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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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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파이 이야기>의 저자 얀 마텔이 캐나다의 스티븐 하퍼 수상에게 문학작품을 추천하며 4년 동안 쓴 101통의 편지를 모은 책이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시작해서 101번째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까지, 총 105권이 소개된다. 여기에는 프란츠 카프카, 조지 오웰, 애거서 크리스티, 제인 오스틴, 필립 로스, 미시마 유키오 등 유명 작가의 명불허전 작품도 많지만 조라 닐 허스턴, 마르잔 사트라피, 앨런 베넷 등 호기심을 부추기는 미지의 작품도 다수 포진해 있다. 그런데 책을 펼치자마자 궁금증이 밀려온다. 바쁘기로 따지자면 수상 못지않을 인기 작가가 왜 그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수상에게 책을 보냈을까?

 

 

스티븐 하퍼는 자신의 독서 습관에 대해 나에게는 물론이고, 2004년 선거 기간에 좋아하는 책이 <기네스북>이라고 말한 것 이외에는 어떤 기자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수상이 지금 무슨 책을 읽는지, 여하튼 책을 읽기는 하는지, 또 과거에는 어떤 책을 읽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스티븐 하퍼 수상처럼 나를 지배하는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상상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의 꿈이 자칫하면 나에게는 악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을 읽어야 제대로 된 사람 정치를 할 수 있고, 살기 좋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얀 마텔은 이러한 이유로 외로운 북클럽을 시작했다. 그리고 열성 회원 하나, 유령 회원 하나이던 둘만의 북클럽은 4년을 이어지다가 열성 회원이 두 개의 임신(아내의 임신, 떠오른 소설 영감)으로 마음과 몸이 분주해면서 겨우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물론 그 유령 회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 무응답으로 응답했다! 수상에게 단 한 통의 답장이라도 받길 바랐던 얀 마텔은 자신의 부름에 끝까지 응답해주지 않았던 수상에게 직접적으로 섭섭함을 드러낸다.

 

 

나는 이 ‘죽자고 묵묵부답이었던, 책을 읽지 않는 하퍼 수상’의 초지일관함에 웃음보가 터졌다. <기네스북>을 인생의 책으로 꼽는 사람에게 <길가메시>라니, <등대로>라니,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라니,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라니…… 아마도 수상은 책만 보면 잠이 와 하면서 꾸벅꾸벅 졸았을 수도 있고, ‘문학이 밥 먹여주나’ 하며 거들떠볼 생각도 안 했을 수 있고, 그것도 아니면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시간 나면 읽어야지 하고 내내 밀쳐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 세 가지 이유 중 하나로 자기변명을 하면서 자꾸 책을 밀치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일방통행만이 왕왕했던 이 북클럽의 역사는 얀 마텔이 직접 운영한 웹사이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공개되어 캐나다 작가들과 국민들, 또 세계 여러 나라의 독자들도 보았다. 나중에는 ‘수상에게 이런 책을 권해주세요’ 하는 의뢰가 쇄도했을 만큼 유명해졌다고도 한다.

 

 

 

책을 읽지 않는 각하에게 돌직구로 책들을 투척한 얀 마텔의 발상과 실천에서, 이미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른 한 중년 남자의 문학에 대한 고집스럽고 별스러운 사랑, 거침없는 강단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을 ‘나무늘보’에 비유하며 가지에 매달려 책을 읽는 모습을 묘사해놓은 글에서는 정말이지 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감각적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파이가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사랑하게 된 순간(!), 잡아먹히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믿었던 순간(!)에 내 속에서 피어났던 짜릿한 감정처럼 특별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러니까, 책을 안 읽을 수 없어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파이 이야기』에서 나와 비슷한 등장인물이 있다면, 파이가 아니라 나무늘보이다. 나에게 좋은 책이란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와도 같다. 나는 지칠 때까지 책을 읽은 후에야 배가 불러 잠자리에 든다. (...) 열대성 폭우가 쏟아지는 푸른 정글 한가운데, 나무늘보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귀가 먹먹해지는 폭우에도 나무늘보는 개의치 않는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빗물에 만물은 다시 소생하고 동물들도 폭우를 고맙게 생각한다. 그 와중에 나무늘보는 책을 가슴에 품고 빗물에 젖지 않도록 보호한다. 나무늘보는 한 단락을 겨우 읽었다. 마음에 든다. 그래서 나무늘보는 그 단락을 다시 읽는다. 나무늘보는 그 단락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떠올린다. 나무늘보는 그 이미지를 되새긴다. 아름다운 이미지다. 나무늘보는 주변을 둘러본다. 나무늘보는 아주 높은 가지에 매달려 있어서, 정글의 아름다운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빗줄기 사이로 다른 나뭇가지들에 맺힌 밝은 점들이 보인다. 예쁜 새들이다. 아래에서는 화난 재규어가 앞만 쳐다보며 맹렬하게 달리지만, 나무늘보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자족의 한숨을 내쉬며 나무늘보는 온 정글이 자신과 함께 호흡한다고 생각한다. 폭우는 여전히 계속된다. 나무늘보는 느긋하게 잠든다. (39쪽)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처럼 책의 줄거리가 상세하게 소개되지 않아도,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처럼 독서를 둘러싼 온갖 지식과 역사가 없어도, 이 책은 풍자와 유머와 되새겨볼 의미로 가득한 특별한 책의 책이다. 그가 권하는 책을 다 읽지 않으면 어떠랴. 얀 마텔이 진정으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한 권 한 권을 읽었느냐 안 읽었느냐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왜 읽어야 하는지, 문학을 읽지 않으면 세상과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래도 안 읽는다면 “세상을 명철하게 바라볼 수” 없을 것이고, “상상력이 죽어”버릴 것이고, “삶의 진정함 공감도” 느끼지 못하며 살 수밖에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무수한 문학작품을 자양분 삼아 특별한 성공을 거두었고, 앞으로도 독서의 힘으로 한층 더 충실하게 삶을 개척할 탐구자이자 모험자인 작가 얀 마텔이 이제 우리에게 묻는다. 자, 이래도 문학을 읽지 않겠습니까?

 


* 담아두고 싶은 구절들:

 

삶은 조용한 것이다. 정신없이 달리는 건 우리뿐이다. (26쪽)

 

 

시의 경이로움은 질문처럼 짧지만 대답처럼 강력하다는 데 있습니다. (81쪽)

 

 

책은 요정이 들어 있는 병입니다. 책을 문지르고 열면, 우리 마음을 빼앗는 요정이 뛰쳐나옵니다. 요정이 있는 병을 갖고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정말 흥분되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그런 병들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병을 문지르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187쪽)

 

 

일과 가족과 성격이 낯선 곳을 찾아가는 기회를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책이 필요합니다. 적절한 책을 선택해서 읽는다면 거친 산야와 싸워야 하는 배낭여행족만큼이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210쪽)

 

 

누구도 파괴할 목적에서만 열심히 일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뭔가를 새롭게 건설해내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이야기가 잔혹하고 서글픈 사건들로 채워지더라도 그 이야기의 효과는 언제나 정반대의 것입니다. 따라서 즐거운 이야기는 즐거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잔혹한 이야기는 반어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동정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잔혹행위를 거부하게 되니까요. (213쪽)

 

 

지금 수상님의 손에 쥐어진 책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어서 그 책에 어떤 가격을 매긴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짓이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강조하려는 뜻에서 저는 수상님에게 사 달러 오십 센트를 청구할 생각입니다. (225쪽)

 

 

결말이 무척 흥미롭긴 하지만 한결같이 비극적입니다. 여기에서 삶의 지혜가 얻어집니다. ‘독자+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이야기=더 현명해진 독자’라는 수학 방정식과 비슷하다고 하면 아시겠습니까. (226쪽)

 

 

문학의 세계에서 모든 독자는 평등합니다. 다른 소매점과 달리, 서점은 고가품과 저가품을 실질적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서점은 그냥 서점입니다. 독자의 계급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서점에서는 누구나 환영받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학식이 높은 사람과 독학하는 사람,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 진취적인 사람과 보수적인 사람 등 모두가 똑같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도 서점에서 여왕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271쪽)

 

 

제가 좋아하지 않는 책을 수상님께 보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가지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책까지 폭넓게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폭넓게 읽어야 독학자가 흔히 빠지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독학자는 자신의 한계에 맞는 책들을 주로 선택해서 그 한계를 굳혀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285쪽)

 

 

예술은 다른 현실, 다른 세계, 다른 선택을 우리에게 더 명확하고, 더 밝게 더 가까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미경인 동시에 망원경입니다. 예술은 현실이 잉태되는 풍요로운 꿈입니다. (396쪽)

 

 

고유한 목소리가 있다면 문학이 있는 것이고, 없다면 문학도 없는 것입니다. (482쪽)

 

 

수상님을 위해 책을 선정하고, 그 책을 읽거나 다시 읽으며 그 책에 대해 생각하고 거기에 걸맞은 편지를 쓰는 일, 또 그 편지의 번역을 제 부모님께 부탁하고 그 번역에 대해 두 분과 의논하는 과정, 책의 겉표지를 스캔하고 영어와 프랑스어 편지들을 관련된 웹사이트에 업로드하는 작업, 끝으로 격주로 월요일에 정확히 수상님께 도착하도록 책과 편지를 부치는 일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연적으로 들어갑니다. 수상님께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이 과정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5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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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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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두 번 읽었지만 다시 읽고 싶다. 후에 나온 천사의 게임도 좋았지만, 역시나 바람의 그림자가 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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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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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극찬까지 받았던 영화 <더 리더>의 원작소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책을 좋아하고 아직 사랑에 대해 희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문장만 보아도, 이 책과 사랑에 빠질지 모른다. 

그러나 소설은, 에로틱한 전면만 보고는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건조한 문체, 담담함으로 진하게 독자의 심기를 타다다닥 건드리는 독일문학을, 좋아한다.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같이 신랄하고 독하게 인간에 대해, 그리고 그가 가지는 광기에 대해 폭격을 퍼붓는 독일문학을, 좋아한다.  

죽어버린 욕망과 아직 남은 무엇,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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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특별판 - 전10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김만중 외 지음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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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장르에서 이름이 난 유명 아트디자이너들이 책을 디자인한다면?  

그것도 한 번도 책을 만들어보지 않은 디자이너들이라면?  

민음사의 단정했던 세계문학전집에서... 엄선한 열 권으로 만든 디자인판 세트가 나왔다.  

대부분 한 번도 책을 만들지 않았던 디자이너들이 대거 참여하여 각자 만들고 싶은 대로 자신의 장르 역량을 발휘하여 작업했다고 하니, 너무 궁금해진다. 참여한 디자이너들 이름을 쭉 보니 입이 딱 벌어진다. 특히 요즘 같은 비주얼 시대에는 텍스트뿐 아니라 시각을 자극하는 장정이 때론 텍스트보다 우선하는 현상도 벌어진다. 왠지 포장이 멋지면 안의 것도 멋지리라는 기대..가 아닐까. 그동안 단정하게 텍스트의 힘으로 유명해진 시리즈라서 그런지, 이번 200권 기념 디자인판이 새롭게 느껴진다. 아, 선물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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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ja-vu79 2009-01-22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시장이 참 지루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시도 자체 참 신선해요
한정판이라니 소장가치는 분명 있을 꺼 같아요..

비로그인 2009-01-22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작년에 영국 펭귄 출판사에서도 비슷한 기획이 있었어요. 펭귄 클래식 출간 60주년 기념으로 마놀로 블라닉을 비롯한 유명 디자이너 5명에게 장정을 의뢰해 제작했던 건데요...북디자인에 관심 많은 사람들이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나름 소장 가치가 있는 거 같아요. 가격은 쫌 부담되기도 하지만,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기획인 만큼 기대가 많이 됩니다. 10권의 판형이 제각각인 것도 파격적이고...신선하네요.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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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은 불타는 도시다. 새벽이 긴 도시다. 도시는 푸른색 어스름에 잠겼고, 사람들은 불타고 사라져가는 것들은 조용히 바라본다. 그 아름다우나 낡은 도시, 그 화려하나 가난한 도시에 가고 싶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귀족같이 풍요롭게 살아온 오르한 파묵도 이스탄불이란 도시에 깊게 밴 체념의 정서, 이 도시가 가진 침울의 정서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관광지로서의 이스탄불이 아니라, 탄식과 한숨 속에  우뚝 선 유럽의 동방같은 도시, 이스탄불을 가깝게 느끼게 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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