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고문 고시원: 괜찮아, 곧 지나갈거야>

 

루사는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의 끝자락, 노망난 노인네처럼 햇살이 시름시름 비치던 8월의 마지막 날 한국에 상륙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제주도가 먼저였고, 그 다음은 전라남도였다. 루사는 눈 먼 안마사처럼 느리게 한반도를 관통했다. 최대 순간 풍속은 초당 삼십구 점 칠 미터, 중심 최저 기압은 구백칠십 헥토파스칼이었다. 루사의 지압이 가장 깊게 들어간 강릉은 여태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던 전남 장흥을 가뿐히 제치고 하루 최고 강수량 지역에 등극했다. 팔백칠십 점 오 미터. 그야말로 하늘이 뚫렸다 하겠다.
방송사에는 재해특보반이 조직되었다. 기자들은 카메라맨을 대동하고 비가 쏟아 붓거나 바람이 널을 뛰는 지역을 찾아 뛰어다녔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비와 바람이 동시에 불어 닥쳤다. 기자들의 우산은 종종 하늘로 날아가 버렸고, 물에 젖은 그네들의 머리카락은 본드로 붙인 것 마냥 볼썽사납게 이마에 달라붙었다.
“쟤네들은 일부러 저러는 건 가봐?”
고문 고시원의 초대 사장이자 원장이자 총무였던 양반의 아내가 뉴스를 보면서 말했다. 보는 사람 마음마저 어지럽게 만드는 파마는 여전했지만 찐 고구마를 후후 부는 입가에는 어느덧 팔자 주름이 선명했다.
“저렇게 불쌍하게 보여야 열심히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비옷이라도 입으면 누가 잡아간데?”
그녀가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조용히 좀 해. 이 여편네야.”
남자는 아내에게 퉁을 준 뒤 텔레비전 앞으로 바싹 당겨 앉았다. 네모난 상자 안에 펼쳐진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쓰레기가 둥둥 뜬 채로 미친 듯이 흘러가는 흙빛 개천, 엄청난 바람에 허리가 휘어가는 가로수, 황량한 상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고시원 간판…….
“어라? 우리 동네네?”
여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자가 창가로 달려갔다.
“…… 현재 이곳은 개천이 무섭게 불어나 범람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저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인근의 초등학교로 대피한 상태입니다. 한편 바람이 점점 강해지면서 유리창이나 지붕이…….”
변두리 동네에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개천이 있었다. 그 개천도 그럴싸한 이름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종종 ‘똥천’으로 불렀다. 물은 사시사철 더러웠고 냄새 또한 심했다.
“신기하다. 똥천이야, 똥천. 저 기자 뒤쪽에 보이는 간판이 우리 고시원 맞지?”
아내의 호들갑을 듣는 둥 마는 둥 창밖만 바라보던 남자가 갑자기 밖으로 몸을 쑥 내밀고는 소리쳤다.
“테레비에 나 나오는 가 봐봐. 지금 밖에 방송차가 와 있어.”
“정말요? 어디? 어디?”
“이 여편네가! 아 이쪽으로 오면 어떻게 해? 뉴스를 보라니까.”
여자가 텔레비전을 향해 막 돌아섰을 그때였다. 갑자기 돌풍이 몰아치더니 ‘공문 고시원’이라 적힌 간판이 뻐걱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람이 달리는 정도였다가 이내 뿔난 망아지처럼 덜그럭거렸다.
“어, 어어.”
남자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눈앞에 있는 간판을 바라만 봤다. 이마는 비에 젖어 번들거렸고,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기운찬 무당처럼 펄쩍펄쩍 춤을 췄다.
“여보. 나온다. 나와. 지금 텔레비전에…….”
우지직.
기쁨에 찬 여자의 외침은 요란한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공’자 밑에 붙어 있던 ‘이응’이 뜯겨 나간 것이다.
이응은 바람에 날려 하늘로 올라갔다. 마법의 양탄자처럼, 마녀의 빗자루처럼, 정체불명의 유에프오처럼 그렇게.
“아! 지금 무언가가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기자의 격양된 목소리가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왔다.
남자는 방송국 카메라를 지나, 똥천을 넘어,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는 이응을 멍하니 바라봤다. 한 글자의 어엿한 받침이었던 이응을 앗아간 하늘이 우르르 쾅 혼자서 큰 소리를 쳤다.
“지금 텔레비전에 여보 나온다니까.”
어느새 남자 옆으로 다가 온 여자가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모자란 여편네…….”
남자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공문 고시원’은 그렇게 ‘고문 고시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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