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힐리즘 nihillism
허무주의라고도 한다. 종래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온 생활상의 가치, 즉 이상이나 도덕규범이나 문화, 생활양식 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견해. 이 말은 라틴어'nihil'(無)에서 유래했는데, 18세기에서 19세기초의 신앙을 원리로 하는 철학자 야코비가 [피히테에게 보내는 편지](Brief an Fichte.1799)에서 사용하고 있고, 19세기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1818~83)의 작품 [아버지와 아들](1862)의 주인공 바자로프를 니힐리스트로 묘사한 것에서 이 말이 널리 보급되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오늘날까지 계속 유행되고 있는 니힐리즘의 의의와 러시아에서의 그 의의는 종래의 가치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그 역사적인 의미에서는 다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서 유럽적인 니힐리즘은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로 진행하고 독점 자본가와 노동자 및 쁘띠 부르조아의 모순과 계급대립이 격화되고 유럽문명의 위기가 심화되는 시기를 역사적 배경으로 두드러지게 표출되어 온 것이다. 이 니힐리즘의 대표자로서는 니체를 들 수 있다. 그는, 니힐리즘이란 "최고의 제(諸)가치가 그 가치를 상실한 것, 목적이 없고 '무엇을 위해서'라는 물음에 답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종래 인정되어 온 가치가 변화의 시대에서는 유용하지 않는 환상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고 단언하며, 이 환상은 기독교에서 기인(起因)한다고 보아 교회를 모두 부정했다. 그는 사회주의도 또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가치의 영역안에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리하여 그는 한편에서는 붕괴된 가치속에서 무의미한 생을 살아가는 소극적인 니힐리즘에 대해서, 다른 한편에서는 환상적 가치를 분쇄하고 새로운 가치를 일으켜 세우는 능동적인 니힐리즘을 제시했다. 그는 '초인'이나 군주도덕'에 대한 설명은 이것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19세기 중엽의 키에르케고르도 이 사상의 대표자인데, 그의 주장이 주목받게 된 것은 19~20세기의 과도기였다. 니체는 기독교가 가르치는 가치를 부정하였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시대의 병으로 규정하고, 이것은 가치있다고 여겨져온 교훈이나 사상, 생활방식에 대한 환멸에서 나오기 떄문에, 그러한 것의 부정을 기초로한 '참된 기독교'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현대는 실존주의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하이데거는 니힐리즘이 종래의 형이상학, 즉 '존재'와 의미'의 분리에 있으며 그가 말하는 '실존'이라는 말에 그 극복이 있다고 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자 카뮈는 세계는 부조리(不條理)하다'라고 규정하면서 니힐리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띄었지만, 부조리한 삶을 영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모든 니힐리즘은 자본주의 사회가 야기시킨 위기의식에서 생겨났으며, 새로운 시대, 사회의 출현을 통해 극복하려고 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방향과는 달리, 공상적인 상태속으로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또는 반동적 정치의 방향으로 (니체, 어느정도 하이데거) 사람들을 몰아 넣는다.
러시아의 니힐리즘은 19세기 50년대 말에서 60년대, 러시아 농노제가 위기에 봉착하고 혁명적 상황이 대두하던 시기에 주변계급의 지식인들(사제, 관리, 농민, 상인 출신)이 지녔던 민주주의적으로 미성숙된 계층의 정신적인 경향이었으며, 이 위기속에서 민주주의적인 사회계층의 사상으로 일단 정착됐다. 이것은 종래의 철학, 도덕, 생활양식의 부정을 포함한 그 시기의 독자적인 표명으로,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 형성의 초기 단계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사상적으로는 명확한 기초를 갖고 있지 못했지만, 귀족적·신분적 제도의 타파, 전체에 대한 저항으로서 진보적인 의의를 지녔고, 60~70년대 혁명적 민주주의 자의 투쟁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명확한 방향성을 갖지 못한 이 운동은 60년 이후 그 힘을 상실하여, 하나는 혁명적 민주주의자로,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와의 타협, 문화주의로, 급진주의로 되어 무정부주의에 접근함으로써 분해되었다. 또 60~70년대에는 반동파가 혁명운동을 니힐리즘이라고 공격하기도 했었다.
== 철학사전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