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야운하시곡
하지은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고3 수능을 준비할 때, 고전소설 부분이 좋았다.
언제 읽어도 알기 쉬운 글의 구조와 옛스러우면서도 재미있는 표현들, 허풍스러운면서도 익살스럽고 그러면서도 묘하게 비판하는 바가 분명한 해학과 풍자 그리고 환상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이런 나도 수능 이후부터 고전소설과 멀어지고 말았다.
스타트렉, 스타워즈, 트랜스포머, 히어로 시리즈 등 서양풍, 정확히 말해서 영미권의 작품들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가도 인터넷을 봐도 현저하게 차이가 날 정도로 많은 영미권 작품에 나는 고전소설로의 관심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고전소설에 대한, 동양풍에 대한 관심이 남아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몰라서 도서관의 동양문학 코너만 서성이기도 했지만, 무언가 잡아낼 수 없었다. 내가 바랬던 고전소설도 동양풍의 작품은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양풍 단편집인 <야운하시곡>이 나왔을 때 감격할 정도였다.
그토록 내가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고전소설을, 동양풍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예상보다 작품은 등골이 서늘해지고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피의 운명으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한 남자의 말로
돌고 돌아서 업보를 받은 남자의 회상과 끝
경국지색의 요부라 불렸던 여자의 서글픈 상황과 눈물
자신의 운명에 대한 확신조차 없었음에도 살아남은 자의 혼란
민화, 설화, 전설, 고전소설의 일부가 모두 섞인 듯한 동양풍의 향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꿈에 나와서 똑같이 당할까봐 무서울 정도였다.
실제 특정 지역의 설화에서 원전이 왔거나 오래된 시가에서 원전이 있는 경우, 직접 찾아서 진짜로 그런 내용인지 확인해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애틋하면서도 가슴이 저릿한 작품집이었다.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 존재이기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 존재를 위해서 스스로를 버려야 했던 사람
단지 더 나은 삶을 바랬지만 결국은 제자리였고, 그럼에도 아무런 이유 없이 살아야 하는 자
사랑했지만 의심했고 그렇기 때문에 가슴이 아픈 자
무섭고 소름이 끼치는 부분도 있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배경과 상황에 복잡미묘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따질 수도 없는 복잡한 이해관계와 그런 면모를 짚어내는 날카로운 시각에 가슴이 서글프고 아타까운 감정으로 후벼파지는 느낌이었다.
분명 내가 읽었던, 그리워했던 고전작품과는 다를지언정, 새로운 동양풍의 세계를 뼈조리게 느끼며 만났기에 더할나위 없이 즐거운 <야운하시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