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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사이트 ㅣ 퍼즐 픽션 Puzzle Fiction 4
피터 와츠 지음, 김창규 옮김 / 이지북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블라인드 사이트>는 이제까지 읽어온 SF 중 가장 단단하다. 아마 한국어로 출간된 가장 하드한 SF가 아닐까 싶은데, 너무 단단해서 감정은 커녕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다. 듣도 보도 못한 전문용어, 몇번이나 되풀이해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 끊임없이 나온다. 이 소설의 실체를 대강 파악하기 위해 부록으로 실려 있는 작가의 흡혈귀에 대한 <부연 설명>을 훑어보자.
"호모 사피엔스 뱀피리스Homo Sapiens Vampiris는 단명한 인간 변종이다. 이 변종은 지금으로부터 70만 년 전경에 선조에게서 분화했다. … 흡혈귀의 망막은 4색 선택성이었다. 네번째 추상체는 적외선 부근의 가시광선에 민감했다. 세포 간 백질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회백질은 비교적 '연결성이 떨어졌다'. 따라서 대뇌피질은 자급자족을 할 수밖에 없었고 효율이 극단적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 학자증후군 수준으로 패턴을 비교할 수 있었고 분석 기술도 늘어났다.
이와 같은 특성의 근원은 결국 X-염색체의 Xq21.3 블럭에서 발생한 평동원체역위 변이라고 할 수 있다. … 흡혈귀는 유전자 암호를 y-프로토카데린 Y에 지정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 유전자는 사람과 동물의 Y 염색체에만 존재한다. 흡혈귀는 이렇게 중요한 단백질을 스스로 합성할 수 없기 때문에 음식에서 보충해야 했다. 따라서 흡혈귀의 식단에서 인간 먹잇감을 빼놓을 수가 없었다. (후략)" (503~504p)
이겤ㅋㅋㅋㅋ 뭐옄ㅋㅋㅋㅋ 작가 피터 와츠는 가능한 모든 과학적 맥락을 동원하여 흡혈귀를 브람 스토커의 허구에서 실재하는 생물종으로 되살려놓았다. 흡혈귀의 흡혈 풍습부터 어두운 곳에서 잘 보는 이유,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심지어 십자가에 약한 이유까지 설명한다. 전직 해양생물학자가 강박적으로 논문을 뒤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벌써부터 매력적이다.
소설도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시작된다. 외계인의 흔적이 발견되고 그들을 맞이할 탐사대가 꾸려진다는 발단은 전통적이지만, 그들을 만나러 가는 탐사대라는 인간 조합이 1. 뇌의 반을 날려먹은 주인공 2. 다중인격자와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이버네틱스 인간들, 3. 그리고 흡혈귀 선장이다. 물론 태양계의 경계에서는 파국적인 만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겠지.
이 소설이 설정만 자세한 작품이었다면 매력은 훨씬 반감되었겠지만, <블라인드 사이트>는 설정의 함정을 넘어 자각이 없는 우월한 외계인과 자각을 하는 열등한 인간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의식에 대한 도전적인 고찰을 시도한다. 근래 신경경제학 분야에서 발표되는 몇몇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의식적으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이미 무의식적으로 결론을 내려놓는다고 하지 않던가. 피터 와츠는 의식의 허상에 관한 추측을 소설을 통해 대담하게 제시한다. 지금껏 수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인간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훈장처럼 숭배받았던 '자의식'이라는 것이, 사실은 진화의 그저그런 부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쓸모 없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이 외계인의 구조물에서 겪는 맹시Blindsight, 보면서도 자각하지 못하는 현상이 그런 주제를 잘 전달한다.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는 헛소리로 치부될 여지가 농후하지만, 이런 배짱 가득한 상상력과 통찰이야말로 SF 독자가 찾아 헤매던 경이의 순간, 센스 오브 원더가 아닌가. <블라인드 사이트>가 가진 사고의 촘촘함은 이 냉소적인 통찰을 한 번 정도는 상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생각해보면 첨단의 과학은 언제나 인간을 우월의 권좌에서 끌어내려왔고, 자의식은 어쩌면 지동설과 진화론 다음 차례로 부서질지도 모르는 허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SF, 그것도 하드 SF의 문법에 익숙하지 않으면 읽기 힘들고, 나도 내가 소설을 읽었는지 존나 논문 요약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매니악 하기 그지 없는 이런 책이 도대체 어떻게 번역 출간되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블라인드 사이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강박적으로 자세한 설정들, 아름다운 과학적 묘사들, 그리고 그것들이 품고 있는 통찰은 섣불리 절판의 강으로 흘려보내기엔 아쉽기 때문이다.
* 개인적으로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소설보다도 뒤에 실린 '참고 문헌'이라고 생각함. 웬 소설 하나에 레퍼런스 논문이 130개가 달려 있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피터 와츠Peter Watts는 캐나다 출신의 SF작가이고, 전직 해양생물학자였다. http://www.rifters.com 에서 <블라인드 사이트>에 대한 설정을 볼 수 있다(Rifters는 그가 <블라인드 사이트> 전에 쓴 삼부작의 이름이다). 소설에 나온 우주선의 구조도와 인물들, 흡혈귀에 대한 프레젠테이션 등등이 제공된다. 심지어 영어 나레이션까지 제공되는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있으면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설정을 지어냈을 작가를 보는 기분이다.
*** 표지 디자인은 상당히 아쉽다. 책의 내용은 호러 SF에 가까운데(근원적인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장면이 꽤 있다), 우리나라 커버는 내용답지 않게 가볍다. 물론 공포스런 원판의 디자인을 따라갔다면 책은 전혀 팔리지 않았겠지.
**** 알라딘에 이 책에 관한 리뷰가 다섯개나 등록되어 있다. ㅋ ㅑ! 알라딘!
블로그에 썼던 리뷰(http://kidsmoke.egloos.com/2904456)를 옮겨옴.
"생명이란 건 이거냐 저거냐의 문제가 아냐. 정도의 문제지." (3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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