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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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고민이라는 것을 덧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넓게는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나이가 되었고, 자기개발서에서 쓸데 없는 고민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소비한다라는 것을 알고 단순하게 고민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상당수의 고민은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해결하는 게 요즘이다. 친구의 상담보다는 네이버 지식인이 더 신뢰가 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작가는 고민하라고 한다 그것도 심각하게.. 고민하는 가치가 엄청나고 이것이 미래 국가를 바꾸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합리적이라는 단어로 어떠한 일에 대해서 곰곰히 고민하는 것을 비합리적이라고 매도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의 인생 원리에 대해서 다시 곰곰히 고민해봐야 겠다. 그리고 앞으로 답은 내가 스스로 내리는 것으로..

이제 정답 맞추는 학생의 삶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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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수용소를 체험한 것으로도 유명한 정신의학자 빅터 플랭큰은 호모 페이션스 (고민하는 인간)의 가치는 호모 파베르 (Homo faber,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보다 더 높다. 고민하는 인간은 도움이 되는 인간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고 말했다.

 

르네 데카르트 - 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자아는 타자와의 상호 인정에 의한 산물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 대해 던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죽기 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누군가를 믿으며 죽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 한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뱃속까지 진지합니까?

 

결국 나쓰메 소세키처럼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돈을 벌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돈을 사용하고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윤리에 대해 고민하면서 자본의 논리 위를 걸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 너무 평범할까요?

 

알고 있다. (know), 와 사고하다(think)는 다릅니다. 정보(information)와 지성(intelligence)은 같지 않습니다.

정보의 서랍의 경우 자기 피와 살이 된 듯한 정보가 들어 있는 서랍이라면 좋겠지만, 옷의 주머니에 잔뜩 들어 있는 휴지 조각으로 꽉 채워 놓은 듯한 지성. 이것을 알고 있잖아? 뿐이 지성이라고 표현하면 내가 너무 엄격한 것일까요?

 

톨스토이 <인생론> - 어느 곳에 물레방아로 밀을 빻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연의 혜택을 받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을 했는 데, 어느 날 물레방아의 메커니즘에 흥미를 갖게 되었스빈다. 그리고 물레방아가 끌어들인 강물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이해하자 이번에는 강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는 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본래의 일인 밀을 빻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톨스토이의 주제는 철저하게 반과학 입니다.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며,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가 원래 품고 있던 소중한 의미를 하나씩 빼앗아 간다고 행각했던 것이지요.

 

나쓰메 소세키 - 현대 문명은 완전한 인간을 매일매일 불구자로 망가뜨리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평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오래된 야만 시대에는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 몸에 걸칠 것을 찾아내고 스스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으며, 또한 스스로 나무 열매나 무언가를 주워 먹고 자유롭고 부족함 없이, 설사 부족함이 있더라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참았고.. 생활의 지식을 모두 스스로 준비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이라는 이른바 삼비판의 저작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걱기에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 조화를 이루며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과학과 합리화의 진전과 더불어 분열하기 시작합니다.

 

부부에게는 부모 자식 같은 혈연관계가 없습니다. 원래는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이 세상을 떠나면 비탄에 잠기고 상대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모습을 바꾸면서 서로 속에 존재하고 그렇게 쌓인 것이 자기 인생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따라서 사랑이 성취되었는지 어떤지는 인생이 끝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사람들이 고뇌에 견디는 힘을 많이 지니고 있지만 의미 상실에는 견디지 못한다는 취지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무한히 진화해 가는 문명 속에서 인간의 죽음은 무의미하다. 죽음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삶 또한 무의미하다. 사람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삶을 영위할 때에는 유기적인 윤회와 같은 것 속에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거의 다 배우고 인생에 만족하며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끝이 없는 발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떄에만 가치가 있는 일시적인 것밖에 배울 수 없고 결국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따라서 확실한 것을 얻지 못한 죽음은 의미가 없는 사건에 불과하고 무의미한 죽음밖에 얻을 수 없는 삶 또는 무의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쇠퇴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려울 것은 없다. 이렇게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이를테면 자기 규제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인다면 무턱대고 이런저런 일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산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나 역시 나라는 한 사람의 인간 속에서 두 인생을 살아보고 싶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더 크게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고민을 계속해서 결국 뚫고 나가 뻔뻔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새로운 파괴력이 없으면 지금의 일본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미래도 밝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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