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 - 교토의 역사 “오늘의 교토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서 알며, 어떤 사람은 노력해서 안다. 그러나 이루어지면 매한가지다.

 

고대사회에서는 새로운 성씨를 만들 때면 씨족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중국의 옛 나라 이름을 취하곤 한다. 마치 우리나라에 나라 정씨 나라 조씨 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스카의 백제계는 한씨(漢 : 아야씨), 오사카의 고구려계는 오씨 (吳 :구레씨)라고 했듯이, 교토의 신라계는 진씨 (秦 : 하타씨)라는 성을 갖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일본인들의 강점중 하나로 꼽는 것은,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철저히 자기 일에 충실한다는 확고한 직업의식을 갖고 있는 점이다. 호텔에서 팁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도 이런 인식 때문이란다. 자신이 할 일을 성실히 다했을 뿐이니 팁을 줄 이유도, 받을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신사를 세우려면 거기에 모시는 신이 있어야 한다. 없을 때는 어디에서든 모셔와야 한다. 이를 권청(勸請)이라고 한다. 진도리는 마쓰오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넙적한 암석(이와쿠라)을 권청하여 신전을 건립했다고 전한다. 우리의 거석 신앙이 먼저 자리잡았고 그것이 나중에 일본화되었던 셈이다.

 

일본의 3대 마쓰리 : 도쿄의 간다마쓰리, 오사카의 덴진마쓰리, 교토의 기온마쓰리

 

원령의 다타리가 나타나서 역병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에 원령을 진정시키기 위한 어령회 (고료회) 라는 마쓰리를 열었다. 어령이란 혼령을 제어한다는 뜻이다.

 

명작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신은 디테일에 있다 (God is in the details)라고 대답한 명구가 있다. 이 말은 1969년 뉴욕타임즈가 독일의 건축가 미즈 반 데어 로에의 사망 기사를 쓰면서 인용하여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일본 역사에서 헤이안시대를 지나면 천황은 상징적 존재로 남고 실권은 쇼군에게로 돌아갑니다. 이때 쇼군의 막부(오늘날의 정부)가 어디에 있느냐로 일본 중세사의 시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미나모토씨는 가마쿠라에 있었고, 아사카가씨는 교토 시내 무로마치에 있었습니다. 무로마치시대 말기의 전국시대라는 혼란기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통일을 목표로 교토에 들어올 때 그가 주둔한 거성을 교토 동북쪽 오미의 아즈치에 두었기 때문에 아즈치시대라고 합니다.

 

공해가 개창한 진언종은 진언밀교라고도 한다. 인도에서 일어난 밀교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아주 다르게 전개되어 그 계보와 개념이 아주 복잡하다. 밀교는 흔히 불교가 토착민의 샤머니즘과 결합한 신부주의적인 불교신앙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요가를 행하는 탄트라 불교, 또는 성행위까지 끌어든인 티베트의 밀교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이 극단에 다다른 경우라 할 수 있다. 밀교는 현교의 대립 개념이다. 현교는 석가모니가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서 가르친 것을 충실히 따른다. 그러나 밀교는 부처의 내면에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것, 즉 불성을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밀교에서는 석가모니가 아니라 불법  그 자체를 의미하는 대일여래(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삼고 있다.

 

만다라라고 하면, 흔히 티베트 불교에서 색색의 모래로 정성스럽게 도상을 그린 다음 여기에 집착하지 않고 순식간에 다 지워버리는 것을 떠올린다. 그것은 티베트 만다라의 특성일 뿐이다. 만다라는 본질의 소유를 뜻한다. 즉 불성의 비밀스런 세계를 도상으로 그린 것이 만다라이다.

 

최징은 시가현에서 태어나 일찍이 12세에 절에 들어가 19세 때 동대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고 히에이산에서 12년간 은둔하며 수도생활에 들어갔다. 이것이 일본 산사의 출발이었다. 그는 불교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많은 불경을 독파했다. 그러다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천태학(天台學)의 법화일승 (法華一乘)사상에 몰입했다. 그것은 부처의 힘을 빌린 타력이 아니라 자력으로 불성을 깨우치라는 가르침이었다.

 

1467년 오닌의 난 떄 청수사는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 난은 오닌 원년에 일어나 붙은 이름인데, 지방장관으로 임명된 슈고 다이묘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동군과 서군으로 편이 갈려 전국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이 난리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이 났지만 이후 일본 열도엔 하극상의 열풍이 일어나 힘있는 자가 무력으로 영주가 되는 전국(센코쿠)시대로 들어갔다. 오다 노부나가가 그때 등장한 대표적인 센코쿠 다이묘였다.

 

평등이란 서로 다른 개성이 함께 있음을 말하는 것이죠. 그것이 평등입니다.

 

좌앵우귤(左櫻右橘)은 일본 왕실 건물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헤이안 신궁, 어소, 가쓰라 이궁 같은 궁궐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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