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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이
이영수(듀나) 지음 / 북스피어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듀나(이영수)의 새로운 소설집 <<용의 이>>를 나는 서점에 깔리기 전에 볼 수 있었다. 지금도 이 책을 직접 본 사람은 얼마 되지 않겠지. 그러니 여기서는 내용에 대한 꼼꼼한 리뷰를 하기보다는, 이 소설집의 네 작품이 가지고 있는 모티프를 짚어내고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장점을 소개하는 정도의 감상문을 써볼까 한다.
이미 제목에서 언급되어 있는 바와 같이, 나는 이 소설이 ‘강간’과 ‘소녀’라는 두 가지 모티프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정도 주제 노출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스포일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책 뒤표지에 나와 있는 정성일의 추천사도 스포일러가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지 아니하듯이 지금 내가 쓰는 리뷰 겸 추천도 내용에 대한 직접적인 노출을 포함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작품집에 포함된 네 편의 소설들은 모두 강간 피해자의 이야기를 조금씩이나마, 혹은 중요한 전개의 일부로서 포함하고 있다.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내용에 대한 언급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니, 입이 근질거리긴 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무튼 강간 이야기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고, 그것들은 대체로 소녀인 화자들의 입을 통해 재서술된다. 드물게도 <천국의 왕>은 주인공이 남성이지만 그는 “좌우대칭이 어긋난” 얼굴과 “절룩거리는 왼쪽 다리”를 지닌 장애인이다. 그 화자들은 듀나가 이끌어내는 세계 전멸의 이야기들을, 다소 즐거운 일이라는 듯이 투덜거리며 서술해낸다.
개인적인 호오를 따지자면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소설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너네 아빠 어딨니?>이다. 판타스틱 창간호에 실려 상당한 호응을 받아낸 그 작품은 현재 영화화되고 있기도 하다. 헌대 그 소설이 그려내는 세계의 몰락과, 그것을 마치 고소하다는 듯이 풀어내는 작품 특유의 톤이 영화화 과정에서 실각되지 않을 수 없다고 나는 예측하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영화가 나오기 전에 먼저 원작을 읽기를 권하고 싶다. 제정신을 가진 PD라면 이 작품의 특유한 뉘앙스를 감독이 다 살려내거나 발전시키도록 방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소설이 재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장르문학을 읽는 행위 자체가 ‘대중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기회를 놓치고 영화를 먼저 본 다음 실망스러운 첫인상을 느끼지 말고 우선 원작을 읽어야 한다. 그로테스크한 설정 밑에 유머와, 소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무튼 사회적인 풍경의 일부를 잡아내고 있는 날카로운 시선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천국의 왕>과 <거울 너머로 건너가다>는 둘 다 강렬한 설정에서 작품의 동력을 얻고 있는 ‘하드 SF/판타지’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스토리텔링의 측면에 있어서는 <천국의 왕>이 낫고, 상상력이 주는 해방감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거울 너머로 건너가다>에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표제작인 <용의 이>는 <천국의 왕>과 나름대로 대구를 이룬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인데, 작가가 자신의 설정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관에 적응하는 것이 다소 어렵긴 하지만, 듀나가 시종일관 화자로 삼고 있는 ‘소녀’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반드시 집어 들어야 할 소설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에서 소녀는 아저씨와 유령과 좀비와 괴물과 싸우고, 또 다른 소녀를 만난다.
일전에 그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의 게시판에서 듀나는 자기 소설의 화자가 보여주는 행동 패턴을 ‘듀나질’이라고 부른 바 있다. 아는 것 많고 불평불만에 가득 찬 소녀의 행동거지와 말투 등이 자기 소설에서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안다. 하지만 <<용의 이>>를 놓고 볼 때 그것은 그의 개성일 뿐 결코 단점이 아니다. 세계의 몰락을 염원하는 소녀가 냉소적으로 키들거리며 풀어놓는, 강간 이야기가 슬며시 언급되는 네 편의 소설들은, 나름의 일관된 스타일을 구성함으로써 듀나라는 몇 안 되는 한국인 SF 작가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작품의 코드는, 내가 보기에 ‘강간’, 그리고 ‘소녀’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어주신다면 리뷰를 쓴 사람 입장에서 더 바랄 게 없겠다.
네 편의 소설 외에도 이 책에 좋은 점수를 주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면, 원고지 3매를 쓰려다가 30매를 훌쩍 넘겨버린,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길고 긴 추천사가 아닐까 한다. 길고 길지만 재미있게 술술 읽힐뿐더러, 여느 문학평론가들처럼 상찬의 언어를 무성의하게 풀어놓는 대신 그 또한 한 사람의 장르문학 독자이자 듀나의 팬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마치 책을 다 읽은 후 정성일과 수다를 떠는 것 같은 기분마저 맛볼 수 있다. 소설을 다 읽은 후 뒤에 딸린 ‘작품해설’을 보며 기분을 잡쳐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주례사비평이 문학계를 망쳤다’라는 말에 전적인 공감을 표할 수 있을 텐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욱 기분이 좋아지는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다른 출판사에서도 이런 부분을 참조해주었으면 싶기까지 하다. 정말이지, 한국 문학계를 망친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소설 뒤에 붙는 ‘작품해설’임을 다들 모르는 걸까.
듀나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듀나처럼 투덜거리며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아무튼 여러모로 <<용의 이>>는 추천할만한 책이다. 구매 버튼을 눌러도 좋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