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만든 두꺼운 안대를 벗어라
- 시골뜨기 시계 수리공 해리슨의 경도 이야기 -
세상의 모든 편견, 고정관념을 거부한다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요즘에 내가 가장 즐겨보는 TV프로그램이다. 음악쇼라는 수식어답게 노래 좀 한다는 연예인 2명이 노래를 하고, 판정단 99명의 투표로 승자와 패자를 가른다. 여기까지는 다른 음악 경연 프로그램과 유사하다. ‘나는 가수다’도 그랬고, ‘불후의 명곡’도 그랬다. 하지만 복면가왕만이 가진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복면이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쓰고 정체를 감춘 채 노래를 한다. 뛰어난 가창력으로 잘 알려진 장혜진과 신효범도, 웃기기만 할 것 같던 김영철과 고명환도 모두 가면 뒤에 얼굴을 감춘다. 누구나 평등하게 같은 조건에서 노래한다. 오직 노래로만 승부한다.
가면 속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니 당연히 노래 자체에만 집중하게 된다. 인기 걸그룹이 나왔을 때의 흥분도, 트로트 가수가 나왔을 때의 시시함도 복면가왕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가면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만 들릴 뿐이다. 이런 이유로 갓 데뷔한 신인 걸그룹 멜로디데이의 ‘여은’이라는 가수가 한 가창력 한다는 가수 이정을 이기고 가왕에 등극할 수 있었다. 가수가 아닌 홍지민도 두 번씩이나 가왕이 될 수 있었다. 수많은 전업가수들이 가수가 아닌 사람들에게 노래로 무너지는 짜릿함을 안겨 주었다. 노래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유명가수의 권위에까지 도전하는 이 프로그램, 내가 복면가왕을 즐겨보는 이유다.
현실에서 고정관념, 편견을 버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권위에 대한 도전은 더욱 어렵다. 자칫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놔야 하는 경우도 많다. 현재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랬다. 데이바 소벨이 지은「한 외로운 천재 이야기, 경도」는 15~18세기 대항해시대 유럽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로 꼽혔던 경도 측정법을 알아내는 주인공 해리슨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겉으로는 해리슨이 경도 측정을 위해 해상시계를 만들고, 그것을 검증받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경도 문제 해결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천문학이라고 믿는 당대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극복하고,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진정한 주제다.
대항해시대, 경도의 의미
지구상의 위치는 위도와 경도로 표시된다. 세종시의 위치를 경위도로 표시하면 북위 36도 48분, 동경 127도 27분정도 된다. 이 경위도는 어떻게 측정했을까. 먼저 위도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북극성 고도를 재면 그 고도가 바로 관측자 본인이 서 있는 곳의 위도가 된다. 다시 말해, 세종 밀마루 전망대에서 북쪽을 향해 서서 지평선으로부터 36도 48분만큼 고개를 들면 북극성이 보인다. 하지만 경도를 측정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지금이야 하늘 위에 수십 개의 인공위성이 떠다니고 있어 스마트폰만 켜도 현 위치의 경도를 쉽게 알 수 있지만, 18세기 이전만 해도 경도를 측정하는 것은 시대의 난제 중 하나였다. 경도를 알 수 없음으로써 겪어야 하는 고통은 엄청났다.
대항해시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땅을 정복하거나 탐험하기 위해, 전쟁을 위해, 또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황금과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항해를 떠나는 배들이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선장은 자신의 배 위치를 모른 채 항해를 해야 했다. 각국의 막대한 인명과 재산이 바다 위에서 길을 잃고 떠 있는 셈이다. 항해 도중 갑자기 목적지가 불쑥 나타나는 일이 흔했다. 당대의 최고 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바스코다가마, 마젤란 등도 예외 없이 바다에서 길을 잃곤 했다. 1707년 영국남서부 근해의 실리 제도에서 발생한 영국 전함 4척의 좌초사고는 2,000명 가까운 생명을 앗아갔다.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바다 위를 헤매다 항해가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괴혈병도 창궐했다. 무수한 선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모든 일들은 바다 위에서 자신의 위치, 즉 경도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되는 일이었다.
당시 해양대국인 에스파냐,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은 경도를 구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막대한 현상금을 내거는 등 탐구의 열정을 불태웠다. 대양에서 배의 위치를 정확히 안다는 것, 즉 경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은 신대륙의 발견을 의미했고, 대항해시대의 승자가 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들은 매번 실패했다. 위치도 모른 채 대양으로 향하는 어리석고 무모한 항해는 계속되었다. 배를 항해하는 선원들과, 그 배에 화물을 싣는 상인들의 탄원서가 빗발쳤다. 영국은 1714년 경도법을 제정하고, 실행 가능하고 유용한 경도 측정법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왕의 몸값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 화폐로 20,000파운드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과학자들은 천문학에 집중했다. 위도와 같이 경도 측정도 하늘에서 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탈리아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영국의 아이작 뉴턴도 모두 달이나 별에게 도움을 청했다. 북극성이나 하늘 위에 고정되어 있는 별들을 측정하여 위도를 알아내는 것처럼, 천체를 측정하고 우주의 규칙성을 알아내면 경도도 측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경도법이 제정될 당시 해리슨은 20대 청년이었다. 이제 막 목공을 배워 진자시계를 만들었던 시기다. 이후 시계공으로 명성을 얻은 해리슨은 경도상을 꿈꾸며 해상시계 발명이라는 특별한 도전 과제에 덤벼들었다. 당시는 가장 저명한 과학자인 뉴턴을 포함해 그 누구도 시계를 통해서는 경도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해리슨의 생각은 달랐다. 해상에서 정확한 시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배가 출항한 항구의 시간과 현재 배에서의 시간을 비교하면 경도는 금방 계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해리슨은 선박 환경에서 적합한 시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경도심사국으로 향했다.
권위와의 외로운 싸움
해리슨의 생각과 다르게 경도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경도심사국은 경도 문제를 천문학적 과제로 생각하고 있어 기계적인 방식의 해결법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심사국의 위원은 천문학자, 수학자, 항해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월거 이용법 즉, 달의 운행을 측정해 경도를 알아내는 방법까지 개발되었다. 수세기 동안 어떤 방법으로도 경도를 찾아낼 수 없었는데, 갑자기 해상시계와 월거 이용법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나란히 나타났다. 해상시계는 두 지점의 시간만 비교하면 되므로 단 몇 초면 경도 측정이 가능했다. 반면, 월거 이용법은 경도를 알아내는데 자그마치 4시간 가량이 소요되었다. 경도위원회가 내건 ‘실행가능하고 유용한 방법’이라는 조건에 해상시계가 더 부합했다. 하지만 경도심사국은 해리슨의 시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해리슨의 시계가 인정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당시의 천문학에 대한 권위 때문이다. 권위 있는 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곧 최고의 방법과도 같았다. 월거 이용법은 매우 복잡한 산식을 가질 뿐만 아니라 바다의 변화무쌍한 날씨 때문에 계산 값도 정확하지 않았지만, 최고의 경도 측정법으로 대우를 받았다. 우스운 일이지만, 월거를 측정하고 계산하는 방법이 어렵다는 점 때문에 더욱 높게 평가받기도 했다. 째깍째깍 단순한 시계의 발명은 수십 수백 년간 연구해온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도전처럼 여겨졌다.
1795년 경도상을 받기까지 해리슨은 약 60년의 시간을 소모했다. 그 동안 많은 선장이 해리슨의 해상시계를 검증했다. 바다에서 81일을 보내 후에도 겨우 5초가 늦어졌을 뿐이었다. 이것은 경도법이 요구하는 조건보다 세 배나 정확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에게 경도상은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월거 이용법의 옹호자였던 왕실 천문학자의 반대가 극심했다. 그들은 해리슨의 해상시계가 자신들이 고안한 월거를 이용한 경도 측정법을 쓸모없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문학자들이 단순히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에 해리슨의 시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왕실의 천문학자들은, 국가(왕국)에 대한 애국심이 가득한 사람들이다. 경도 측정법을 발명하여 국가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엄청났다. 경도 측정법을 알아낸다면, 배의 이용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식민지를 개척하고, 해상무역을 주름잡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갖게 된다는 것을 그들이 모를 리 없다. 이기심은 그들이 월거 이용법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그들이 해리슨의 시계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가진 지식과 전문성 때문이다. 그들은 천문현상을 가장 잘 알고 있었고, 천문현상을 통해 위도를 발견할 수 있었으므로, 경도 측정 문제의 해결법도 하늘에만 있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특히, 단순한 시계로 경도 측정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그들의 상식으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들이 가진 지식과 전문성은 그들에게 편견과 고정관념을 만들어주었고, 그 편견과 고정관념이 그들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해리슨의 새로운 생각을 알아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완벽한 방법
우리는 편견과 고정관념의 무서움을 안다. 권위에 대한 두려움도 안다. 똑같은 아이디어라고 하더라도 일반인의 아이디어와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의 아이디어의 무게 차이는 상당하다. 일반인의 아이디어는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되는 반면 같은 내용을 전문가가 제안하면 “역시”라는 감탄사가 나온다. 같은 말이라고 하더라고 누구의 입을 통해서 나왔는지에 따라 그 말이 가진 영향력의 차이는 매우 크다. 우리 안에 내재된 편견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낸다. 전문가나 높은 직급의 사람이 가진 지적수준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높을 것이라는 생각을 아무 의심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전문가, 높은 직급이라는 권위는 우리를 위축되게 하고, 편견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만약 해상시계를 시골 촌뜨기 시계공이 아니라 당대 최고 과학자가 개발했다면 어떠했을까?
우리는 편견, 고정관념 그리고 권위에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인정하는 문화에서 새로운 생각은 나올 수 없다. 우리 주변에 세상을 이롭게 하는, 변화시킬 수 있는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많다. 그러나 우린 아직 그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권위로 만든 두꺼운 안대가 눈 앞을 가리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리고 편견 없는 순수한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주변에 있는 “해리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지난 2014년 경도상 제정 300주년을 맞아 영국에서는 다시 경도상 위원회를 꾸렸다고 한다. 인류 난제 중 하나인 항생제 내성 문제 해결에 기여한 사람에게 1,000만 파운드의 상금을 내걸었다. 하지만, 해리슨이 경도 측정법을 발명한 것처럼, 항생제 내성 문제의 해결법을 찾는 것도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방안을 찾기에 앞서 기존 의학계, 약학계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권위를 깨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