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살의 나는 한 여자애를 알게 되었다. "너"와는 서로의 기분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터놓곤 했다. 나는 너를 좋아했고, 너는 나를 좋아했다고(고 생각한다.) 그 후 일년이 지난 어느 가을, 너는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겨울에 날아 든 너의 갑작스러운 장문의 편지. 그것이 끝이었다. 그 후 나는 마흔 중반까지 홀로 살아가는 동안, 매번 여성들과는 진정한 의미의 신뢰 관계를 쌓을 수 없었다.
p.172 나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쯤이면 지구의 중심에 닿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내려간다. 주위 공기의 밀도와 중력이 점점 바뀌어가는 게 느껴진다. 그렇게 나는 고독해진다.
p. 193 그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내 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혼자 남겨진다. 텅 빈 마음을 안은 채. 무슨 일이 있어도 또다시 그런 기분을 맛보고 싶진 않았다. 그런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혼자서 고독하고 조용하게 사는 편이 나았다.
너와 공유했던 도시의 기억을 토대로, 벽 그리고 도시에서 또다른 너를 다시 만난다. 하지만 알고 있다. 진짜 너는 아니라는 것을. 나는 꿈을 읽는 자였다. 책이 한 권도 없는 도서관에서.
p.45 만약 이 세계에 완전한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 벽이야. 누구도 이 벽을 넘을 수 없어. 누구도 이 벽을 부술 수 없고."
- "이 벽은 누가 만들었나요?" 나는 물었다.
- "아무도 만들지 않았어"라는 것이 문지기의 굳건한 견해였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지."
"꿈을 읽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그림자의 가설이지만) 사람이 품은 갖가지 종류의 감정들,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 회의, 자기연민 그리고 꿈, 사랑. 이른바 역병의 씨앗 같은 것들을 가라앉히고 소멸시키는 작업이었다. 벽으로 둘러쌓인 한 도시의 와해를 막기 위해.
그 도시는 상상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또다른 세계일까.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그리고 벽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