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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독서를 좋아하고 특히 소설 읽기를 즐기는 사람의 입장에서 서평을 적어보고자 한다. 이런 얘기를 먼저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생각보다 잘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름 문학 전공자이고 한때는 독서광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출퇴근 길 전철이나 집에서도 조금씩 짬이 날 때 독서하는 형편이다 보니 아무래도 정독(精讀)보다는 통독(通讀) 쪽으로 독서 습관이 기울어진 모양이다. 알라딘 추천을 많이 참조하는 편인데 이 책 역시 재미있는 제목에 또 유명한 상도 탔다고 하니 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한 장을 읽는다. 두 장을 읽는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중반 정도 넘어가야 대충 감이 잡힌다. 일단 스탠드업 1인 코미디쇼로 시작한다. 그런데 또 다른 서술자 ‘나’가 등장한다. 이 ‘나’의 등장 때문에 한번 어리둥절하고 외국식 유머의 생뚱맞음 때문에 또 한번 어리둥절한다. 아무래도 유머나 웃음이라는 것이 문화적 산물이다 보니 일본식 유머 다르고 영국식 유머 다른데 이스라엘 유머라니 더 멀게 느껴지긴 한다. 물론 아예 재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웃어야 할 때를 한 박자 놓치면서 웃는다는 느낌이랄까. 거기다가 이 맨부커 상이라는 것이 외국어를 영어로 잘 번역한 좋은 작품에 주는 상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말을 또 영국 말로 바꾼 것을 또 한국 말로 바꾸어 놓았으니 번역의 번역, 거기다 구어(口語)의 번역이라는 것 때문에도 더 거리감이 느껴진다. 물론 번역이 없었더라면 아예 읽을 수도 없었을지 모를 작품이니 그 정도는 이해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간단한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렇다. ‘나’는 아비샤이라는 이름의 퇴직 판사인데 아내와는 사별한 듯 보이고 현재는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도빌레로부터 전화가 온다. 그런데 ‘나’는 그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겨우 기억을 되살려 보았더니 그와는 학교는 달랐지만 학창 시절 수학 과외를 함께 듣던 사이였고 현재 도빌레는 코미디언인데 이스라엘의 ‘네타니아’라는 도시에서 열릴 스탠드업 코미디쇼에 와서 자신을 봐 달라는 부탁이다. ‘나’는 ‘내가 왜?’라는 심정이었는데 도빌레의 간곡한 부탁으로 공연장을 찾아왔고, 지금 그의 쇼를 보고 있으며, 도빌레는 아마도 인생의 마지막일 공연에서 자신의 첫 장례식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소설은 마치 도빌레의 코미디 공연의 녹취록처럼 보인다. 그의 목소리로 공연이 시작되자 소설이 시작된다. 그리고 중간중간 과거를 회상하는 ‘나(아비샤이)’의 목소리가 있다. 2시간 남짓의 코미디쇼, 그 속에서 도빌레의 목소리와 ‘나’의 회상을 통해 43년 전 그 날의 사건이 재구성된다.
‘나’에게 작고 밝고 귀여운 성격의 아이로 보였던 도빌레에게는 어두운 가정사가 있었다. 홀로코스트에서 간신히 생존한 후 정신적인 문제를 갖게 된 어머니와, 집안의 세세한 모든 것을 책임지지만 사랑하는 방식을 잘 모르는 폭력적인 아버지 사이에서 도빌레는 어떻게든 어머니를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가 코미디언이 된 것도 어머니를 웃기기 위한 매일매일의 조그만 공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어머니를 지키기 위한 싸움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는 따돌림이라는 폭력과도 싸워야 한다. 따돌림과 괴롭힘을 웃음으로 승화하면서 어떻게든 엄마를 지키고 싶어하는 열 네 살 아이의 마음이 아프게 와닿는 소설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아, 이게 뭐야. 이런 거였어?’라며 감동을 받으려는 찰나, 책이 끝나버린 느낌이었다. 처음의 지루함이 갑작스런 감동으로 끝나버렸다고나 할까. 그래서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다. 그제서야 이 작품의 본래 모습이 잘 보였던 것 같다. 솔직히 『워싱턴포스트』지의 극찬처럼 ‘황홀한 문학적 성취’를 한국 독자들이 느껴보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번역이 갖는 태생적 한계도 있을 것이고 홀로코스트 이후 동유럽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한 사람들의 삶이라든가, 이스라엘 학생들이 가는 군사캠프 등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은 이스라엘의 문제라든가 홀로코스트 문제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삶과 죽음이라든가 존재와 부재(不在), 슬픔과 미움과 사랑처럼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고 복잡한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 작품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음미해 본다면 ‘아, 역시 꽤 훌륭한 작품이구나’ 정도는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p.128 "다른 보너스도 있었는데, 그건 내가 물구나무를 서서 가면 아무도 엄마한테는 주목하지 않는다는 거야, 알아?"
p.53 ‘선생님, 말로는 제 죄송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순간부터 주인님께서는 제 입에서 교양 없는 말이 한마디라도 나오는 것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남자는 자기 귀를 믿을 수가 없어 앵무새를 쳐다봤어.
p.218 에우리클레이아. 오디세우스의 나이든 유모. 그가 거지로 변장하고 항해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발을 씻겨준 여자. 그녀는 오디세우스의 어린 시절 흉터를 보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 사람이었다.
p.224 저 사람한테 잘해줘, 엄마가 다시 내 귀에 대고 말했어. 모든 사람이 짧은 시간만 살다 간다는 걸 기억하고,그 사람들이 그 시간을 유쾌하게 보낼 수 있게 해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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