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 - 신화에서 찾은 '다시 나를 찾는 힘'
구본형 지음 / 와이즈베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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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상자란 애초부터 없었다. 처음에 나는 희망이 왜 모든 나쁜 것들과 함께 한 상자에 들어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게 되었을 때 기뻤다. 행복 속에는 희망이 없다. 이미 행복한 사람은 희망하지 않는다. 희망은 결핍과 불행과 고통 속에서만 자라나는 환각이다. 그러니 희망이 있어야 할 자리는 모든 불행, 모든 악덕, 모든 결핍이 있는 곳이다. 그것이 아직 상자 속에 남아 있는 이유도 다른 불행의 씨앗들은 이미 다 발아하여 그 숙주를 무한히 괴롭히고 있지만, 희망만은 미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여전히 마음의 상자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다.

 

사랑은 보증서 없는 헌신이다. 우리의 사랑이 서로의 가슴 속에 더 큰 사랑을 키워내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자신을 모두 바치는 것이다. 사랑은 믿음을 가진 행위다. 믿음이 적은 사람은 사랑이 적은 사람일 수 밖에 없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스티브 잡스는 성공을 바라는 젊은이들에게 늘 배고파해라 (stay hungry)라고 말했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지 말고, 점점 더 많이 쌓아두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룬 것을 거부하라는 뜻이다.

 

키르티무카 : 불교에 수용되어 불교 사원을 수호하는 상징인 귀면 장식으로 흔히 볼 수 있다.

키르티무카는 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시바 신이나 부처의 대좌 밑에 이 가면 같은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산다. 삶은 다른 것을 죽여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생명에 대한 폭력일 수 밖에 없다. 이 고뇌를 단박에 끊어버린 인물이 바로 키르티무카인 것이다. 키르티무카, 다른 것을 먹을 수 없어서 자신을 뜯어먹어야 했던 아귀,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자아라는 허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괴물, 그를 통하지 않고는 각성도 대오도 부처도 없다는 괴물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 삶인가? 라고 물음으로써 카뮈는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삶은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가, 혹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문제라는 것이다.

 

죄악에는 허다한 도구들이 있지만 그 모든 죄악의 공통점은 거짓말이다. - 호메로스

 

균형감의 부재는 모든 어리석음의 근본 원인이다. 가장 많이 얻은 자도 탐욕스러운 자고, 가장 많이 잃은 자도 탐욕스러운 자다. 인간은 탐욕을 벗어날 수 없다. 제우스의 완승이다. 그러나 인간은 탐욕을 더 나은 차원의 삶에 이르는 에너지로 씀으로써 행복한 불행에 이를 수 있다. 아직 가지지 않은 것을 염원하는 자, 영원히 행복할 것이고 또한 영원히 불행할 것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것과 인생을 탐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창이다. 그 섬세한 경계에 서서 늘 우리의 삶이 탐욕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망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현명함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 델포이의 아플론 신전에 있는 기둥에는 '메덴 아간 (Meden Agan)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솔론의 말로 전해지는데, 그 말은 어떤 것에도 지나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그의 현명함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잠언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입문에서 인류는 세 번의 치욕을 겪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모욕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다. 인류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광활한 우주 체계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경험을 하게 됨으로써 초라해졌다는 것이다. 그 다음 모독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었다. 진화론은 신의 창조를 통해 인간에게 특권이 주어졌다는 생각을 파괴해버렸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다 같은 진화의 과정을 거친 필멸의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가장 민감한 상처는 프로이트다. 왜냐하면 자아가 자신의 집안에서조차 주인이 아니며, 자신의 정신생활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 대한 초라한 정보만을 접하고, 이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음을 정신분석학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의식되지 않는 것, 즉 무의식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기 때문에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니며,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나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가장 중요한 상징이 바로 이 오이디푸스 신화다. 오이디푸스가 알지 못하는 일, 즉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를 찾아가는 과정은 결국 내가 모르는 나를 추적하는 과정이었다. 나의 존재의 근원이면서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을 찾아나서는 것을 상징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 그것은 바로 생각하지 않는 죄에서 비롯된다. 시키는 일을 그저 따르는 자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갖지 않음으로써 주도적 삶도 사라졌다.

 

신에게는 배꼽이 없다. 부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존하지 않으며, 늙지 않으며, 죽지 않는다. 이미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탯줄을 가지고 있으니 의존하는 존재이며, 늙는 존재이며, 죽는 존재이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늘 자라야 한다. 제우스는 스물여섯 번째 불행으로 판도라의 마음상자 속에 탯줄을 넣어두어 인간들이 스스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하게끔 만들었다.

 

자기를 잘 경영한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자신의 힘의 원천에 끊임없이 맞닿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내 내면의 혈류를 타고 끊임없이 피로 흐르는 내 힘의 원천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아직 미친 듯이 나를 다 써본 적이 없다.

 

엘리시온(Elysion)은 평범한 자들의 저승 세계인 하데스와는 구별되며, 오직 신에 의해 선택된 자, 영웅적 행위를 한 자들만이 죽은 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평야였다.

 

지식의 대통합은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에 의해 통섭 (consilience)이라는 개념으로 재조명받게 되었다. 통섭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세기의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윌리엄 휴웰이다. 그는 컨실리언스가 서로 넘나든다라는 의미라고 이야기하고, 강의 비유를 들어 이 개념을 설명했다. 수많은 개울이 모여 강을 이루는 것처럼 먼저 밝혀진 학문적 발견들이 하나둘 합쳐져 하나의 커다란 지적 대융합의 강을 이루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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