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흑인 여성 작가˝

지금 읽고 있는 <빌러비드>를 쓴 토니 모리슨에게 붙는 수식어이다. 이 말이 주는 생각이 여러가지 이지만, 가장 먼저 삶은 곧 투쟁이라는 말이 떠오르고, 이어서 이건 이상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벨상`과 `최초`는 자연스럽다. 노벨상은 누가 받아도 최초인 극소수의 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단어 `여성`, 그 앞에 있는 `흑인`, 합치면 `흑인 여성`이 `노벨 문학상`과 결합하는 건 역사적으로 볼 때 되게 이상한 일이다.

문학은 오랫동안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문명은 여성에게 글을 주지 않은 채, 남성의 눈으로 본 여성의 이미지만을 생산했다. 오랜 세월 문학은 여성이 쓰지 않은 여성을 이야기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이 사실을 잘 드러냈다. 그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인 자신이 역사를 새로 쓴다면, 전쟁이나 혁명이 아닌 여성이 자기 방에서 글을 쓸 수 있게 된 걸 가장 혁명적인 사건으로 기술하겠다고 했다. 이 말은 여성의 역사가 남성과는 다름을 인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이 말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들은 울프가 방을 여성 담론의 상징으로 가져온 걸 부르주아적이라고 했다. 흑인 여성에겐 방은 커녕 집과 연필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글씨에 대한 교육 자체가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이 젠더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인종과 계급 문제를 포괄해야 한다고 한다. 페미니즘은 젠더인종계급자본의문제라고 말하면서, 문학과 여성의 거리가 구만리였던 만큼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 사이의 거리도 멀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흑인 여성이 책을 써서 노벨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곱씹을 수록 생경하다.

한림원은 토니 모리슨에게 노벨 문학상을 주면서 ˝여성적인 섬세한 언어로 소수 민족인 흑인의 한과 서러움을 묘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이때가 1993년. 아마 지금이라면 `섬세함`을 `여성성`과 연결하진 않았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흑인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에게 노벨상을 준 건 지금 봐도 파격적이다.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의 여성 작가들처럼 토니 모리슨도 글을 쓸 자기만의 공간이 없었다.(물론 이혼한 다음의 이야기이다. 성장기의 모리슨은 부유했고, 좋은 교육을 받았다) 모리슨은 ˝식기와 빵조각이 어질러진 부엌 식탁에서 글을 썼다.˝ 모리슨의 전기를 모르지만 흑인 여성으로서, 그가 처한 상황은 여느 백인 여성 작가보다 나빴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학력과 프로필, 하워드 대학과 코넬 대학 졸업, 프린스턴의 교수, 미국 최대 출판사인 랜덤 하우스의 편집장을 하는 건 아무나 갖기 힘든 것이지만 그럼에도 흑인 여성으로서 그 또한 투쟁에 가깝지 않았을까.

이 책은 ˝노예라는 운명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 딸을 죽인 흑인 여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노예제의 참상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르포가 아닌 시적인 언어로 말한다. 올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이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극도로 사실적인 것과 달리, <빌러비드>는 환상적이고 시적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아마 잊혀진 고통을 재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동안 노예제는 영화와 문학에서 너무나도 많이 등장 했음으로, 그 익숙한 언어로 인하 무감각해진 고통을 시로서 다시 말하려고 한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추신.
두 구절이 맴돈다. 하나는 한 백인 소녀가 임신한 흑인 소녀에게 천진난만하게 묻는말이고 하나는 죽은 딸을 애도하는 표현이다.

˝너는 뭐할꺼니? 거기서 누워서 새끼를 낳을 거야?˝

흑인의 출생이 아기가 아닌 `새끼`를 낳는 동물 서사로 묘사되고 있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암탉처럼 색맹이 되어버렸다.. 빨간 사과나 노란 호박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가 없다. 매일 동트는 새벽을 보았지만, 그 색깔을 제대로 보거나 그에 대해 언급한 적도 없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하루는 갓난아이의 붉은 피를 보고, 또 하루는 묘비에 박힌 분홍색 돌가루를 보고, 그리고 그걸로 색깔은 마지막이된 듯한 기분이었다.˝

노예제의 고통에서 본 세상은 색맹의 세상이었다는 말. 색채감이 있는 건 죽음의 기억 뿐이라는 말이 가슴의 멍자국을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리석음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10
아비탈 로넬 지음, 강우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대 철학자 아비탈 로넬의 <어리석음>. 지독하게 어렵다. 한 문장도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 단어와 단어 사이를 졸음 운전하는 것 같다. 그동안 현대철학과 정신분석학을 나름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그런데도 이 책에서 까만 건 글자요 하얀 건 종이이다. 여러 번 집중해서 읽어야 아주 조금 감이 온다. 현대철학과 정신분석학이 녹아서 흐트러진 책이다.

저자 아비탈 로넬은 자크 데리다의 제자이다. 데리다가 죽기 전 마지막 제자 중에 한 명이다. 데리다는 로넬이 쓴 <어리석음>을 극찬했고, 투병 중 자신의 마지막 세미나에서 출간 전인 이 책의 내용을 주제로 다루었다. 로넬은 이 일을 아주 영광스럽게 여긴다. 그만큼 무게 있는 책이지만, 나로서는 그 스승의 그 제자답게 난해하기 짝이 없다. 느끼는 건 많은 데 이해하기는 힘든, 그런 '느낌적인 느낌'의 책이다. 하지만 문제의식, 이 책이 던진 중요한 문제의식 때문에 학구열이 타오른다. 끝까지 정독하고 싶다.

이 책은 '어리석음'에 관한 책이다. 처음엔 이 말이 뭔가 했다. 그런데 서문과 1장을 읽다보니 존재론에 관한 내용이다. "철학이 존재의 어리석음을 제거할 수 있는가?" 이것이 이 책의 문제의식이다. 이 책에서 로넬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자명한 지식으로 만들고자,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이면을 제거한 서구철학을 비판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본질은 자명성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한 존재는 그것에 부여된 의미보다 크다. 이것이 현대 철학의 존재론이다.

• 존재론은 의미론을 비판한다. 어떤 존재에 완벽한 의미를 붙이려는 의미론의 억압을 반대하고, 의미화되지 않은 존재의 남은 부분(존재의 잉여)을 옹호한다.

• 의미는 언어로 만들어진다. 이때 존재에 대한 억압이 생긴다. 언어는 존재를 규정하기 위해 존재를 죽인다. 존재의 많은 부분을 잘라내고 그 일부만을 들어서 참된 의미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의미론의 폭력이다. 석탄을 캐기 위해 산을 부수는 것처럼, 의미론은 의미를 캐기 위해 존재를 파괴한다.

• 서구 철학은 그동안 의미론을 추구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언어화해서 완벽한 의미로 만들려고 했다. 이들은 무의미한 것들, 즉 어리석음이 존재하는 걸 두려워했다. 그래서 자명성이라는 대의하에 어리석음을 제거하려고 했다. 그래서 존재를 깊이 탐구해서 의미를 붙였다.

• 하지만 이것은 실패했다. 존재는 의미보다 크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미를 갖다 붙여 존재를 다 설명해도 존재는 다 설명되지 않았다. 존재는 언어의 그물망을 빠져나와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어리석음을 제거하고자 한 한 철학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음은 살아남아, 자신이 존재의 본질임을 입증했다. "존재란 본래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 사실을 서구 철학은 어리석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음이었다.

• 로넬의 '어리석음'은 슬라보예 지젝이 말한 '좀비'와 같다. 현대 철학은 이 의미의 탄압에서 살아남은 존재의 잉여를 사유한다. 라캉의 주이상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등도 거의 같은 맥락이다. 이들은 모두 '쓸모 없다' 여겨진 것들을 사유한다.

• 문학은 존재의 어리석음을 사유함에 있어 철학보다 많은 기여를 했다. 철학이 존재에 의미를 붙이는 데 여념이 없을 때, 문학은 규명할 수 없는 존재의 어리석음을 나타내려고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시이다. 시는 존재를 규정하지 않고 표현 부재한 것을 판단 정지 상태로 남겨 둔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어리석음을 사유하는 사람이다.

여기까지. 우선 이렇게만 정리한다.

이 책이 나를 끌어당기는 건, 우리 사회의 의미론적 억압. '학생'은 '공부'를, '주부'는 '살림'을, '직원'은 "회사'를, '국민'은 '국익'만을 위한 존재라는 의미론의 억압을 가로막고, 한 사람은 그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존재는 의미보다 크다. 그러니 함부로 타인을 규정하지 말라"는 메시지에 어려운 내용임에도 빨려든다.

특별히 상처입는 사람들. 세월호 유가족, 위안부 할머니 같은 분들을 고골의 말을 빌리면 '씩씩한 혀'로 너무나도 쉽게 "규정하는"의미론적 폭력을 눈 앞에서 보는 지금, 이 책은 나에게 위로와 저항심을 동시에 준다. "모든 존재는 그것에 부여된 의미보다 크다. 그것을 보는 것이 윤리이자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