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 무렵의 나는 애초부터 여자애들에게서 연애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무엇에 잡혀 있었던 것일까. 어머니에게 사로잡혀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는 자신의 또다른 존재에 몰두해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내 몸 근처의 한 걸음 뒤에 따로 떨어져서 나를 의식하고 관찰하고 경멸하거나 부추겼다. 나는 그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안과 바깥이라는 불완전한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누구인가-198쪽
나는 미아와 헤어져 집에 돌아온 이튿날부터 그녀가 보고 싶었다.무미건조하던 내 어느 은밀한 곳에 금이 가거나 구멍이 뚫린것 같은 느낌이었다. 배에서 명치 끝까지 이상하게 불안한 안달이 퍼져 있었다. 그것은 물을 채운 컵을 들고 조심스레 걸을 때에 느끼던 그런 가벼운 불안이었다-239쪽
우리는 병째로 들고 꿀꺽이며 소주를 넘기고 오징어를 초장에 찍어 우물우물 씹었다. 그제서야 일 끝난 뒤의 나른한 피로가 기분 좋게 어깨와 장딴지로 퍼져갔다. 목마르고 굶주린 자의 식사처럼 맛있고 매순간이 소중한 그런 삶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내가 길에 나설때마다 늘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2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