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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게임 - '세대 프레임' 을 넘어서
전상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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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벌어지는 세대 전쟁의 해법 찾기가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세대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 131쪽 중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생산력 확대의 성취를 이룬 자본주의와 그것을  방에 날려버릴  있는 핵무기로 인해 우리는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시대를 보내고 있다원래 가진 것이 많으면 포기하기도 힘든 ... 인류는 최근 몇백년 사이 핵무기 한 방으로 날려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문명의 성취를 이루어 냈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야만과 물리적 전쟁이 사그러 들었다고 해서 인류가 더 행복해졌다는 것에는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다. 


지나친 평화는 자본주의에 해롭다. 일찍이 1930년을 전후해 경험했듯 아무리 신자유주의로 화장을 바꿨다고 해도 여전히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치명적인 모순은 과잉된 생산물의 처리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결핍된 불행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세대 전쟁은 물리적 전쟁이 사라진 평화의 시대에 불행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대 전쟁은 세대 간에 벌어지는 소득과 소비를 둘러싼 전쟁이라 자본주의적으로도 매우 유익하다.


“세대를 겨냥하는 세대 전쟁론적 개혁의 예리한 창은 문제의 구조적 원인, 예컨데 자본, 기업, 그에 기생하는 정치 권력과 같은 원인들을 겨누지 않는다. 그런 탓에 세대 전쟁론이 내세우는 청년에 대한 배려는 말잔치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청년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 차별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p. 81)

"하지만 늙은이들의 사정이 나아진 까닭은 복지 정책이 개선되었기 때문이지만, 젊은이들의 사정이 악화된 것은 복지국가가 그들의 몫을 빼앗아서가 아니라 노동 시장의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p. 116)

"사실 빈곤 문제는 전통적으로 ‘계급’이나 ‘계층’의 사안으로 다뤄졌다. 하지만 세대 전쟁론자들은 이를 세대의 문제로 새롭게 번역해냄으로써 앞서도 인용했던 레스터서로의 묵시론적 예언을 따른다. '가까운 미래에 계급 전쟁은 빈자와 부자의 대결이 아니라 젊은이와 노인들의 싸움으로 다시금 정의될 것이다.'" (p. 118)

"세대가 가진 매력을 활용하여 꾸며진 세대 전쟁론의 도덕적 명확성은 아주 훌륭한 “대량 주의분산 무기”다.” (p. 122)


세대학자(?) 전상진은 세대 전쟁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허구에 대해 오랜 시간 침묵(?) 왔다  침묵은 ‘세대 게임’이라는 새로운 세대 논리를 벼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전상진은  「세대 게임」 4장, '세대 전쟁-청년 대 기성세대의 대결'에서 기존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세대 전쟁의 4가지 요소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첫번째, ‘저출산 고령화 인해  국력이 추락하고 성장 동력을 상실하고,  노인 세대에 대한 부양비가 늘고 혁신의 잠재력이 고갈된다는 논리.
두번째,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인의 투표권 행사로 인해 탐욕스러운 노인이 세상을 지배하게  것이라는 ‘노인의 지배’ 논리.
세번째고령자들이 과거에 사회보장 체제에 투입한 기여보다 현재 받는 급여가  많다는 “세대 형평성”과 “세대 회계” 논리.
네번째,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생산 세대’는 미래의 생산 세대인 ‘양육 세대’와 과거의 생산 세대인 ‘부양 세대’를 먹여 살리는 패자이고, 양육 세대와 달리 미래 노동 가치가 없는 부양 세대는 승장 세대라는 복지국가 세대 논리.

지금까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음직한 세대가 서로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논리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정리했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 그래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우리가 세대 전쟁론을 듣거나 주장하면서 답답한 이유는  답이  보이기 때문이다마치 우리는 절벽으로 향하고 있는데길이 절벽으로 가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멈추지 못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하다자본주의의 달콤한 소비에 빠진 우리는 절대 멈추거나 되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4장의 마지막 절인 ‘세대전쟁론 비판’에서 전상진은 바로 자신이 직접 매우 설득력 있게 전달한 그 세대 전쟁 논리를 처참하게 깨 부순다. 아니, 아예 잘근잘근 씹어서 가루를 내 버린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한국에서 벌어지는 세대 전쟁의 해법 찾기가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세대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p. 131) 원문을 그대로 카피해서 붙인다면 모를까, 그 면도날 같은 논리의 전개를 발췌해서 요약하는 것은 내 빈약한 능력으로는 무리다. 자세한 내용은  「세대 게임」, p. 101 ~ 107을 참조하기 바란다. 개인적으로  「세대 게임」의 엑기스는 그 일곱 페이지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음모론의 시대”도 읽어보았지만전상진의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논리적 설명을 위해 논리를 너무 쪼개는 경향이 있다전체를  개의 논리로 나누고  각각의 논리를  세분화하여 설명한다. 마치 드론에 올라타 있는 느낌이다. 하늘 위에서 숲을 조망하다가 갑자기 숲 속으로 곤두박칠 쳐 나무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디테일을 살핀다. 그러다가 다시 숲을 조망하기 위해 부상한다. 현기증이 난다. PT 친다면 파워포인트식 나열 구성이 아니라, 전체와 부분을 넘나드는 프레지식 논리 전개랄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명쾌한 논리의 전개를 경험한다. 마치 롤러코스트를 탄 후 울렁거리는 속을 사이다로 시원하게 진정시키기라도 하는 것 같은...


세대학자 전상진은 세대 논리는 그 논리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책임을 전가하고, 지지자를 확보하는 다분히 정치적인 player가 존재하므로... 그렇기 때문에 세대가 당사자가 되어 치르는 ‘세대 전쟁’이라는 단어는 세대 논리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대들의 싸움판에서 취할 수 있는 역할은 다음의 세 가지라고 충고한다.

① 만약 이미 재벌에 속해 있거나 정치를 할 생각이라면 세대 게임의 Player가 될 수 있다. 
② 세대 게임의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세대 전쟁터에서 소모되는 대체 가능한 병졸이 될 것이다.
③ 그래서 세대 게임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심하고 주저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세대들의 싸움판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취할지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 숙고하여 판단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제1장 ‘의심하고 주저하기’의 도입부에 있는 ‘파울 파츨라비크’의 우화를 소개한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열쇠를 찾고 있는 취객과 경관.
경관은 취객에게 묻는다. “정말 여기에 읽어버린 게 맞소?”
취객은 말한다. “여기가 아니라 저긴데, 저긴 가로등이 없어서 못 찾아요.”

‘선의’를 가지고 돕던 경관은 취객의 ‘지휘’ 아래 헛된 일만 한다.
혹시 우리도 ‘세대 프레임’의 강렬한 불빛에 현혹되어 
엉뚱한 곳만 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 벌어지는 세대 전쟁의 해법 찾기가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세대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p. 131)

세대를 겨냥하는 세대 전쟁론적 개혁의 예리한 창은 문제의 구조적 원인, 예컨데 자본, 기업, 그에 기생하는 정치 권력과 같은 원인들을 겨누지 않는다. 그런 탓에 세대 전쟁론이 내세우는 청년에 대한 배려는 말잔치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청년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 차별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p. 81)

하지만 늙은이들의 사정이 나아진 까닭은 복지 정책이 개선되었기 때문이지만, 젊은이들의 사정이 악화된 것은 복지국가가 그들의 몫을 빼앗아서가 아니라 노동 시장의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p. 116)

"사실 빈곤 문제는 전통적으로 ‘계급’이나 ‘계층’의 사안으로 다뤄졌다. 하지만 세대 전쟁론자들은 이를 세대의 문제로 새롭게 번역해냄으로써 앞서도 인용했던 레스터서로의 묵시론적 예언을 따른다. ‘가까운 미래에 계급 전쟁은 빈자와 부자의 대결이 아니라 젊은이와 노인들의 싸움으로 다시금 정의될 것이다.‘" (p. 118)

"세대가 가진 매력을 활용하여 꾸며진 세대 전쟁론의 도덕적 명확성은 아주 훌륭한 "대량 주의분산 무기"다." (p.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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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얼굴은 인간을 어떻게 진화시켰는가
애덤 윌킨스 지음, 김수민 옮김, 김준홍 감수 / 을유문화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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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을 구매했는데, 왜 이렇게 오타가 많죠? 추천사, 서문에서부터 띠어쓰기와 문장부호 생략... 도저히 읽을 수가 없네요. 이북은 업데이트 안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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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호모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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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신작 "호모 데우스"... 

E-book으로 사 두고 있다가 얼마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사피엔스"가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문명에 대한 통찰이라면, "호모 데우스"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류의 미래를 통찰하고 있다. 

얼마전 내가 "정과 반이 합에 이르지 못하는 시대"와  "포스트모던 시대의 변증법"에도 썼던 것처럼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인간의 역사발전 단계를 과학적으로 이론화한  순간아이러니 하게도 변증법은 새로운 변이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르크스의 탁월한 통찰로 인해 문명이 시작된 이래 적어도 근대까지 역사는 정반합으로 발전해 왔다고 확신한다. 굳어진 '정'에 '반'하는 것이 곧 '합'으로 이어졌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합'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금융자본과 강대국 방산업체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쟁과 냉전, 그리고 학살까지도 미디어로 정당화되는...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는 의도와 무관하게 '정'의 오만이 '반'을 키우고, '반'의 목적의식성이 '정'을 고착화하기 위한 명분이 되는 시대이다. 그리하여 진보와 보수가, 노동자와 자본가가 이해관계라는 진흙의 카르텔 안에서 함께 뒹굴고 있는 시대... 마침내 '정'과 '반'이 '합'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딜레마의 시대... 그래서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새로운 변증법이 필요하다.


호모 데우스를 통해 유발 하라리의 지혜를 조금이라도 빌린다면, 제4차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코팅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학원 자본의 천박한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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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루만 (반양장)
마르고트 베르크하우스 지음, 이철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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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인간의 역사발전 단계를 과학적으로 이론화한 바로  순간아이러니 하게도 변증법은 새로운 변이를 맞이하게 되었다인간은... 그렇게  정해진 것을 벗어나기 위해 상상하는 존재이므로... 
과거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할 당시와 비견될 정도의 무게중심이 포스트모던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인류의 인식 안팎을 보편적으로 넘나드는 맑스의 변증법으로는 더이상 포스트모던 사회를 진단할  없다현재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한 인류의 역사와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새로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한국에서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에 대해 가장 정통하다고 알려진 동양대 이철 교수님과의 페이스북 대화... ^^


얼마전에 사회연대경제 포럼 관련해서 프랑스와 덴마크를 다녀왔습니다. 포럼에 참석한 프랑스의 사회당(?) 의원과 잠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혹시 니클라스 루만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더니 모르더군요. ㅠㅠ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7년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하머마스는 지고 루만이 뜬다"라는 기사를 보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으니 그 영향력이 독일을 넘어 유럽으로 확산되지 않았을까? 라는 기대를 가지고 물어보았는데...
제 일천한 지식으로 판단하건데, 러시아혁명 이후 맑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상상은 실천과 학문이라는 두 가지 길로 나뉘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레닌은 러시아는 혁명을 통해 맑스의 상상을 현실에 적용하는 실험을 한 반면, 호크하이머를 위시한 프랑크프르트 학파는 학문을 통해 맑스라는 위대한 통찰자의 그늘 속으로 숨어 버립니다. 
사회연대경제에 같이 참석한 금천의 차성수 구청장님과 루만에 대해 잠깐 이유기를 나누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이미 현실의 모든 분야에서 루만의 통찰이 펼쳐지고 있는데, 굳이 그 어려운 학문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만약... 루만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인류의 지적 능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해야만 한다면... 현실 세계에서 그 이론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엥겔스는 심오한 맑스의 사상을 도식화하여 대중화하는데, 나름 기여를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중화라는 긍정성 이면에 교조주의라는 역설을 만들어 내는데도 기여를 했지만...
전 현재 루만을 그저 알게 되었다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기회가 되면... 기회는 저의 절박함이 만들어 내는 것이겠지만... 더 깊숙이 루만에 빠져보고 싶은 생각 또한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혹시 그러한 저의 행동이, 루만이 말했던 것처럼... 루만이라는 전문적 체계 안에 갇혀 사회와 무관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루만의 이론은 대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 때, 그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법은 두 가지겠죠. 인류가 루만의 이론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 능력이 보편적으로 성장하든가, 아니면 루만을 이해하고 있는 누군가가 대중들이 이미 이해하고 있는 언어로 그 심오한 이론을 '도식화' 시켜 주든가... 제가 지향하는 것은 후자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루만의 이론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능력가 여유가 되지 않음을 한탄할 뿐입니다...
전 개인적으로 예수를 중세를 대표하는 인물, 맑스를 근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들의 불규칙한 결합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의 사회인 포스트모던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은 니클라스 루만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 
맑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인간의 역사발전 단계를 과학적으로 이론화한 바로 그 순간부터, 아이러니 하게도 변증법은 새로운 변이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늘 정해진 것을 벗어나기 위해 상상하는 존재이므로... 하여 제가 이전 댓글에서 말씀드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변증법"에 대한 고민이 근대와 탈근대, 맑스와 루만 사이를 연결(연속성으로서의 연결이 아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루만의 언어를 사용해야만 루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루만의 사회체계이론은 사회를 떠난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만이 그것을 진정 바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소위 이 시대를 진보시키고 싶다는 주관적 열정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맑스의 언어로 루만을 설명해 내지 못한다면... 루만의 이론은 실천적 의미를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이상은... 루만의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는 한 후학의 치기 어린 괴변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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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 베버 편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 1
막스 베버 지음,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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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윤리만 판 치는 사회...
난 대학 때 공부를 지지리도 안했다. 학과 공부뿐만 아니라 운동권이 마땅히 해야할 사회과학 공부도... 
하지만 맑스와 앵겔스의 변유와 사유는 읽었는데, 사고가 제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에 읽은 책이라 그런가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나름 유물론자를 자처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상에 철학자라곤 소크라테스와 칼 맑스밖에 몰랐던 시절… 지나가며 막스 베버라는 이름을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쪽팔리게도 그당시 난 막스 베버를 칼 맑스의 짝뚱 쯤으로 생각했었다. 
어디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자기 고백을 공개적인 페북에 하는 이유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맑스와 엥겔스의 유물론 보다는 막스베버가 1919년 대학생들에게 힘주어 역설했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가 더 유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맑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지만 결과적으로는 세계의 자본가가 금융자본주의로 단결하는 신자유주의를 낳았다. 
한때 대한민국의 자본가들이 왜 내수 불안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을 지속적으로 양산할까... 라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소득을 예측할 수 있는 정규직이 많아야 소비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소비를 해야 그 이익이 자본가에게 갈텐데... 하며 대한민국의 자본가들의 멍청한 행위를 동정했다. 내가 더 멍청한지도 모르고… ㅠㅠ
세계가 다 시장인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자본가들에게 있어서 한국이란 시장은 그저 있어도 그만, 아예 없어지면 쬐끔 아쉬운 계륵일 뿐이다. 맑스의 말에 영감을 받은 세계의 자본가들은 단결을 통해 자신들도 통제할 수 없는 신자유주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 

다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로 돌아와서...
우리 사회는 결과 따위는 어떻게 되든 자신의 신념만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회의 진보를 방해하는 진보주의자들... 그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모든 사람을 악마로 규정하고 그 악마의 박멸이 이 사회의 진보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결과적으로는 진보의 탈을 쓴 반동이다… 
이것이 막스베버가 말하는 신념윤리이다. 우리 사회는 신념윤리자들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신념과 행위에 따른 결과의 책임을 악마의 탓으로 돌린다. 
진보주의자들이 진정 이 사회를 진보시키고 싶다면 신념을 지킨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지키고 있는 가치가 자신을 위한 것인지, 이 사회를 위한 것인지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야 하며, 이 사회를 진보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가치마저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진보적 가치가 아니므로…
그것이 막스베버가 말하는 책임윤리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신념윤리에 가득찬 이 땅의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나는 이 땅이 신념윤리가 아닌 책임윤리가 판 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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