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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 현대성의 형성-문화연구 10
김진송 지음 / 현실문화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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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포스트모던과 새로운 중세가 혼합된 듯한 오늘날이지만 여전히 그 중심에는 근대(혹은 현대)가 도사리고 있다. 근대라는 시·공간은 우리의 모든 삶을 규정하는 토대이자 형이상학이며, 오늘이자 내일이기도하다. 그것은 관심거리이기 전에 고스란히 삶 그 자체이다. 물론 근대를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이미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근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김진송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근대를 둘러싼 담론에 새로운 물꼬를 보여주는 선구적인 저작이다.

지금까지 근대에 접근하는 우리의 방법은 엄밀한 개념과 난삽한 용어를 사용하는 철학적 사유에 의해 이루어졌고 거기에는 민족이라든가 국가, 제국과 식민, 자본주의와 변혁 등등 거대한 담론들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그것들을 피해서 근대를 설명할 순 없겠지만 역시 그 추상성은 구체성을 드러내기에는 미흡하다. 이 책은 세부적인 기관들(이를테면 당대의 지식인의 모습에서부터 여성들의 유행이나  광고, 도시의 거리풍경 등등)을 들어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근대라는 몸통을 말하고 있다.
 

 자전거 타는 법을 훌륭한 이론으로 배우진 않는다. 그것은 수없이 넘어지고 무릎팍 깨지는 과정을 통해서 습득되는 것이다. 그렇게 몸에 벤 자전거는 결코 타는 법을 잊어버리지 못한다. 이 책의 고유한 미덕은 바로 근대를 자전거 타기에 견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현재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연애와 청춘, 기차나 학교 등을 통해 근대성의 형성을 언급하는 책들은 모두 이 '딴스홀'의 후편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근대라는 만만치 않은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가벼움'과 '경박함' 사이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지는 진지한 검토가 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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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시마자키 도송 지음, 노영희 그림 / 제이앤씨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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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계>를 '자유'의 문제로 읽었다. 소설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대, 한 인간이 신분제의 굴레를 깨고 참다운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처절한 고투를 그리고 있다. 김수영은 어느 시에선가 '자유의 고독과 거기에 스민 피의 냄새'를 노래한 적이 있다. 물론 그것은 혁명의 과정에서 억압받는 집단이나 계층 혹은 계급의 자유일 것이다.

 <파계>에서는 이와 같은 '만인을 위한, 만인의 자유'를 말하고 있진 않다. 하지만 한 개인의 참다운 자기발견을 위한 투쟁에도 그만큼의 고독은 스며있는 법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우시마쓰는 백정이라는 천한 신분을 감추고 천신만고 끝에 초등학교 교사라는 어느 정도의 사회적 신분을 획득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신분을 밝히지 말라'는 아버지의 계율과 그것을 어겼을 경우 사회로부터의 추방과 냉대라는 공포가 함께 한다. 주인공이 이러한 또 다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까지의 과정은 현세의 환락과 오시호에 대한 사랑의 포기, 죽음을 무릅쓰고도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했던 아버지와 스승이자 선배인 렌타로 사이에서의 갈등 등 결코 간단치 않다. 그러나 결국 렌타로의 피살을 계기로 우시마쓰는 금기를 깨고 "희게 밝아오는 일생의 여명을 알리는" 렌게사의 종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신분을 '고백'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자유는 망각 속에 안주하는 데 있지 않고 치열한 자기성찰과 각성, 그리고 그에 걸맞는 결단과 용기로 실천하는 데 있다.

  교묘하게 얽히고 섥힌, 게다가 인물의 심리와 배경을 절묘하게 착종시킨 구성력이 결말에서 다소 느슨해진 점은 아쉽다. 게다가 어색한 번역과 눈에 띄는 오자와 어긋난 맞춤법 등 편집의 무성의는 고전의 가치를 헤친다는 점을 책을 펴내는 사람들은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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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세설 - 모국어는 내 감옥이다
고종석 지음 / 열림원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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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산문집 『언문세설』은 'ㄱ'에서 'ㅎ'까지, 'ㅏ'에서 'ㅣ'까지 닿소리와 홀소리를 풀어헤쳐 우리말 잔치를 펼쳐 보인다. 예의 자신의 자유주의 정신에 입각해 쏟아내는 우리말의 향연은 거침이 없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토종말에 얽매이지 않고 한자나 외래어까지 품어 안아 우리말의 지평을 넓힌다. 우리말의 까다로운 문법에 불편해 하는 초보자나 우리말 전공자 모두에게 불평을 사지 않게 씌어진 것도 이 책이 가지는 미덕이다.
  그러나 언어 현상에 대해 예로 든 단어들의 지나친 중복이나 다소 지루한 나열이 작은 흠으로 남는다. 자음에 견주어 모음에 대해 적은 지면을 할애한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뒤로 갈수록 철학적 사유와 그 밀도가 떨어지는 것은 책을 서둘러 마감하려 했다는 오해의 소지마저 보인다.
  저자는 책 앞에 '모국어는 내 감옥이다'라고 적고 있다. 감옥은 육체를 가두지만 때때로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곳이다. 『언문세설』은 바로 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자 산책이다. 이런 사색과 산책으로 인해 우리의 모국어는 가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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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물레 - 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김종철 지음 / 녹색평론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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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의 '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를 단 『간디의 물레』(녹색평론사, 1999)를 잠자리 머리맡에 두고 오래도록 읽었다. 여러 글을 통해 저자가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삿된 욕망을 버리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것, 욕망의 직선적 추구를 부추기는 또는 그 결과인 산업사회 대신 생명의 근원인 땅에 기반한 농경사회에 더욱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것, 상호부조의 공동체, 대자연 혹은 우주적 질서 속의 한 부분으로 인간을 보는 것, 명상의 태도, 인간적 규모의 노동, 교만을 버리고 자신 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종교적 감수성을 갖는 것 등등이다. 한마디로 더 이상 뭇 생명들의 생존을 지속가능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현재의 산업사회와 인류문명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발전' 혹은 '문명'으로 치받든 것이 곧 '야만'이며, '야만'이라 치부하고 무시하던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문명'이라는 역설을 발견한다. 그것은 곧 서구 근대의 논리인 계몽주의에 뿌리를 둔 이성(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항의이자 도전인 셈이다.

산업화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환경문제의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문제는,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일텐데 명확하거나 유일한 대안을 내놓는 것은 유보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것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몫일 것이다. 다만 이 책에서 단초는 얻을 수 있다. 덮어놓고 옛날로 돌아가자거나 무턱대고 생활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진짜 행복한 상태를 소망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 금욕주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행복을 알아보는 능력을 키우는 것. 즉 자동차가 아니라 맑은 물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계발하라는 전언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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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단상 - 한 전라도 사람의 세상 읽기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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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내 글쓰기의 전범이자 내 얄팍한 좌익소아병을 치료해주던 고종석의 글에서도 이번엔 자꾸 잡티가 눈에 띤다. 현학적 글쓰기와 현란한 글쓰기가 여전한데, 그건 그의 스타일이니까 뭐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예전엔 그리 거슬리지 않던 것이 지금은 불편하게 읽힐 뿐이다.

『서얼단상』은 예의 그 더 농익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현실에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반길 일이다. 하지만 그의 글을 매문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이 책에서는 글을 써서 살아가는 자의 고달픔(?)이 한층 애처롭기까지하다. 2부에 실린 <대통령의 두 가족>이나 <파리, 1994년 5월>같은 약 10년 전의 글까지 모아 한데 묶은 것은, 그 성격이 전체의 맥락에 부합하는 지도 의심스럽거니와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에 무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더욱이 몇 편의 글들은 지면 늘리기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고 그런 글을 읽으면서 씨의 글이 이토록 지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그가 혹 매너리즘으로 흐르고 있다는 인상은 슬프다. 이제는 다시 내공을 닦을 때, 긴 호흡으로 깊은 발자국을 새겼으면 하는 바람을 애정 섞어 주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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