주를 마치고 돌아가는 존 모턴을 따라가 대화를 한다. 그로부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외국의 전쟁이고 미국의 상처"(p98)에 지나지 않았던 베트남 전쟁은, 소설 후반 '나'를 흐느끼게 한다. 인간이 공감하고, 연민하게 되는 아름다운 순간들에 관한 기록이다. 겪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야, 반드시 그래야만, 내게 세상은 지옥이 아니다.
세 번째 단편 <죽는 방식> 역시 매력적이다. 얀 마텔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는 그 시작부터 확실히 드러났던 듯하다. 교도소 소장이 사형이 집행된 자의 어머니에게 법에 따라 편지를 보내는 내용이다. '죽는 방식 18', '죽는 방식 213', '죽는 방식 319' 등으로 이야기는 수없이 반복되고 변형된다. 과연 이런 처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마지막 음식으로 무엇을 먹었든, 죽음 앞에 덤덤했든, 흥분했든, 사형 직전 자살을 했든간에. 사형제 폐지를 찬성하는 나로서는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런 와중, 단연 눈에 들어오는 두 가지는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글을 남긴 '죽는 방식'과, 테이프를 남긴 '죽는 방식'이다. 그렇게, 우리는 의미를 남기고, 찾는다.
<비타 애터나 거울 회사: 왕국이 올 때까지 견고할 거울들>이 마지막 단편이다. 전쟁을 겪은, 아무것도 버리지 못해 넘쳐 나는 물건들 속에서 사는 할머니와 그녀의 잡동사니들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손자가 있다.
"난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지 않을 거야. 그건 확실하다." (p204)
"행복은 다양한 크기의 물건 속에 있는 게 아니다. 행복은 커다란 제품 속에 있는 게 아니라구."(p205)
"난 물질을 통해서 존재하지 않을 거야. 물질은 날 냉담하게 만든다." (p205)
그러던 손자는 할머니의 거울 만드는 도구를 통해, 그녀를 한걸음 이해하게 된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내 삶을 바꿀 필요는 없다. 각도만 조금 바꾼다면 족한 것이다.
삶과 죽음을 말하고, 이야기를 말한다. 작가로서의 이야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이야기. 우리는 이야기이고, 이야기는 곧 우리다. 책에 넘쳐나는 것은 문장력이 아니라 생명력이다. 팔딱팔딱, 살아 숨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