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3월
구판절판


지난 번 <뉴욕 타임스>의 일요판에 피아니스트인 키스 자렛이 마샬리스 일파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었다.

"최근의 젊은 흑인 뮤지션들은 정말 재즈 연주를 잘한다. 그런데 그들의 창조성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마도 마샬리스 일파가 생각하는 창조성과 키스자렛이 생각하는 창조성은, 이름은 같아도 실제로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다른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고 있는 동명 이인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키스 자렛과 같은 60년대 세대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창조 행위란 대부분의 경우 선배인 보수적 연주가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이기느냐 지느냐, 부정할 것인가 부정될 것인가의 치열한 전투였다. 거기에서 그가 말하는 '창조성'이 생겨났다. 하지만 마샬리스 일파의 세대에게 재즈라는 음악은 반항할 상대가 아니라 감동하고 감탄함으로써 배워 나가는 음악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재즈는 어떤 의미에선 이미 한번 닫혀 버린 고리다. 그것은 오래되어 멋진 것들이 가득 들어 있는 보물 상자와 같다. 그들은 그런 발견에 커다란 기쁨을 맛보고 스릴을 느끼는 것이다.

마샬리스 세대에게 "반항하라, 그리고 싸워서 쟁취하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런 말을 하다니, 도대체 무엇에 반항하란 말이냐"고 그냥 어깨를 으쓱거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11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