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나에게 음주는 일종의 시간제 타락 체험 같은 것이었다. 그 체험장에 입장하면 생활에 시달리고 타인에게 위축된 나 대신 무책임하고 호탕한 내가 있었다. 취한 눈으로 나를 보니 소심하고 고지식하다고만 알아온 내가 제법 솔직하고 웃기고 패기조차 있고, 무엇보다 좌절된 꿈을 가슴 깊이 숨긴채로 살아가는 게 아닌가. 내 몸속 술꾼의 발견이 기득권 시스템의 압박에서 벗어나 개인성을 각성한 대탈주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주장해본다. 나는 이른바 ‘문단의 신데렐라‘ 이전에 술꾼계의 ‘대형 신인‘이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살지 않고 소설을 쓰겠다며 뒤늦게 반항기에 들어선 데에는 술꾼의 특기인 순정과 터무니없는 낙관이 어느 정도 도움이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 P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