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황홀 - 김도언 문학일기
김도언 지음 / 멜론 / 2010년 8월
절판


나, 목적없는 비밀을 갖고 싶었지. 그것은,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죽어가는 나무의 가지를 한번 쯤 손으로 받쳐주는 일이거나 햇볕 쨍쨍한 길가에 나온 달팽이를 음지의 이끼 위에 놓아주는 일처럼 근사한 일은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대체적으로 비밀은 음습하고 비루한 것이거든.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비밀을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는지 아니? 그것은, 견딜 수 없도록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비밀은 자신에게 드리는 예배 같은 것이거든.-123쪽

나는 다행히, 내가 간절해지는 대상을 갖지 않아도 제법 시간을 산뜻하게 보낼줄 알게 된 이후부터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됐어, 거기까지만, 거기까지만 오면 되는 거야. 나는 이런 말을 마음만 먹으면 이제 아무렇지 않게 할 줄 안다. 술에 취하면 간혹 나 자신이 측은해지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뭐 그것도 그런 대로 견딜 만 하다. 모든 명예와 모든 치욕은 나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좋은 것이다.-126쪽

냉소가 아름답거나 혹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은 냉소가 대상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 거리감으로부터 견인되는 냉소는 진실할 가능성이 현저하다. 사람들은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지각하는 순간 안도한다. 강 건너에서 피어오르는 불이, 옥상에서 바라보는 홍수가 아름다운 건 단연 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그 안정적인 거리를 그 자신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불과 홍수를 바라보며 짓는 미소는 진실한 냉소는 아니다. 어떤 맥락에서 냉소는 '집착'의 가장 적극적인 대립항이라고도 할 수 있다. 냉소는 주체인 내가 대상 혹은 타자에 포섭당하지 않았다는 자각으로부터 오는 쾌감의 반응인 동시에 대상에 회유당하지 않았다는 자기애의 무인칭적 표현이다. 냉소가 감미로운 이유는 삶의 주체로서 내가 독자적인 사유 속에 존재하면서 현실의 요구에 비겁하게 반응하지 않았다는 자긍을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이다. 냉소가 아름답다면 그 냉소는 진실한 것이며, 냉소가 진실하다면 그 냉소는 아름다운 것이다-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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