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네 마이어의 인간관계는 바로 이런 오해들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남이 자기를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의 기억을 한번 더듬어 봅시다. 이레네 마이어는 조부모 손에서 자라면서 일찌감치 손아래 동생들을 돌봐야 했던 그 사람입니다.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는 것을 괴로워하면서 이레네는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어릴 때 엄마와 아빠가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 거듭되자 이레네는 부모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서 언제나 혼자 내버려둔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성장한 후의 남녀 관계도 이러한 그녀의 생각을 더욱 굳혀주는 것들뿐이었습니다. 걸핏하면 애인이 떠나버려서, 이런 경험을 자기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증거라고 해석했습니다. 남자들이 떠난 근본적인 원인이 자신의 외모나 몸매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몸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겁니다. 밥을 먹지 않는 것도 이 몸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려는 시도였습니다. 아주 날씬하고 예뻐지면 절대 자기를 버리지 않을 남자를 발견하게 될 거라고 믿었지요. 새로운 상대를 만날 때마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멋진 여자가 되기 위해, 상대의 마음에 꼭 들기 위해 애썼습니다. 나름대로 남자가 이상적인 배우자에게 바랄 만한 것은 모두 다 해보았지만, 사랑한다는 분명한 표시라고 느낄 만한 것을 남자한테서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남자의 태도를 평가하는 기준은 단 하나, 그가 자기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하는 일이든 하다 중단한 일이든 모두, 그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최근 애인과도 역시 이런 태도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토마스와의 관계는 이레네가 아주 편안하게 느끼는, 좋은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토마스가 그녀를 모른 척하거나 그녀의 기대를 저버릴 때마다 이레네는 심한 불안에 빠졌지요. 그러면 즉시, 토마스가 이제 자기에게 관심이 없으며 자기는 이젠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그가 몇 달 동안 여행을 떠났을 때, 두 사람은 겨우 전화로만 연락을 취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레네는 토마스에게 자기를 그리워한다는, 떨어져 있어 그녀 못지 않게 슬프다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아주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토마스가 자기 없이도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그녀는 결국, 토마스는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기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결론을내 렸습니다. 그리고 나니 불안해졌습니다. 그가 자기와 멀어져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관계를 끝내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그래서 전화를 할 때마다 그의 목소리를 아주 주의 깊에 신경을 써서 들었습니다. 아직도 자기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지 살폈던 것이지요. 그녀가 전화한 것을 전혀 반가워하는 눈치가 아니든가, 통화할 시간이 없다고 하면, 이레네는 당장 그것을 자기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여서 마음이 상했고, 그래서 그에게 또 억지를 부리게 되었습니다. 전화 통화가 다툼이나 긴장된 분위기로 막을 내리는 경우가 잦아졌고, 이것은 버림받는 데 대한 그녀의 두려움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두 사람이 헤어질 가능성 또한 실제로 이에 비례하여 커진 것은 물론입니다.
근본 문제는 자기가 마음에 상처를 받은 데 있으며, 그 이유는 그가 자기를 그리워하는 정도가 자기가 그를 생각하는 것에 미치지 않았고, 그가 자신을 함부로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자, 이레네는 토마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다른 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다친 데서 오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대신 토마스에게, 그가 없어서 얼마나 쓸쓸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보이면서,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기 마음의 상처로 인해 모든 것을 거부로 해석하는 대신, 그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다시 느끼고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나 토마스가 돌아왔을 때 이레네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쳤습니다. 그가 무척 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들의 재회를 무척 아름답게 상상했습니다. 한데 그는 예상보다 늦게 돌아왔습니다. 몹시 실망한 이레네는 그가 자기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순간 화가 폭발하면서 그를 비난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를 이렇게 한없이 기다리게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하고 말입니다.
마음이 아파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자신이 상대의 배려를 전혀 받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함부로 취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아픈 상처가 다시 되살아나면서 그 옛날의 온갖 느낌들이 몰려왔습니다. 혼자 남겨져 공포에 떨던 일, 끝없는 허공으로 떨어져가던 느낌. 바로 그 순간 이레네는 토마스와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와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대신, 노여움과 경멸이 가슴에 넘쳐났습니다. 어찌나 분노했는지 다시는 보고 싶지 조차 않았습니다. 그가 돌아온 데 대한 기쁨과 그를 향한 사랑은 더 이상 느낄 수 없었고, 마음을 다친 아픔만 그녀를 뒤덮었습니다. 마음상함에 너무도 강력하게 사로잡힌 나머지, 그녀는 차분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아마도 차분히 생각할 수 있었더라면 홀로 남겨진 옛날 그 어린아이의 눈으로가 아니라 이제 다 자란 어른의 눈으로 이 상황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토마스는 또 어떻게 느꼈을까요? 이레네가 그렇게 버럭 성을 내면서 자기를 물리치는 바람에 그는 그대로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 역시 이레네를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면서, 명랑하고 사랑스럽게 그녀가 자기에게 다가와 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죄책감이라곤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늦게 돌아온 것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 데다가, 일단 왔으면 됐지, 언제 왔느냐가 도대체 뭐 그리 중요한가 싶었던 것이지요. 오히려 이레네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를 향한 자신의 애정을 우습게 안다고 느끼면서,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이미 그녀가 전화로 원망 섞인 말을 할 때부터 어안이 벙벙하고 기분이 상했던 토마스였습니다. 항상 자기 마음에 꼭 맞게 대해 달라는 그녀와 암묵적인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녀의 힐책과 의심은 그로 하여금 관계에서 완전히 뒷걸음질치게 만들었습니다. 도덕적 압박감이 인격이 깍인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자기가 아주 모범적으로 행동해야만 그녀에게 사랑 받을 수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가 이런 식의 관계를 처음 접한 것은 어머니에게서 였습니다. 어머니는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항상 "착한 내 아들아, 내가 바라는 대로만 하렴. 그럼 나도 너를 예뻐하마" 하는 식으로 대했습니다. 그가 혼자서 뭔가 좀 다른 일을 하면 어머니는 그를 외면하는 것으로 벌을 주고 등을 돌리기 일쑤였습니다. 아들이 애써서 마음을 풀어준 다음에야 어머니는 다시 아들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감정적 혹사를 당하고 나서 어른이 되자, 토마스는 어느 관계에서나 항상 이 착취의 낌새를 지레짐작하게끔 되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고 나면 으레 혼날까 봐 겁이 났습니다. 이레네에게서 그는 예전의 어머니 같은, 자기를 조종하려는 여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레네는 이런 일들을 알 리가 없었지요. 그녀가 원하는 건 오직 그가 자기를 사랑해서 다시는 떠나지 않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요구와 감정으로 자신이 그를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지요. 반면 토마스는 자신이 남의 감시를 받을까 봐 지레 겁을 내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상대가 항상 자기를 의심하며서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여기면서 저항부터 했던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의 인격과 상대에게 차지하는 자신의 비중이 손상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사랑과 애정을 받고 싶은 욕구는 두 사람 중 어느 누구에게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레네는 상대가 늦게 돌아오자 그가 자기를 떠날 듯한 두려움을 느꼈고, 토마스는 애인의 불평을 듣고서 그녀가 멋대로 자기를 지배할까 봐 겁을 냈던 것이지요. 두 사람이 각각 상처받는 주제들이 서로 이가 잘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한번 상처를 입으면 양쪽 다 격렬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렇게 일이 묘하게 얽혀 있는 경우, 각자가 자신의 욕구와 느낌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토마스의 처지에서는 자신의 두려움을 이레네에게 투사하는 것부터 멈추어야 합니다. 자신의 고유 영역을 그녀가 침범하려 한다고 믿는 대신에, 관계 속에서도 독자성을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혹시나 가까운 사람이 생기더라도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자유로움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론 이레네가 원하는 대로만 맞추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그에 맞서 세울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고요. 이레네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절망감이 토마스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신 누가 자기를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잘 다잡아서, 자기 자신을 위해 걱정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마음상함을 피하고 싶다면 결국 두 사람 다, 상대방의 태도가 자기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생각부터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 대신, 자기태도에 대해서는 확실히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해나 의심 등을 상대에게 터놓고 얘기하는 것도 일이 더 꼬이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지 못하면 헤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몫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 이 문제는 미해결인 채로 남을테니까요.
-따귀 맞은 영혼 154~160p, 베르벨 바르데츠키, 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