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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의 낙타와 성자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조원규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물건들이 상인의 소유인 것처럼 상인도 물건의 일부다. 그들은 그냥 앉아있습니다. 물건들과 섞여 한결같이 그곳에 있습니다. 행인들과 하염없이 얘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본 그곳 모로코도 결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뭔가 다를 것 같기도 하지만 우리가 평소 접하는 ‘시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무엇을 찾기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는 그런 곳에 발을 내딛습니다.
그는 그 주변을 둘러보다가 적선 받은 동전 한 푼을 입안에 넣고 굴리고 뱉어 주머니에 넣는 행동을 하는 노인을 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그가 마라부(성자)라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마라부가 동전을 입안에 넣고 돌리는 모습은 참으로 괴기스럽습니다. 그가 받은 동전을 그렇게 하는 것은 동전을 준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그가 ‘마라부’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제게는 단지 요상한 행동을 하는 걸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카네티는 그곳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만은 있지 않는것 같습니다. 광장에 들어섰을 때 그는 알아차리게 됩니다. 사람내음이 나는 그곳에서 그는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익숙하고 포근함을 느끼며.
그의 언어를 보고 있으면 정말 그곳에 내가 있는 듯합니다. 모두 그렇지 않을까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지만 이미 우리들의 머릿속에 그 모습이 펼쳐집니다. 누구나 새로운 것을 보면 그것을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또한 그의 호기심으로 새로운 인연을 만들게 됩니다. 이 일을 반겨야 할지 울어야 할지. 엘리아스 카네티는 활기, 침묵으로 가득 찬 집안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어떤 인연으로 인해 마침내 그는 원하던 바를 이루게 되지만 그가 발을 들여놓게 된 집은 불편할 정도로 청결하고 질서 정연한 유럽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진득한 무엇이 내 안에서 언어를 조롱하며 가라앉아 있다. 그곳에서 눈먼 자들은 외칩니다. 눈먼 자들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생활을 영위하는 성자입니다. 그들은 매번 같은 말을 외칩니다. 지치지도 않는 걸까요. ‘눈먼 자들을 도우라고. 그러면 신은 당신과 함께할 것이라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은 아니듯 내가 보고 있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들은 삶을 영위해갑니다. 피부로 느끼지 못할 뿐이지요. 그들의 외침은 자신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은? 반복적인 그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우리의 외침을 들어줄까요. 소리를 내는 사람. 이야기꾼. 우리에게도 이야기꾼이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야기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꾼은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이야기를 듣는 사람. 언어는 허공에 맴돌 뿐이지만 조각들을 끌어 모아 종이에 남기기도 합니다. 기억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는 그 기억을 읽고 있습니다. 엘리아스 카네티의 기억을. 우리는 기억을 듣고 말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잘 알아차릴 수 없는 침묵의 소리일 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