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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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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21 금요대중강좌 리뷰>  

손철주의 그림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하나하나 지나가는 ‘옛 그림’들이 복잡 다다한 여러 이야기들을 주리 주저리 늘어놓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의 표현을 빌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라고나 할까. 더구나 손철주의 말과 글은 예스럽다. 옛 사람이 옛 그림을 이리도 흥겹게 설명을 해주는데, 옛 풍경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다.  


특히, 글에 녹아든 손철주의 시(詩)와 그림에 대한 애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더욱 그림과 ‘통’(通)하게 만든다. 그림을 사랑하는 것인지, 시를 사랑하는 것인지 .. 이 두 여인을 모두 사랑하는 배포를 통해 그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들은 시와 그림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이다. 손철주의 이러한 마음은 소동파의 시구를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詩中有畵 畵中有詩.그림 가운데 시가 있고, 시 가운데 그림이 있다” 덧붙여,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의 말 “시는 말하는 그림이오, 그림은 침묵하는 시다”. 손철주에 의해 우리의 시선은 화폭 속 ‘시’로 향한다. 시가 너무 좋아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옛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자신의 그림이 회화적 기술보다는 함축된 ‘시’로서 평가받기를 원했다. 옛 그림의 한 귀퉁이에는 그림을 설명하는 글귀들이 있었는데 이는 ‘제발(題跋)’이라 불린다. 품격 높은 시가 함축된 그림은 ‘문귀’가 높다하여 깊은 내용을 담은 그림으로 여겨졌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화가인 강세황은 그림, 그리고 시가 함께하는 자화상을 통해 스스로를 이야기한다. 화폭 속 강세황은 머리에는 관모를, 몸에는 도포를 두르고 있다. 정상적인 모습이라면 관모와 관복이 조화를 이루어야 했지만, 강세황은 관복 대신에 도포를 자신의 몸에 입히며 다음의 글귀로 심정을 이야기 한다. “저 사람이 누구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머리에 오사모를 쓰고 야인의 옷을 입었네. 이것으로 알 수 있다네. 마음은 산림에 있지만 이름은 조정에 오른 것을...” 벼슬을 하고 있지만, 마음만은 야인이 되고자 하는 올곧은 노인의 마음이 그림과 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손철주의 그림읽기에서 시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림을 그린 화가의 ‘삶’이다. 손철주의 그림읽기는 사람읽기이자, 사연읽기이다. 능호관 이인상의 <와운> 이라는 작품에는 하늘에 거칠게 덩어리진 먹구름들이 등장한다. 얼핏 느끼기에 어둡고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와운>에는 이인상의 삶이 스며들어 있다. 아들 셋, 딸, 게다가 사랑하는 처 까지 먼저 보낸 사람의 삶이 과연 어떠했을까. 그의 삶은, 그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혹자는 <와운> 앞에서, 먹구름의 웅장함에 경탄을 할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랬다. 천지를 삼켜 버릴 것만 같은 흑색의 구름 덩어리들. 화가의 거칠고 거리낄 것 없는 붓놀림에서 강인함을 느꼈다고나 할까. 압도당할 것만 같았던 느낌. 기구한 삶의 흔적이 스며든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멋진 구름들. 화가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올바른 해석이란 없으며, 답 또한 없다. 설령, 화가가 입을 연다 해도 감상과 해석은 보는 이 들의 특권이 아니던가. 그림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 후에, 손철주가 남긴 말도 이와 같다. “감상은 오류, 독단, 편애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빠진다 하더라도 이는 명백히 ‘떳떳한’ 행위이다.” 감상자에 의해 ‘옛 그림’은 계속해서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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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로 꿈꾸다 - 여덟 가지 테마로 읽는 고구려 고분벽화 이야기
이종수 지음 / 하늘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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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화제로 읽어보는 고구려 고분벽화 이야기” <르네21 ‘금요대중강좌’ 리뷰>


이것은 그림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도 무덤의 한 벽을 차지한 ‘고분벽화’에 대한 이야기. 헌데, 우리는 이 벽화들을 어디에서 보았기에 이리도 낯이 익은 것일까. 우리에게 벽화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다가왔었던 것일까? 벽화가 내포한 아름다움의 이미지가 오래도록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아 ‘익숙함’이란 감정을 이끌어 냈던 것일까?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벽화는 역사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적 자료’이자 혹은 시험문제의 ‘정답’으로 더욱 익숙하지 않은가. 혹자는 이러한 이질적인 익숙함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종수 선생님의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녀에 의해 벽화는 자료가 아닌 ‘그림’본연의 역할로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아름답게’풀어낸다.

그 옛날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기에 이미 떠나버린 망자의 주위에 영원히 머물려 했을까. 이종수 선생님이 보여주는 벽화들은 다음의 이야기들을 해준다. 우선, 망자 자신의 이야기. 이것이 벽화가 간직한 스토리텔링의 시작점이다. 무덤의 측실에 고요히 자리 잡은 묘주의 초상은 많은 것을 암시한다. 묘주(墓主)를 명시하는 문자가 없어도, 부장품이 없어도 한 폭의 초상은 이곳이 ‘그’의 무덤임을 상상하게 한다.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는 ‘이미지’는 그 어떤 확증의 자료보다 더욱 확고하게 무덤의 주인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 묘주가 사후에 남기고자 한 못다 한 이야기 까지도 말이다. 여기에 묘주와 사랑을 나눴던 어떤 이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벽화의 이야기는 서서히 클라이맥스를 향해간다. 이때부터 벽화는 묘주 자신만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함께하는 이들과의 삶, 생활을 이야기해준다. 그 유명한 무용총의 수렵도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이종수 선생님은 이러한 과정을 벽화 이미지의 ‘탈주체화’라 표현한다. 이는 4C부터 6C까지 진행되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징인데, 후기로 갈수록 벽화는 인물묘사에서 벗어나 점차 생활, 상징물 등 다양한 이야기를 추구한다. 그리고 6C에 이르러 강서대묘의 네 벽을 모두 차지한 벽화‘사신도’는, 이즈음부터 고구려 벽화가 내세를 기원하는 ‘상징’을 주로 이야기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타의 그림들이 그러하듯, 고구려 고분벽화 역시 상징물이 지닌 ‘의미’만을 표현하기위해 수많은 ‘사신도’와 ‘연꽃’을 벽에 새기진 않았다. 상징물은 ‘의미’만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며, 내세를 기원하기 위해서만 ‘사신’과 ‘연꽃’을 그리지는 않는다. 사신과 연꽃 이라는 회화의 소재들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그 자체로 아름답다면 그 뿐인 것이다. 여기에 온갖 해석과 미사여구는 사족이 될 때도 있다. 이것은 이종수 선생님이 강조하는 벽화를 ‘그림 자체’로 읽는 독법과 무관한 것이 아닐 것이다. 

단상. 수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벽화. 그러나 벽화가 해주지 못하는 이야기도 있는 듯하다. 한번 생각해본다. 벽화가 있다는 것. 벽화가 새겨질 만한 무덤의 주인이라는 것. 이 자체가 당시 묘주의 부와 권력에 대한 증빙이다. 벽화는 어쩌면 그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들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르네21 '금요대중강좌' 수강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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