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 나의 문장이 허수아비 춤이 아니길 바라며 >

 

다시 조정래를 만나다.

조정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우울했다고 했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이 소설은 허구가 아닌 허구이며 사실보다 더 적나라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조정래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사실들을 정면으로 들이밀며 책장을 넘기는 내내 우리의 양심을 잔혹하게 후벼 판다. 그래서 조정래는 진짜 소설가다. 조정래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집필했던 작가다. 수백 년의 역사를 막힘없이 내달릴 줄 아는 그의 역사인식과, 비난과 비판, 판매금지와 구속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날카로운 사회 의식은 그를 이미 우리문학의 장대한 산맥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런 그가 내놓은 신작 《허수아비춤》은 또 다시 왜 그가 진짜 소설가인가를 증명하고 있다.

 

한국의 재벌과 화폐 물신주의

몇 년전 이름만 말해도 알 만한 대기업의 재무팀과 법무팀에 있던 한 변호사의 폭로가 있었다. 탈세와 불법 로비, 금품수수, 수조원의 비자금 은닉, 불법 상속과 경영권 불법 승계 등 온갖 범죄 혐의에도 불구하도 결국 그 기업 회장은 대부분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일부 유죄에 있어서도 ‘국가경제에 기여한 공이 컸고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국민경제에 더 이상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구색 맞춤 문구로 특별사면을 받았다. 오히려 변호사와 함께 그 기업의 비리를 폭로했던 천주교 사제단의 용기 있는 신부들은 그들의 직위를 잃고 한직으로 밀려나야 했다.

 

지방의 한 사업가가 폭로했던 소위 ‘떡검, 색검’사건은 어떠한가. 가장 깨끗해야 할 검찰이 기업들의 불법로비 자금은 물론 술접대, 성접대를 받아먹고 온갖 부정과 봐주기 수사를 일삼았음에도 결국 인사이동 등의 솜방망이 징계로 마무리되었고 대중의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어느 반도체 공장의 어린 여공들은 제대로 된 언론의 집중 한 번 받지 못한 채 백혈병으로 한 명 한 명 생명을 잃어가고 있다. 그녀들은 100여 명이 암에 걸리고 30여 명이 숨졌어도 산재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우기는 그 기업은 보상금을 담보로 끊임없이 그녀들에게 침묵과 복종을 강요하고 있다.

 

사실 재벌들에 얽힌 비리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우리는 그러한 얘기들을 무수히 들어왔고 암암리 알고 있다. 진짜 무서운 것은 전 사회체제를 위협하는 거대하고 체계적인 부조리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과 방관, 묵인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대한 체념과 복종이다.

 

소설은 이러한 현상이 재벌들이 쥐고 있는 ‘돈’이라는 무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아니 전적으로 돈이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유식한 말로 배금주의, 화폐의 물신성 말이다. 소설 속 일광그룹 문화개척센터(자연스레 현실속의 어느 대기업의 모 본부를 떠올리고 만다)의 핵심인물인 강기준, 윤성훈, 박재우는 바로 회사에서 대가로 주는 권력과 성과급의 달콤함에 뼈 속까지 물들어 회장을 신으로 여기며 충성을 다한다. 그 충성심은 불법과 합법, 정의와 부정의를 가리지 않고 비리와 불법 로비를 주저하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들이 뿌리는 돈을 거부하고 요구를 거절하는 소위 ‘별종’들에게는 가차 없는 응징과 가하고 사회적으로 도태시킨다.

 

 

「“돈만 있으면 처녀 불알도 산다.” “돈이면 지옥문도 여닫는다.” “돈만 있으면 의붓자식도 효도한다.” “돈 있어 못난 놈 없고, 돈 없어 잘난 놈 없다.” “자기보다 열배 부자면 그를 헐뜯고, 자기보다 백 배 부자면 그를 두려워하고, 자기보다 천 배 부자며 그에게 고용당하고, 자기보다 만 배 부자면 그의 노예가 된다.” 」

 

 

 

그들이 주절대는 이 같은 속담처럼 그들이 돈을 통해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없는 대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치도, 언론도, 검찰과 사법부도, 공무원도 돈 앞에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돈이면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살 수 있었다. 과연 현실은 소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돈이 성공의 기준이 되어버린 사회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강기준, 윤성훈, 박재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한 표본이 되어가고 있다.

 

 

이루지 못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헤게모니는 ‘자발적 복종’을 뜻하는 정치적 용어다. 현대 사회에서 자발적 복종은 정당한 권력과 사회적 정의에 의해 이뤄지기보다는 권력에 의해 통제당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된다. 조정래는 소설 속 허민 교수의 기고 글을 통해 대중의 자발적 복종이 결국 재벌과 부자들의 범죄를 용인하고 국민 모두가 그들의 노예 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왜 그들의 자발적 노예가 되어왔을까. 80년 광주와,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해 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구속과 수배를 당했으며 젊은 청춘들이 자신들의 관심사와 학업을 뒷날로 유보하고 거리에서 싸워야 했다. 그렇게 어렵게 쟁취해낸 민주화였다.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지고 나면 세상이 바뀔 줄만 알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한 ‘참세상’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국민이 대통령을 뽑던 그 날 이후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직장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여전히 사장의 눈치를 봐야만 했고 그들의 한 마디에 자신은 물론 가족의 밥줄까지 좌우 되었다. 모난 정이 돌 맞는다고 옳은 말 한답시고 내부고발을 한 자는 회사에서 퇴출당했고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앞장선 사람들은 불순분자 취급은 물론 해고와 구속의 수순을 밟았다. 정치적 민주화와 달리 작업장과 직장으로 대변되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부조리에 눈감고 권력에 아부하고 굽실거리는 이들은 더욱 출세를 하게 되었고 더 많은 연봉과 안정된 지위를 보장받았다. 반면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고용 조건은 더욱 불안해졌고 살아남기 위한 서로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저항에 대한 응징은 더욱 가깝고도 실제적으로 생존을 위협했다. 이러한 현실을 겪어가면서 온몸을 던져 민주주의를 쟁취해왔던 세대의 실망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으며 차차 저항의 의지를 잃어갔고 결국 철저히 그들의 체제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선택했다. 밥줄에 대한 통제권을 오로지 그들이 쥐고 있는 한 정치적 민주화는 피부에 와 닿지 않은 꿈같은 얘기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밥줄에 대한 자본의 통제와 함께 자본의 이데올로기는 더욱 강화되어 갔다. 재벌들은 이 나라의 모든 권력기관에 검은 돈을 뿌렸고 정치권, 사법부, 언론, 국세청, 금감위, 공정위, 대학 등 모든 기관은 그 돈을 달게 먹었다. 물론 그 돈은 주주들과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돈이었고 세금을 통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쓰여야 할 자금이었다. 또한 이러한 돈은 탈세와 회계조작 등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재벌가의 비자금으로 조성되었다. 그러한 비자금이 뿌려진 결과, 재벌 출신들은 권력까지 쥐게 되거나 혹은 직간접적으로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검찰과 경찰을 비롯한 법원까지도 그들의 범죄에는 면죄부를 부여했다. 사회적 비판 기능을 담당해야 언론마저도 광고라는 재벌의 당근과 채찍 앞에 굴복하여 재벌 홍보와 기업 이데올로기를 대중에게 주입하고 그들의 부조리와 부패는 철저하게 묵인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대중은 스스로 재벌의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다.

결국 우리 사회는 선거라는 형식적이고 협소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달성되었는지 모르지만 사회경제적이고 실제적인 민주주의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독재 권력보다 더욱 무섭고 직접적이며 가시적 모습을 알기 어려운 무정형의 형태로 국민들의 삶을 통제하고 있다. 그러한 통제의 결과로 인간의 관계는 더욱 더 물질화 되어가고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으며 비정규직의 양산, 청년 실업 등 고용은 더욱 불안해지고 있다. 이젠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조차 펀드매니저 등 돈 많이 버는 직업이 일 순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부모들 역시 돌잡이하는 아이에게까지 돈을 쥐기를 강요하는 돈에 지배받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아쉽게도 정의, 원칙, 사회적 배려, 헌신 따위의 말들은 이제 교과서에서도 찾기 힘든 철들지 않는 바보들의 외계어 취급을 받고 있다.

 

 

‘공정사회’ 가 필요한 이유

이러한 시대에서 이명박 정부가 화두로 던진 ‘공정사회’는 그 말 자체로 반가운 말이다. 청렴하고 도덕적이고 노력한 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하니 불공정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얼마나 생경하고 또 반가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공정사회론’을 꺼내들며 시도했던 정부 핵심 고위층의 개각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그 말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청문회에서 드러난 개각인사 중 청렴하고 도덕적인 것은 차치하고라도 비리나 탈세 등을 저지르지 않았던 인사가 거의 없는 것을 보고 국민들은 또 얼마나 좌절하고 실망했을까. 거기에 더해 친인척 채용비리는 국민의 공직사회에 대한 불신을 더욱 부채질 했을 것이다. 정말 무서운 것은 이제 너무나 익숙해져 실망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때 ‘공무원에게는 영혼이 없다’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는 어느 인사의 부도덕과 비리에 눈감은 공직사회가 면피를 위한 핑계로 쓴 말이기는 하지만 상명하복에 충실하거나 복지부동의 자세를 요구받는 생리를 제대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말이 우리 내외부의 부조리에 눈감거나 비판의 공간마저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코 아닐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한 조직은 필히 정체되며 결국 부패하고 만다.

 

우리가 공정한 사회를 얘기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기 때문만은 아니다. 공정한 사회일수록 그 혜택이 국민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고 사회경제적으로 이익을 창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하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청렴하고 공정한 일 처리가 필요하며 불법 로비와 부당한 행위에 대한 고발과 저항이 더욱 필요하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와 공정사회를 위하여

조정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이룩하고 공정한 사회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부정의하고 부도덕한 기업의 불매운동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소설 속 허민 교수와 경제민주화실천연대의 글에서 드러난다. 물론 비리기업이나 부도덕한 기업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매운동도 필요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업과 직장 내에 비판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아닐까. 조정래가 소설 속에서 내세운 인물들, 검은 돈에 물들어가는 비리검사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는 전인욱, 당당하게 경제민주화에 대한 자기 소신을 밝혔다가 대학 교수직에서 쫓겨나지만 시민운동 활동가가 되어 재벌에 맞서는 허민 교수, 그리고 재벌들의 비리에 맞서는 노동조합 활동가 등 사회 곳곳에 거대한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을 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모난 사람들을 지지하고 옹호하며 그러한 단체들을 지원할 때 부패한 경제 권력도 조금씩 힘을 잃어 갈 것이다. 그때는 기업이 오너 등 소수의 이익을 위한 소유물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과 노동자들을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조정래는 허구의 소설을 통해 자본의 노예가 되어 ‘허수아비춤’을 추고 있는 기성세대들에게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위한 진지구축에 나설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사회가 재벌과 부자들의 탐욕에 의해 망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의 경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잊고 있었던 우리의 모습을 다시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잠시 망각했던 내게는 더욱 그렇다.

 

 

아직도 조정래와 같은 소설가가 사회의 어른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나에게, 그리고 이 사회에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철저히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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