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노래는 이미 아침달 시집 27
홍인혜 지음 / 아침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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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끈기 있게 끝까지 눈에 담고 흡수하는 게 난 아직 어렵다. 그런데 이 시집은 읽는 내내 문장 하나하나, 이미지 하나하나에 자꾸 눈길이 붙들려 끌려갔다. 적당히 이해하겠는 영역과 상당히 아리송한 영역 사이에 펼쳐진 시들이 신선한 놀라움과 즐거움을 준다. 시 읽는 재미가 이런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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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의 마음 - 나를 잃지 않으면서 꾸준히 일하는 법에 대하여
이다혜 지음 / 빅피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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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내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주는 이다혜 작가.
일을 지속하며 품게 되는 고민을 담담하면서도 단단하게 풀어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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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 바이 미 - 스티븐 킹의 사계 가을.겨울 밀리언셀러 클럽 2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황금가지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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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유년 시절은 비릿한 피맛의 기억이다. 따스하고 몽글몽글한 촉감으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컨텐츠들은 보편적인 안온함을 주긴 하지만, 뭔가 저건 내 것이 아닌데, 하는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를 몇 살 먹지 않았던 때의 나는 사회성을 기르고 단체 생활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데 애먹었던 시간이 꽤나 길었던 타입이었던 데다- 지금까지 강렬하게 남아 있는 예닐곱 살 때의 기억이란 게 피도 눈물도 없이는 떠올릴 수 없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사촌 언니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서 팔랑팔랑 뛰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 위에 볼록 솟아 있던 거대한 쇠덮개(이렇게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내 비루한 기억력과 상상력에 애도를. 이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에 그만 발이 걸려 넘어져서는 그대로 턱이 그 쇠덮개에 텅, 부딪혔었고... 그 순간 정말 머릿속이 텅 비었었던 것 같고... 조각조각 이어지는 기억 속 장면들은 입 속에 피가 고인 채 엉엉 울고 있는 나, 이가 빠졌었는지 어쨌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뭘 제대로 먹지 못하고 멀건 미음 같은 걸 어렵게 삼켜야 했던 나. 어이없게도, 날 그렇게 뛰게 했던 사촌 언니는 그날의 기억 속에 아예 없는데 나와 함께 팔랑거렸던 옷은 아직도 뚜렷이 생각난다. 분홍빛 주름 원피스였다. 그날 확실히 뛸 맛은 났겠네.

 

스티븐 킹. 공포 소설로 너무나도 유명하고 영화화된 작품도 매우 많지만, 그의 저서는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어본 게 전부이고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샤이닝><그린 마일>을 본 것이 끝인 나에게 (팬분들께는 매우 죄송하지만) 그의 이름 자체가 엄청난 무게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스탠 바이 미>라는 책을 산 것도 그의 이름보다는 오히려 영화와 노래의 힘이 더 컸을 것이다. 영화화되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붐, , 부붐, 하고 쉭쉭 두근거리며 시작하다가 웬 더 나잇~!’ 하고 Ben E.King이 경쾌하게 불러제끼는 도입부의 노래를 꽤나 좋아했으니까.

 

아주 간추려 말하자면 <스탠 바이 미>는 천방지축 낄낄대며 여름날을 지내던 네 소년이 시체를 찾아 나섰다가 생고생하며 먼 곳까지 다녀오는 모험담이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내가 유년 시절을 돌이켜볼 때 느껴지는 아릿한 피맛이 있다. 어떤 일에 단순하게 흥분하고 팔짝거렸다가 대가를 치르게 되는 어린 날의 흔한 실패, 그 과정에서 터지는 피와 아픔, 그리고 당시에는 정체를 확실히 알지 못했던 감정이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아, 하고 깨닫게 되는 허전함과 알싸함. 그것은 날고기의 피맛이다. 아직 채 익혀지지 않은 시절의 맛.

 

작품 속 네 소년들 중 화자이자 주인공 격인 인물은 고디이지만, 마음 속에 깊은 잔상을 남기는 인물은 크리스이다. 크리스는 고든이 자신들과는 다르게 대학 진학반에 들어가 똑똑한 친구들을 만날 것이고, 재능을 살려 소설을 쓴다면 주변 사람들이 이해해줄 세계에 진입하게 될 거라고 말하지만 고든이 관심을 보이지 않고 퉁명스럽게 응대하자 벌컥 화를 낸다.

 

네가 쓰는 소설들은 너한테만 중요한 거야, 고디. 우리가 헤어지는 게 싫다고 해서 계속 우리와 어울려 다니면 결국 너도 똑같은 얼간이가 될 거야. 우리와 함께 다니면서 C학점이나 받게 될 거라고. 고등학교에 가서도 똑같은 취업반 수업을 하면서 다른 얼간이들처럼 지우개나 던지고 딸딸이나 치겠지. 그러다가 걸핏하면 벌을 받고, 심하면 정학까지 맞겠지. 그렇게 얼마쯤 지나면 빨리 차 한 대 사서 어느 잡년을 데리고 춤추러 가거나 술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못할 거야. 그러다가 그 년이 덜컥 임신해 버리면 넌 결국 오번에 있는 구두 가게나 공장 같은 데 취직하거나 힐크레스트에서 닭털이나 뽑으면서 평생을 보내겠지. 그렇게 되면 그 파이 먹기 얘기는 영원히 못 쓰게 될 거야. 아무것도 못 쓸 거라고. 너도 대가리에 똥만 가득 찬 얼간이가 될 테니까.”

 

고든에게 이렇게 쏘아붙이고 있었을 크리스의 눈을 상상해 본다. 더 나아질 수 있음에도 주저앉아 버리려 하는 친구에게 화가 난 열두 살 소년의 눈. 그리고 또 상상해 본다. 넌 우리와는 달라, 재능이 있어, 하고 친구의 등을 밀어줌과 동시에, 자신도 이 진창을 박차버리고 싶지만 아마 이 동네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씁쓸하게 읊조리는 소년의 옆모습을. 앞날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작은 희망을 품어보면서도,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잘 알고 있기에 미래를 향한 불안을 떨칠 수 없는 소년의 그늘을.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지는 얼굴이다.

 

유년 시절의 한때를 즐겁게 회상하다가도 결국은 무겁게 가라앉는 지점에 도달해버리고 마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 시간과 모든 관계가 지속되리라고 믿었기에, 혹은 무엇이든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기에, 아니면 어떤 것이 이루어질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함부로 생각하고 말해버릴 수 있었던 많은 것들. 훌쩍 나이를 먹은 내가 다시 더듬어 보면 어떤 것은 너무나 예견한 대로 이루어져서, 어떤 것은 너무나 기막히게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가슴을 저민다. 그럴 때 아리다고 말하면 더 아파져서 차라리 담담해지는 방법을 쓰는 사람 또한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최소한 여기 스티븐 킹 또한 그렇다.

 

*) <스탠 바이 미>는 중편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책 한 권 분량에 맞먹는 스탠 바이 미와 단편 호흡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호흡법을 읽고 나니 아 이거 스티븐 킹이 쓴 거였지...’ 하고 새삼 생각하게 됐다. 서늘하고 헉스러운 이야기. 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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