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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시체가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있다, 정말로!
때는 바야흐로 일천구백구십이 년 하고도 어느 여름 날, 초등학교 6학년의 여름 방학이 막 끝날 무렵이었다. 그때 내가 살던 마을에서는 해마다 여름이면 잔치를 벌였다. 개도 잡고 돼지도 잡고, 술도 몇 십 박스나 비우고, 마을 회관에서 거하게 노래판도 벌이는 그야말로 흥겨운 축제였다.
축제 전야로 기억한다. 나와 내 친구 놈은 며칠 남지 않은 방학을 아쉬워하며 한나절 진탕 멱을 감은 후 어둑해서야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골목 어귀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흉가’로 향했다. 흉가는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불리는 이름이었고, 사실은 주인이 도시로 떠나버려 집만 덩그러니 남은 폐가였다. 창호지 문에 숭숭 구멍이 뚫려 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한 그 집은 초등학생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들은 그 앞을 지날 때면 호기심에 사로잡혀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발걸음은 빨라지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매번 겪어야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때까지 수다를 떨던 입도 꾹 다문 채 그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내 친구가 말했다.
“야. 저, 저거 시체 아냐?”
친구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과연 시체라 부를만한 것이 마당 한 구석에 떡하니 누워 있었다. 밤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시체 주위로 핏물이 고여 있는 듯도 했다. 숨이 턱 막히고 다리가 후들거린 건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머릿속에는 도망가야 된다는 생각이 가득했는데, 이상하게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친구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우리 둘은 한 쌍의 변태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 ‘시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건 바로 다음 순간 일어난 일이 던져 준 공포에 비하면 개미 발톱 수준이었다.
다음 순간, 그러니까 공포를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발가락을 꼼지락거린 순간, 시체가 꿈틀 거렸다. 그러더니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날, 축제 전야라 마을 전체가 이상한 흥분에 휩싸여 흥청망청 했던 그 밤에 우리 마을에는 두 소년의 길고 처절한 비명이 스테레오로 울려 퍼졌다.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은 흥미로운 제목과 파격적인 설정과 달리 소위 말하는 본격물이다. 미스터리 마니아들이 정의하는 본격물이란 공정한 트릭과 그 트릭을 파헤치는 추리의 과정이 들어있는 소설인데, 시체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산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세상에서 펼쳐지는 연쇄살인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며 책을 펼쳐 들었다. 게다가 일본 작가가 미국을 배경으로 썼다니.
소설은 공포 소설의 분위기를 풍기는 프롤로그부터 무척 인상적이다. 아내의 도끼 만행에 이미 죽은 남자가 벌떡 일어나 도망을 간다니……. 그런데 이 프롤로그 부분을 주위 깊게 읽으면 이 소설이 지향하는 바, 그러니까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놓으리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네빌 경감은 사뭇 진지하게 행동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고, 시체가 일어나는 상황도 왠지 모르게 코믹하다. 그리고 도망치는 시체를 보고 던지는 이웃 노파의 한 마디, “부부 싸움도 적당히 해야제. 당신 남편 괜찮은 거여? 꼬락서니가 영락없는 시체처럼 허연 얼굴로 도망치던디”에 까지 이르면 이 소설의 정체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다.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은 심각하거나 골치 아픈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블랙 코미디라 느껴질 정도로 시니컬한 농담이 난무하는 매우 유쾌한 소설이다. 작품 중반부터 등장하는 트레이시 경감이 펼치는 몸개그는 그야말로 폭소를 자아내게 한다. 살아난 시체들의 반응도 웃기기는 마찬가지다. 시체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잘도 살아나고, 또 시체 주제에 그럴싸한 농담도 곧잘 한다. 진지한 건, 아마도 이 책의 끝에는 이 모든 상황을 뒤집을 어마어마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두 눈 부릅뜨고 책을 읽어나가는 독자들밖에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이 예상 밖의 웃음 코드는 소설 전체에서 아주 효과적인 작용을 한다. 소설은 육백 쪽이 훌쩍 넘는 분량 내내 생과 사, 그리고 장례문화 등에 대해서 집요할 정도로 자세히 묘사하고 설명한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이러한 부분은 사실 이 글의 마지막에 밝혀지는 사건의 내막을 더욱 비극적이고 상징적으로 만드는 장치가 된다. 물론 독자들이 꼼꼼하게 읽어나갔을 때의 이야긴데, 작가는 웃음과 농담을 통해서 장황한 설명을 쉽게 읽을 수 있게끔 만든다. 즉, 블랙 코미디의 감성이 짙은 농담과 코믹한 설정은 이 작품을 독자가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완충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농담과 해학은 시체가 일어난다는 있을 법하지 않은 설정을 ‘용인’할 수 있게 만든다.
작품의 대단원은 그야말로 본격물 그대로다. 모든 등장인물이 한 자리에 모이고 주인공, 여기서는 시체이지만, 그린이 멋지게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트릭 또한 기발하고 재미있다. 작가는 기괴한 설정을 해 놓고, 그 설정을 십분 활용하여 독자를 감탄하게 만드는 트릭을 생각해 냈다. 읽는 내내 즐거웠고 흥미진진했다.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책에서 손을 떼기가 힘들었다. 트레이시 경감 캐릭터는 무척 사랑스러워서 다른 작품에서도 만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작가가 집요하게 쌓아올린 생과 사의 진정한 의미가 작품의 마지막을 더욱 묵직하게 만든다. 제목마저 기괴했던 이 작품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은 본격물의 영역을 넓혔다는 점에서도, 재미를 획득했다는 점에서도, 그리고 그 속에 성찰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겼다는 점에서도 성공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날 우리가 봤던 건 시체가 아니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시체라기보다는 시체가 되기 일보직전의 상태였고, 그 대상 또한 인간이 아니라 돼지였다. 다음 날 쓰려고 망치로 머리를 부순 돼지를 그 폐가 앞마당에 묶어 놓았던 것이다. 그걸 알 리 없는 우리들은 사경을 헤매는 돼지가 ‘시체’일 거라 짐작을 해 버린 것이다.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오래전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날 우리가 어둠과 공포가 절묘하게 맞물린 가운데 돼지를 시체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처럼, 이 책도 세밀한 상황 묘사와 치밀한 설정이 더해져 시체가 살아나는 이상한 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죽어버린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세상, 그리하여 더 이상 살인이 의미 없어진 세상, 죽은 사람이 누가 범인인지 직접 지목할 수 있는 세상에서 펼쳐지는 연쇄살인과 그 기상천외한 해결법이 궁금하신 분은 망설이지 말고 이 책을 집어 들기 바란다.
즐거운 ‘오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