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김열규 외 지음, 김병훈 사진 / 눈빛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사진 이미지에서 실재성의 효과는 우선 사진과 그 지시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닮음에 빚지고 있다. 원래 사진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눈에 의해 실재의 객관적 아날로공analogon으로만 지각된다. 사진은 근본적으로 모방이다.


- 사진적 행위 L'acte photographique, Philippe Dubois, 이경률 역, 마실가 2004, p.26.

 
   

사진찍는 것에 관심있다고 말을 하는 경우 종종 받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을 주로 찍느냐라는 것이다. 사실 질문은 굉장히 간단한 것이지만, 막상 대답을 할라치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적잖게 망설여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딱히 무엇을 찍어야겠다고 정해놓고 찍는 것이 아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남기는 것이 대부분이기에 더더욱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다.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순간을 이차원 평면위에 고스란히 기록하는 것은 사진이 가지는 가장 일차원적인 존재 이유가 아닐까싶다. 현재의 순간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여러가지로 노력한 결과물이 바로 사진이니 말이다. 기록을 위해 사진을 찍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도 의미있지만, 과거의 한 순간을 인화지 혹은 저장매체 상에 반영구적으로 고정시킬 수 있다는 것에서 더 큰 매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사진으로나마 시간의 한 순간을 소유할 수 있다는 신의 영역을 살짝 비집고 들어가는 만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수년동안 잘 찍지도 못하는 사진을 찍어오면서, 남겨진 사진들을 보면 결국 나중에 애착을 가지고 보게 되는 사진이 어렵지 않게 정해지는 경험을 하곤 했다. 그런 사진들은 대개의 경우 구도가 잘 잡혀있고, 조형적인 미도 어느 정도 녹아있으며, 멋들어진 빛의 강약이 녹아있는 사진들이 아니었다.  구도가 틀어져있는 경우도 있고, 조형미라곤 찾아볼수도 없으며, 명암의 균형이 깨져있는 사진들이지만 일상의 따스한 순간, 자연스러운 순간이 그대로 녹아있는 사진들이었다. 사진 속의 상황과 인물들을 통해서 '아, 이때는 이랬지'라는 아련한 기억의 뭉치들이 스물스물 솟아나는 경험은 과거의 한 순간에 내가 셔터를 눌렀다는 것에 대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충분한 필요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일상의 순간을 담은 스냅 사진들이 찍어온 사진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와더불어 항상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게되는 타인의 사진 역시 일상의 평범한 순간을 있는 그대로 담아놓은 사진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몇 해 전 우연히 구입하게 된 한권의 책은 일상의 기록이 주는 기쁨을 느끼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책이었다. 

'잃어버린 것들에 관하여' --- 지난 2002년부터 2년간 월간 지오(GEO)에 실렸던 여덟편의 글과 사진을 모아놓은 이 책은 우리네 삶 속에서 어느새 잊혀가고 있던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흑백 사진과 함께 잔잔한 글로써 그려놓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책 속에 그려져 있는 일상의 공간과 시간의 대부분이 우리의 삶의 기억 속 한켠에 녹아있는 순간들과 대부분 일치하거나 유사하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책 속에 실려있는 사진들과 글들은 더더욱 잊혀졌던 과거의 한 시점을 소중하고 따스하게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나지막한 담장, 고만고만한 높이의 낮은 집들이 땅 가까이, 하늘 가까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끝없이 이어진 좁고 긴 골목에는 늘 분주한 사람살이가 넉넉히 담기곤 했습니다. 모퉁이를 돌아 조금 넓다싶은 길가, 최고의 놀이터였던 구멍 가게 앞에는 아이들이 조막만한 머리를 맞대고 군침을 삼키거나 호기심 어린 눈알을 굴리며 주인 아저씨의 지청구에도 끄덕 않고 들추고 만지다가 슬쩍 제 주머니에 넣고는 줄행랑을 치기도 했지요. 일요일이면 대중목욕탕이나 이발소 앞에서 엄마, 아빠와 실갱이를 벌이는 아이들을 보는 일이 흔했습니다. 폼나는 장난감 하나 없이도, 흘 한 줌, 돌멩이 하나,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만으로도 아이들은 늘 차고넘칠 만큼의 놀이거리를 만들어냈고, 너나할 것 없이 형제, 자매처럼 얽혀, 눈 빛 맞으며 흙과 바람 속에서 청년으로, 어른으로 훌쩍 커 갔습니다.

이제는 시간 속에 묻혀 버린 풍경들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로 치자면 지금의 삶에 비해 절대적으로 빈곤했으나, 그 시절은 물질이 아닌 다른 수 많은 것들이 넘쳐나던 때였지요. 자연은 이치대로 순환했고, 사람들 또한 자연을 경외할 줄 알았습니다. 세상을 순환시키는 원리는 변하지 않았으나, 그 순환의 중심이 바뀌어버린 지금, 실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김열규 외, 눈빛 2004, p. 5-6.

 
   

분주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탓에 일상의 소중함을 잠시나마 잊은 이가 있다면,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살아있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현재의 삶 속에서, 그리고 미래의 다가올 삶 속에서 과연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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