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노벨문학상에 프랑스 작가 르클레지오



1963년 데뷔… 亞-멕시코 돌며 불교-인디언 심취
김치-비빔밥 즐기는 ‘지한파’… 작년 이대서 강의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클레지오(68) 씨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9일 오후 “르클레지오 씨는 인간성에 대한 탐구와 관능적 환희, 시적인 모험이 가득한 새로운 출발의 작가”라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1963년 프랑스 르노도상을 받은 데뷔작 ‘조서’와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상을 받은 ‘사막’을 비롯해 ‘홍수’ ‘성스러운 세 도시’ ‘혁명’이 대표작이다. 한림원은 특히 ‘사막’이 “이민자들의 눈에 비친 북아프리카 사막의 잃어버린 문화가 잘 그려졌다”고 평가했다.

서구 출신인데도 비서구적이고 친자연적인 작품 세계에 천착한 그는 2001년 방한해 전남 화순군 운주사를 둘러본 감흥을 담은 시 ‘운주사, 가을비’를 썼다. ‘고요하고 정겨운/인사동의 아침/광주 예술인의 거리…번데기 익는 냄새/김치/우동 미역국/고사리나물/얼얼한 해파리 냉채/심연에서 솟아난 이 땅엔/에테르 맛이 난다’(‘운주사, 가을비’ 중에서)

지난해에는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1년간 학부 및 대학원 강의를 했으며 김치 비빔밥 만둣국 등 한국 음식도 즐긴다. 수상 상금으로 1000만 크로나(약 19억 원)를 받으며 시상식은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다.

○ 서구를 벗어난 세계인

르클레지오 씨가 좋아하는 한국 작가로 꼽아 서로 교분을 나눈 이승우 씨는 “그는 국경과 언어,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 세계와 소통한 세계인”이라고 평했다.

오랫동안 노벨 문학상의 유력 후보로 거론돼 온 그는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각광받으면서도 언제나 서구와 결별한 타자로서의 삶을 유지했다. 2001년 처음 방한했을 때 “서구는 기독교 문명에 바탕을 둔 가치를 어디에나 기준처럼 적용하지만, 세상에는 그것 이외에도 다양한 가치와 자유가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1940년 프랑스 니스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으나 영국이 그의 조상이 살았던 아프리카 모리셔스 섬을 식민지화하려는 것에 반감을 느껴 프랑스어로만 글을 써왔다.

‘조서’로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그는 프랑스 사교계에 무관심했다. ‘비유럽인’을 자처했던 그는 “내 국적은 모리셔스 섬”이라고 말하곤 했다. 1966년 이후 태국 멕시코 파나마 등에 머물며 불교와 선의 세계, 인디언의 삶에 빠져들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서구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는 한편 친자연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의 소설은 철학 에세이나 종교적 성찰, 심지어 주술사의 신들린 넋두리와 닮았으며, 이는 현대 사회에 맞서 약자와 피지배자를 대변하는 방식이었다.

최수철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초기 실존주의적인 글쓰기에 주력했던 작가는 인간이 지닌 삶의 부조리에 내면의 정직함과 의식의 냉철함으로 줄곧 맞섰다”고 평했다.

국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작품으로는 ‘홍수’(1966년)를 꼽을 수 있다. 남진우 문학평론가는 “이 작품을 통해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현대 프랑스문학과 그 철학적 사유에 입문한 한국 작가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 각별한 한국과의 인연…비빔밥, 만둣국 즐겨

르클레지오 씨는 올해 9월 말에도 제주도와 진도를 돌아본 뒤 6일 파리로 떠났다. 그는 한국 문화에 인간미가 넘친다며 애정을 표시하곤 했다. 한글의 기본적인 단어도 읽고 쓸 수 있다. 소설가 황석영 이승우 씨 등 국내 작가들과의 교류도 잦았으며 박찬욱 감독 등을 인터뷰할 만큼 한국 영화에도 관심이 컸다.

이화여대 통번역 원장인 김용숙 교수는 “한국에 있으면 집처럼 마음이 편하고 아늑하다고 말하곤 했다”면서 “학교 인근 식당에서 음식을 즐기며 길거리 리어카에서 과일을 사 드시는 걸 좋아할 정도로 소박한 분”이라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작년 기사]

세계적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 서울서 교수 생활 4개월
“역마살 낀 용띠 … 세계 각지 떠돌아, 소주 즐겨야 한국사람 다 된건데…”

올 8월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67)가 한국에 왔다. 2001년부터 이미 네 차례나 한국을 찾았던 그였기에 방한 자체는 그리 놀라운 소식이 아니었다.

한데 이번엔 한국 대학에서 강의를 맡아서 온 것이라 했다. 그는 올 2학기 이화여대에서 강의 두 개를 진행했다. 궁금했다. ‘프랑스 문학의 살아있는 신화’로 불리는 세계적 문호가 ‘변방의 작은 나라’ 한국을 왜 그리 자주 찾는지. 이번엔 아예 눌러앉아 강의를 맡게 된 이유는 또 무엇인지. 한국에서의 첫 강의를 끝낸 단독으로 만나 서울 생활 얘기를 들었다. 르 클레지오는 프랑스에서도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는 젊었다. 190㎝는 족히 넘을 듯한 키에 꼿꼿한 자세, 짧게 친 금발과 캐주얼 셔츠 차림의 그는 칠순을 지척에 둔 노인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국을 자주 찾는 이유가 궁금하다.

“안정적이다 못해 침체한 분위기인 유럽에 비하면 한국 사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다이내믹하다. 전통과 현대, 자연과 도심이 혼재돼 있다. 그 속의 한국문학 역시 아주 다채롭다. 그런 매력 때문에 한국을 좋아하게 됐고, 한국에서 강의를 맡을 결심까지 하게 됐다.”

-당신은 한국뿐 아니라 일생동안 미국·영국·프랑스·나이지리아·멕시코 등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내 조국은 없다. 작가의 조국은 모국어다라는 말도 자주 했는데.

“아마도 내가 ‘역마살 낀 용띠’이기 때문인 것 같다. 사주팔자를 본 적은 없는데 이참에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웃음).”

-서울에는 혼자 왔나. 어디서 지냈나.

“아내와 두 딸은 파리에 두고왔다. 이화여대 국제기숙사에서 혼자 머물렀다.”

-한국에서의 4개월은 어땠나.

“정 많고 예의바른 한국사람들 덕분에 매순간 행복했다. 학교 후문에 있는 ‘엄마손식당’의 알밥을 좋아해 자주 먹는다. 설렁탕도 좋아한다. 추운 날엔 길거리에 파는 붕어빵이 특히 맛있다. 한국어 읽는 법도 배웠다.” (그는 한국어 실력을 굳이 증명하겠다며 기자의 명함에 인쇄된 ‘중앙일보’ 네 글자를 또박또박 읽어 보였다)

-한국 사람이 다 된 것 같다.

“저녁에 소주를 즐겨 마셔야 완전한 한국인이 된다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직 한국인이 덜 된 것 같다.”

-한국 학생들이 어떻던가.

“한국 학생들은 적극적이고 똘똘하다. 미국에서 나는 학점에 그리 후한 교수가 아니었는데, 한국 학생들은 워낙 훌륭해 모두 좋은 점수를 줄 생각이다. 학기가 끝나는 주말에 클래스 전체 학생들과 삼청동 매듭박물관에 놀러가기로 약속했다.”(그는 2002년까지 10년 넘게 미국의 뉴멕시코 대학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다. 한국에선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한·불과 1학년 ‘불어토론’과목과 ‘프랑스 현대 문학’학부 과목을 강의했다.)

- 한국 문학에 관심이 각별하다고 들었다.

“최근 발표된 작품 중에 한국 사회의 문제를 아주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는 수작이 많다. 특히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가 인상적이었다. 한강의 작품도 좋다. 프랑스에서 바라보는 한국은 38선과 한국전쟁 같은 이데올로기적이고 경직된 이미지다. 그런데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남한은 독자적으로 정말 놀랍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좋아하는 작가를 꼽는다면.

“윤동주의 시는 최고다. 그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처음 한국 방문 때부터 인연을 맺은 황석영의 작품도 좋다. 최근작 『바리데기』는 그 자체로 훌륭할 뿐 아니라 젊은층에 크게 어필했다는 점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다른 세대와 교감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 당신은 첫 작품 『조서』로 공쿠르상과 함께 프랑스 4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르노도(Renaudot)상을 수상했다. 20대 초반에 화려하게 데뷔한 뒤 작품을 낼 때마다 유럽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선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데.

“프랑스 속담에 ‘버터를 가지기 전에 팔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 영광이 주어진다면 마다할 리 없겠지만 특별히 기대하지는 않는다.”

-노벨문학상 발표날인 10월 11일 당신 집앞에 한국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나.

"(박장대소하며)전혀 몰랐다. 그날 많은 기자들이 최미경 교수에게 전화해 나를 찾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정작 나는 그때 지하철 안에 있었다.”

-앞으로 계획은.

“한국에서의 생활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한 학기 일정으로 왔지만 계획을 바꿔 내년에도 한국에 머무르기로 했다. 방학 동안 미국·중국·스웨덴에서 출판 관련 행사를 마치고 2월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을 다음 학기 마칠 때쯤 완성할 생각이다. 파리에서보다 서울에서 글이 잘 써지는 것 같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22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글=이에스더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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