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그냥 툴툴 마음이 가는 데로 내 맽는 말인 것 같은 데, 인생의 깊이가 느껴진다.

 

특히 밥벌이의 지겨움.. 노동이 싫다 노는 게 좋다라는 말에는 진한 공감이 간다.

 

마치 술자리에서 인생의 선배 취중진담을 듣고 있는 느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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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음악은, 그리고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결핍의 소산인 것 같다. 스스로의 결핍의 힘이 아니라면 인간은 지금까지 없었던 세계를 시간 위에 펼쳐 보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상상력은 스스로의 결핍에 대한 자기 확인일 뿐이다. 악기는 인간의 몸의 일부로써만 작동한다. 인간의 몸이 아니면 그 악기로부터 소리를 끌어낼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악기는 인간의 몸과 친숙하게 사귈 수 있는 물리적 구조로 태어난다.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이 악기 속으로 연장되면서, 악기가 인간의 몸 속에서 살아나면서 소리를 낸다. 그래서 모든 음악은 인간의 몸의 소리인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과 생명이 스스로의 결핍을 힘으로 삼아서 소리를 낸다. 그리고 몸과 악기의 교감의 원리는 오직 아날로그의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일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부지런을 떨수록 나는 점점 더 나로부터 멀어져서, 낯선 사물이 되어 간다. 일은 내 몸을 나로부터 분리시킨다. 나의 현존이 몸으로부터 떠나갈 때, 나는 불쾌하고 불안하고 불편하다.

 

모든 밥에는 낚시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시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저 쪽 물가에 낚시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올리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 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 다시 밥을 벌 수 가 있다.

 

세월은 무자비한 불도저처럼 인간의 얼굴을 밟고 지나간다. 아무도 그 불도저의 궤도 자국을 피할 수는 없다. 늙음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이다.

 

남성성의 본질이란 아마도 결핍일 것이다. 스스로 결핍이 아니라면 남자들이 여자를 그리워할 리가 없을 것이다.

 

여자의 젖가슴의 모든 고난은 직립보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 발로 기어 다니는 포유류들의 젖은 아래로 늘어져서 편안하다. 이것이 무릇 모든 젖의 자연일 것이다. 두발로 걷기 시작한 이후로, 여자들의 젖가슴은 어쩔 수 없이 전방을 향하게 됐다. 가엾은 일이다.

 

길은 생로병사의 모습을 닮아 있다. 진행 중인 한 시점이 모든 과정에 닿아 있다. 태어남 안에 이미 죽음과 병듦이 포함되어 있다. 길은 이곳과 저곳을 잇는 통로일 뿐 아니라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모든 구부러짐과 풍경을 거느린다. 길은 명사라기 보다는 동사에 가깝다.

 

30년 동안 아마도 그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 이 사회는 앞서 넘어진 바로 그 자리에 계속해서 넘어지고 있구나, 흙먼지 속에서 점심을 먹는 전경들의 못브이 그런 생각들을 일깨워주었다.

 

연어들은 자신의 몸과 자신을 몸을 준 몸을 서로 마주보지 못한다. 이 끝없는 생명의 반복인 무명과 보시는 인연이고, 그 인연은 세상의 찬란한 허상이다라고 고형렬은 썼다. 조국의 연어들은 이 인연의 강을 따라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죽음에 삶을 잇대어 가며 그 것들은 돌아온다. 돌아와서 생명의 기쁨과 생명의 허무를 사람들에게 알게 한다.

 

눈의 아름다움은 세상을 고립시켜 주는 힘에 있다. 눈이 가득 쌓여 마을의 길들이 끊어지고 인기척이 없을 때, 이 정처 없던 삶은 문득 정처를 회복한다. 눈이 쌓여서 길이 모두 지워졌을 때 내가 살던 이 불안정한 주거는 정주하는 자의 평온을 회복한다.

 

자본의 힘은 미녀들을 찬양해서 억압하고, 아줌마들을 폄하해서 억압한다. 몸과 삶이 맞닿아 있는 것이 아줌마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삶으로부터 유리된 몸의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사회에서 아줌마들의 싸움은 힘들어 보인다.

 

헛된 희망이 인간을 타락시킨다. 인간은 헛된 희망 떄문에 무지몽매해진다. 결정적으로 인간이 무지몽매해지는 것은 어설픈 희망 때문이다.

 

난 스스로 도덕적 존재라는 확신은 안 한다. 그리고 도덕적 존재라는 신념에 찬 자를 경멸한다. 이런 자는 필시 누군가를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속내를 감추고 있기 마련이다. 나는 도덕적 존재도 아니지만 부도덕한 존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가난뱅이가 도덕적이고 부자가 악인 건 아니다. 악한 부자가 있는 거지..

 

나는 노동을 싫어한다. 불가피해서 한다. 노는 게 신성하다. 노동엔 인간을 파괴하는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이 사회는 노동에 의해 구성돼 있다. 나도 평생 노동을 했따. 노동을 하면 인간이 깨진다는 거 놀아보면 안다. 나는 일할 때고 있었고 놀 때도 있었지만 놀 때 인간이 온전해지고 깊어지는 걸 느꼈다.

 

여자와 생명을 생각하면 경이롭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을 느낀다.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은 어떤 결핍이고, 그 결핍이 여자의 생명을 경이롭게 보게 하는 것 같다. 여자를 보면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볼 때의 경이로움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나는 여자를 풍경으로 보는 인간이다.

 

나이 먹는 거 쓸쓸하다. 나이 들면 어느 정도 소외돼서 적막한 자리에 처박혀 있는 게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나이 먹는 건 바람 부는 거나 날 저무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이 든다는 것이 모멸의 대상이 된 것 같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하려 할 때 무모하고 추잡한 권력이 난무하게 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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