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 감수성 트러블 - 성인지 페미니즘
오세라비 외 지음 / 가을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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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당신이 만 18세 미만의 사람이라면, 비판적인 사고가 부족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이 책은 독자가 스스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요구한다.

이 책은 성인지 감수성의 개념과 문제를 전하는 책으로 정보와 의견이 혼재된 상태다.

학교에서 배운 주장하는 글이다. 만약 당신이 정보와 의견을 분별하는 독해력이 부족하다면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그 정도로 이 작은 책에는 많은 정보와 강력한 주장이 담겨 있다.

이 경고를 보고도 이 책을 읽고 싶다면 정리하면서 읽기 바란다.

성인지 감수성이 페미니즘의 다른 모습인 만큼 그 흐름을 이해하려면 시간순서대로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서평을 시작한다.


국내에서 정치적으로도 활발하게 장악하고 있는 성인지 감수성은 페미니즘이다.

그것도 최근에 들어서 이름만 바꾼 오래전의 서구의 페미니즘이다.

왜 서구의 페미니즘인지 그 흐름을 보자.


우리가 아는 페미니즘은 서구에서 시작되었다.

1950년대 이전에 신마르크스 주의에서 시작되었다. 

신마르크스 주의가 시작되면서 베트남전쟁반대운동, 학생운동, 흑인인권운동, 페미니즘이 운동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1940~50년대 유럽에서 여성학은 성차별을 중심으로 성정치를 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는 페미니즘은 시작되었다고 보는 운동은 68학생혁명으로 프랑스 소르본 대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여성학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기존에 미국이 이루었던 균형을 무너뜨린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고 헌법으로 남겼으며, 흑인인권운동과 여성의 참정권 운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또한 2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여러 산업으로 여성들이 진출하고, 수용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온 여성학에 의해 이러한 상태는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벌였던 반문화주의와 계급 운동에 포함된 페미니즘이 있었다.

1966년에 미국에서 존 머니라는 의사에 의해 젠더 역할과 젠더 아이덴티티가 생겼다.

1970년대에 존 머니의 의견을 바탕으로 <성정치학>이 생겼으며,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났다.

문화막시즘이란 이름으로 여성학이 신문학으로 받아들여지고, 여성은 피해자, 남성은 가해자라는 관점이 확립되었다. 

이후 1980년때까지 교차성 페미니즘이란 이름 하에, 여성에게 다중적인 억압이 존재한다는 마르크의 계급 투쟁 이론이 흐름을 지배했다.

1990년대엔 주디스 버틀러로 인하여 이성애 정체성 해체가 부상하여 해체주의 페미니즘이 선도했다. 이때 젠더 이데올로기가 생기고, 이는 1995년 제4차 유엔여성회의에서 젠더 이퀼러티라는 페미니즘의 법제화로 이어졌다.

성인지 감수성은 서구에서 들어온 페미니즘의 다른 말로, 성별 구별을 없애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성인지 감수성은 페미니즘의 다른 이름이자 도구이다.


시대별로 페미니즘은 다른 이름과 도구를 통해 존재해왔다.

20세기 초기에서 중반까지는 문화막시즘으로, 1960~80년대에는 교차성 페미니즘으로, 이후에는 pc주의와 최근에는 성인지 감수성으로 존재한다.

서로 다른 이름과 모습을 지녔지만 페미니즘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면 여기에서 의문이 들 것이다. 왜 성인지 감수성이 문제인가?


1. 성인지 감수성은 모호하고 주관적이다.

성인지 감수성은 일상 속의 성차별을 느끼는 개인의 민감성을 의미한다.

즉 개인에 따라서 다르게 느끼는 지표이다. 그래서 정량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

정책을 수립하려면 통계 자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통계 자료가 보고서 작성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서 작성된다면, 과연 타당성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2. 성인지 감수성은 다른 성별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일으킨다.

성인지 감수성은 1970년대 여성은 피해자 남성은 가해자라는 성정치학과 젠더에 구별을 없애려는 젠더 이데올로기가 포함되어 있다.

성인지 감수성이 남성이 필수적으로 알고 갖추어야 하는 요소로서 강요한다면 이는 여성이 아닌 다른 성별에 대한 억압이자 성차별이다.


3. 성인지 감수성 교육의 계획과 구성이 적절한가?

성인지 감수성 교육의 예산은 최근만 해도 31조원에 250여가지 사업에 배정되었다.

문제는 세부 사업이 성인지 감수성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청소년 과학교육, 해외봉사단 파견이 성인지 감수성 교육과 무슨 상관일까?

여가부에서 계획한 정책조차 청소년과 교육 분야에 걸쳐 있다는 점에서 대상과 범위 그리고 내용이 타당한지? 적절한지? 검토해야 한다.


4. 나다움 어린이책의 적절성 문제

최근에 여가부에서 실시한 '나다움 어린이책'은 동성애와 동성혼 그리고 외설 문제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노골적으로 성관계와 출산에 대한 장면이 나온다면 이는 초등학생의 발단 단계에 맞는 성교육이라고 볼 수 있는가? 

동성애와 동성혼이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미 인정되었으며 권리를 보장 받았다는 듯이 표현이 된다면 이 또한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5. 나다움에서 자연적인 성별 차이 무시

근육량과 호르몬처럼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성별 차이가 있다. 이로부터 어떻게 할 수 없는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생긴다. 이를 나다움이라는 자아 정체성에 포함할 수 없다면? 과연 옳다고 볼 수 있을까? 



성인지 감수성이 페미니즘이란 사실과 사회적으로 만드는 문제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성인지 감수성 트러블>과 같은 책이 필요하고, 발달 단계에 맞추어 자유의 책임도 알려주는 성교육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성인지 감수성 트러블>에 나오는 모든 의견이 동의하지 않는다.


비혼, 동성부부, 낙태 합법화와 출산률 간에 어떤 필수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증거는 이 책에 나오지 않는다. 또한 모든 페미니즘이 출산률을 낮추고 성도덕을 해이하게 하며 가족을 해체시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위의 표시된 문장이 정보와 섞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에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난 일은 사실이지만, 1970년대에 세계적으로 줄어든 출산률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긴 힘들다. 

지역사회의 붕괴, 산업구조의 변화, 양육환경의 변화 등의 요인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증거도 없이 1960년대의 여성해방운동이 1970년대의 세계적인 출산률 감소를 불렸다고 볼 수는 없다. 세계적으로 페미니즘 이외에도 변화가 활발한 시기였던 만큼 여러 요인들을 간과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성도덕의 붕괴와 가족의 해체도 마찬가지이다.

통계나 외국의 사례 분석과 같은 증거가 없다면 이는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성인지 감수성 트러블>은 정보와 의견이 섞인 논설문이기 때문이다.


낙태 합법화는 뜨거운 감자인 만큼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하지만, 나는 무조건적인 출산이 건강한 인구 증가와 사회 발전을 부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출산과 양육을 통해서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좋은 양육환경과 교육을 포함한 제도 그리고 부모의 안정감(심신적, 사회적, 경제적 안정감)이 필수적이다.

그런 요소들이 갖추어지지 않은체 태아의 생명만 중시하고, 태어난 이후의 삶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부모와 아이 둘에게 생지옥을 보여줄 뿐이다.

낙태가 좋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태아가 탄생한 후에 삶과 부모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체 출산과 양육을 강요한다면 이는 단순한 인구 증가에만 관심을 가질 뿐 건강한 사회 구성원 생산과 건강한 사회 발전을 저하시키는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성인지 감수성 트러블>은 어려운 책이다.

성인지 감수성의 개념과 문제점을 전하는 한 편 정보와 의견이 섞인 주장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는 의견과 정보를 분별하고 스스로 증거를 찾고 비판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 능력이 없다면 이 책의 의견에만 휩쓰리기 쉽상이다.

<성인지 감수성 트러블>은 정보와 의견을 분별하고 스스로 증거를 찾고 비판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아니, 그래야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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