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좌파 : 세 번째 이야기
김규항 지음 / 리더스하우스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김규항의 한겨레칼럼으로 촉발된 김규항,진중권 논쟁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자. 
김규항 한겨레 칼럼.

[  


야!한국사회] 오류와 희망 / 김규항 

진보신당의 지방선거 결과는 참담하다. 노회찬씨가 3% 남짓의 표를 얻고 심상정씨는 아예 선거 직전 사퇴했다. 두 사람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했지만 이번보다는 나았다. 진보신당의 사정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대체 왜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대중성 강박으로 인한 ‘프레임 오류’에 있다고 본다. 물론 모든 정치는 대중성이 중요하며 분당을 통해 만들어진 진보신당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진보신당의 대중성은 진보정당으로서 최소한의 정체성을 지키는 한도 안에서만 중요하다. 그걸 넘어서버리면, 다시 말해서 당장의 대중적 호응에 집착해 자유주의적 의제에 몰입해버리면 대중들은 ‘굳이 진보신당을 지지할 이유’를 잃게 된다.
한나라당 같은 극우정당 혹은 민주당·국민참여당 같은 자유주의 정당은 애써 그 정체성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두 세력은 이미 반세기 이상 독재/반독재 혹은 여야로 존재해왔고 대중들은 어쨌거나 그 정체성에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진보신당은 그 정체성을 대중에게 처음부터 설명해야 한다. 자신들의 정치가 기존의 반독재/민주세력과 어떻게 다른지를, 굳이 자유주의 정치가 아니라 진보정치여야 하는 이유를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기존의 구도가 몸에 밴 대중들은 당선 가능성도 적은 그들을 굳이 지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좋은 뜻에서든 나쁜 뜻에서든 많은 사람들은 완주한 노회찬씨는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켰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노회찬씨 역시 제 정체성을 지켰다고 하긴 어렵다. 이를테면 선거 직전에 열린 그의 인터넷 토론은 시종 오세훈 조롱 경연으로 일관했다. 오세훈을 막는 게 그리 전적으로 중요하다면 당연히 한명숙을 찍어야 한다는 말 아닌가?

그 토론은 ‘한명숙이 아니라 굳이 노회찬이어야 하는 이유’에 집중되어야 했다. “반이명박 반이명박 하는데 당신들 집권했을 때 서민과 노동자 입장에서 이명박과 뭐 그리 달랐습니까?” “부자정권 비판하는 당신들은 삼성공화국 만들지 않았습니까?” “새만금 삽질한 사람들이 4대강 삽질 욕해도 되는 겁니까?” 등등으로 말이다.

그 에피소드는 대중성 강박에 빠진 진보신당이 보여온 무수한 프레임 오류 가운데 한 예일 뿐이다. 심지어 진보신당은 진중권씨를 비롯한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전진’ 같은 그룹을 마치 스탈린주의자들이라도 되는 양 마구잡이로 조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자유주의자들이 촛불광장에서 활약한 덕에 당원이 늘었다지만, 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은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2008년 11월 노무현씨가 “한-미 에프티에이 재협상을 준비할 때”라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자, 심상정씨가 “민초들이 노 전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건 이명박 정권에 대한 ‘재협상’ 훈수가 아닌 한-미 에프티에이 체결에 대한 고해성사”라는 글을 올리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노무현씨의 중단으로 논쟁이 끝까지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내가 기억하기론 진보신당 역사에서 그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또렷한, 아니 거의 유일한 사건이었다.

바로 그런 사건이, 극우와의 싸움뿐 아니라 자유주의자들과의 경쟁이 진보신당의 주요하고 일상적인 활동이 될 때 비로소 대중들이 ‘굳이 진보신당을 지지할 이유’가 생겨난다. 그렇게만 된다면 진보신당은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보신당엔 자유주의를 진보정치라 강변하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 사민주의적 전망으로 이 추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진지한 당원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이 한겨레 칼럼에 쓴 글은 자유주의자들과 확실한 구별을 통한 선명한 진보신당의 방향성찾기인거 같네요. 이책에 나오는 <조갑제와 강준만>이라는 글에서도 확실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위의글에서 노린 바로 그 자유주의자는 진중권이구요. 아래의 글은 김규항의 한겨레 글에 씨네21에 진중권이 반박한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진중권의  글>




진중권의 아이콘] 유물론적 신학에 관하여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 2010.07.23 
 
유토피아와 좌파 바바리맨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읽다가 ‘유물론적 신학’이라는 표현을 만났다. 신학과 유물론의 모순적 결합을 지젝은 이렇게 정당화한다. “데리다는 (…) 오늘날에는 오직 무신론자들만이 기도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수사법에 반하여 우리는 신학자들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유물론자라는 라캉의 주장이 가진 진리를 주장해야 한다.” 이 역설은 일상적인 것이다. 사실 돈의 전능을 인정하는 강남 부자 교회의 목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유물론자이며, 세상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믿는 좌파들이야말로 진정한 관념론자가 아닌가.

하지만 이 흥미로운 모순의 저작권은 사실 지젝이 아니라 발터 베냐민에게 돌아간다. 흔히 ‘역사철학테제’라 불리는 베냐민의 에세이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는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분분한 해석을 낳는 베냐민 특유의 알레고리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파울 클레의 그림과 함께 등장하는 우울한 역사의 천사, ‘앙겔루스 노부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또 아리송한 것이 바로 ‘역사철학테제’의 서두에 등장하는 자동인형의 알레고리다.

유토피아적 발상에 대한 역설
“널리 알려지기를 상대가 수를 두면 맞수를 두어 늘 승리하도록 만들어진 자동인형이 있었다. 터키 옷을 입고 입에 수연(水煙) 파이프를 문 인형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놓인 체스판 앞에 앉아 있다. 테이블은 거울 시스템을 이용하여 안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 안에 체스에 능한 등 굽은 난쟁이가 들어앉아 끈으로 인형의 손을 조정하고 있다. 철학에서도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사적 유물론’이라 부르는 인형은 늘 승리해야 한다. 그 누구와도 싸워서 이기려면 그것은 신학의 힘을 빌려야 하나 오늘날 신학은 왜소하고 추해져서 들여다보여서는 안된다.”

그 난쟁이의 이름을 베냐민은 ‘신학’이라 부른다. 그 누구와도 싸워 이기기 위해 과학적 유물론은 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단다. 이게 무슨 뜻일까? 지젝의 책에서 ‘유물론적 신학’이라는 표현과 마주치는 순간, 불현듯 내가 5, 6년 전에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던 글이 떠올랐다. 자기 인용을 통해 그리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 알레고리에서 등 굽은 난쟁이, 즉 ‘신학’은 곧 유토피아의 철학을 가리킨다. 유토피아적 발상이 없었다면 세상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것만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몇몇 몽상가의 유토피아가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만들어버린 경험을 갖고 있다. 여기서 유토피아는 있어야 하되, 동시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베냐민의 자동인형은 바로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리라. 즉 난쟁이(유토피아)는 실제로 작동해야 하나, 그의 작업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된다.

역사의 텔로스(telos), 즉 인류의 최종 목적이 되는 이상사회를 그려놓고 현실을 강제로 그리로 옮긴다는 발상은 시대착오다. 우리는 이미 ‘역사이후’(posthistoire)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토피아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가 현실로 누리는 것이 한때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상사회의 꿈은 존재해야 하되 동시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터키 인형이 되어 하는 말, 쓰는 글, 하는 행동은 유토피아의 열망에 조종되어야 하나, 그 꿈 자체는 난쟁이처럼 가려져 있어야 한다.

존재하면서 부재해야 하는 유토피아
과거의 유토피아는 완성태로 존재했다. 어떤 이들은 이 설계도를 그대로 현실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오늘날 ‘유토피아’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면서 부재해야 한다(데리다라면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면서’ 작동하는 이것을 ‘디페랑스’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가능한 현상이다. 가령 촉매를 생각해보라. 화학반응에서 촉매는 그 자체론 화학적 결합물에 들어가지 않으나 그것 없이는 화학반응이 일어날 수 없다. 유토피아는 촉매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내가 좌파 바바리맨을 싫어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1세기에 여전히 긍정적 유토피아 문학을 하는 그 지적 게으름도 맘에 안 들지만, 대중 앞에 옷 홀딱 벗고 빨간 자지, 노란 자지 심판하는 행태는 내 성 취향을 심히 거스른다. 현실은 무섭게 돌아가는데, 거기에 결합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제 자지 색깔의 원색성을 근거로 남들에게 ‘자유주의자’니, ‘프티 부르주아’니 딱지나 붙이는 것은 그냥 중세적 악습일 뿐이다. ‘종교재판’(inquisition)의 어원은 라틴어 1인칭 ‘내가 묻노라’(inquisitio), 즉 남의 신앙적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었다.

언어 게임에서 ‘유토피아’가 하는 역할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역사에 텔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서 어떤 정치적 목적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유토피아는 구체적으로 터져나오는 사안을 판단하는 데에 나아가 사안에 대처하는 대안을 만드는 데에 은밀히 작동해야 한다. 마치 촉매처럼. 이번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무상급식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사실 그리 급진적인 요구가 아니나, 평등사회의 유토피아를 향한 중요한 한 걸음이 아니던가.

우리는 결코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아무 데도 없다’를 의미하는 그 낱말의 뜻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거기에 그저 무한히 근접할 수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현실에서 유리된 실험실에서 사유하는 한두 사람의 레토르트 몽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그림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삶에서 유리된 정치적 수도원에 사는 몽상가들이 그리는 유화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사는 수많은 이들의 꿈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퍼즐이다.

이른바 ‘좌파’에 부족한 것은…
불행히도 우리는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오랜 세월이 지나 되돌아보면 우리의 꿈이 이미 실현되어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 유토피아의 모습은 한 몽상가의 ‘비전’ 속에서 미리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투쟁하는 세대의 집단적 꿈속에서 ‘기억’으로 뒤늦게 현현하는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이름의 난쟁이는 거울의 반사를 이용해 등을 구부리고 책상 속에 숨어야 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은밀히 그의 조종을 받는 터키 인형이 되어야 한다.

유물론적 과학이 왜 신학의 조종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유토피아의 실현이 과학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세속 종교적 신앙,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합리적 열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말한다. “신학적 차원- 베냐민에 따르면 이것 없이는 혁명이 승리할 수 없다- 이 바로 충동 과잉의 차원, ‘지나치게 많음’의 차원이 아닌가?” 사실 광적인 예수쟁이들의 문제는 열정의 과도함에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데서나, 아무한테나 드러내는 데에 있다. 이는 좌파 신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학은 타인을 심판하는 기준이 아니라, 자기를 움직이는 동력이어야 한다. 목소리 높은 좌파들이 번번이 그들이 ‘주사파’라 경멸하는 이들에게 패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른바 ‘좌파’에 부족한 것은, 홍세화 선생이 지적했듯이, 자기를 움직이는 열정이다(지젝은 이를 프로이트-라캉의 ‘충동’으로 해석한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이른바 ‘주사파’들은 자기의 난쟁이를 감춰놓고 터키 인형으로 행동할 줄 안다는 것이리라. 불행한 것은, 그 훌륭한 습성이 심오한 철학적 이해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의 현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뿐이다.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위의 글에서 보자면 진중권은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으며,무한히 추구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상사회를 그려놓고 현실을 거기에 대입해 비판한다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말합니다. 위의 노란색으로 제가 강조한 부분에서 보듯이, 김규항을 좌파 바바리맨으로 칭하고, 김규항이 자신에게 자유주의자 딱지를 붙인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신학을 믿는 것은 자신을 움직이는 동력이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말은  다음 편에도 계속 될 것이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말로만 진보하지말고 실천을 하라.뭐 이런식의 말입니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윤형. 오랜만에 블로그에 가보니 블로그가 폐쇄됐더라.. 

 

키보드워리어이기도 했던 그는

이제 진보신당 탈당을 선언하고

블로그에 있던 그의 글이 모두 사라졌다.

모든 기록은 기록되야 된다던

그의 글은 사라졌다.
 

 

 

디시인 사이드의 한윤형의 진보신당 탈퇴관련글.

사람들 선동해서 같이 떠나자고 할 생각없다. 그래도 조가 심보다 나을 수도 있는데, 굳이 조를 찍을 사람들을 끌어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론,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내가 뭐 대단한 원칙주의자라서 그런게 아니다. 진보신당이 쥐뿔 뭐라도 있는 정당이면 통합논의에 짐짓 발 거치고 정치협상하고 하는게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심 플랜'은 명백하게 진보정당 운동을 접자는 소리였다. '독자노선론' 대 '연합정치론'이 아니라, 진보정당 운동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던 거다.   

    따라서 조가 심의 대항마로 나왔다면, 나는 나의 지지자들과 함께 진보정당 운동을 계속 하겠소, 라는 사인을 줬어야 했다. 하지만 조는 그 사인을 주지 않고, 연합정치론자들에게 어필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니까 그에겐 이 상황이 진보정당 운동을 접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전략전술적 우선순위에 대한 이견차이의 문제였다는 것이 된다. 만일 그 판단이 옳다면 그런 식의 정치적 기동에 내가 동의하지 못할 이유도 없겠지. 하지만 내 생각엔 그게 아니다. 진보정당 운동은 사실상 끝났다. 민주노동당이 '분당 5적' 조승수의 데이트 신청에 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민노당이 민주당과 스킨십을 강화해서 진보신당에게 공짜로 열리는 이 공간을 박차는 정치공학에 무슨 희망이 있겠나. 일단 당적부터 버릴 생각이다. 이쪽은 쳐다보지 않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십년을 이 판을 지켜봤던 내 집착을 좀 덜어내야겠다는 뜻이다.   
     이걸 예상한 건 아니고 홧김에 빡쳐서였지만, 블로그 닫기를 잘했다. 한동안은 매체에 글 쓸 힘도 없을 것 같다. 이미 2012년을 앞둔 물밑 판짜기와 프레임 선점 암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마이너의 마이너'에 해당하는 이런 오덕세계의 스토리에 세상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글쓰기를 하려면 에너지 소모가 크다. 물론 내가 이렇게 한가한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은, 한동안은 칼럼쓰지 않아도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이겠지만, 지치고 맥이 빠진 것은 사실이다.          
조의 발언은 '386'이란 세대와 '활동가'라는 정체성의 교집합이 만들어냈던 어떤 흐름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것은 너무 늦은 선언이거나 너무 이른 선언이겠지만, 그것이 진행되는 과정이란 건 분명하다. 그들은 나름대로 세상을 바꿔냈다. 하지만 운동을 스스로 말아먹고 후세대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것도 상속받지 못했다. 우리는 (정말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맨땅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객관적인 현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또래세대 진보정당 당원들이, 그들을 통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맞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욕하면서도 그들의 방법을 벤쳐마킹하면서 '운동'을 해왔던 (혹은 안 해왔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들의 노선과 행동에 대한 냉철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선배가 물려준 게 없다고 파묻고 우리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자는 자세는 안 된다는 거다. 386세대는 바로 그렇게 시작했고, 그것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결말은 이렇다. 나는 우리가 일단 그들에 대한 기록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기록은 후세에 전달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을 위한 지침을 찾기 위한 기록이다.         
아마 그러면서도 우리는 '저 정치인들'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정치공학적 판단이나 주관적 희망과는 상관없이, 현재의 정치적 판세는 그들이 연합을 통해 '큰 정치인'(보수정치이라 하더라도)이 될 수 있는 전망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들은 유연해지려고 노력하더라도 유연해지지 못하고 2012년에 지금의 바운더리와 거의 유사한 바운더리의 정치집단의 후보로 총선에 나올 가능성이 크다. 아마 그때에 우리는 그들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들을 '훌륭한 진보정치인'으로서 지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훌륭한 야당정치인'으로서 지원하는 것인지는 두고봐야 할 문제이리라.          
어느쪽의 활동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든 '독립'해야 할 시간이다. 애초에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맥락에 관심이 없는 유아들의 독립이 아니라, 역사를 지각하는, '역사 이후'의 시대를 지각하는 이들의 독립이 필요한 시간... 미쳐버리지 않고는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세상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대체 뭐가 제정신인지도 판정내릴 수 없는 세상이니까 말이다. 몇년 후의 나의 냉소적인 정신은 지금의 나를 또 비웃고 있겠지만, (오늘 내가 몇 년 전의 내게 그렇게 하듯) 여하튼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9242144085&code=990000  

 2030 콘서트]프로게이머 이윤열의 ‘명예’

 한윤형 자유기고가


 





  • 한윤형 자유기고가
    게임을 좋아하는 청년들에게 최근의 이슈는 단연 ‘스타크래프트2(스타2)’다. 스타2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이유는 작품 하나 이상의 맥락이다. 1990년대 말 PC방 열풍과 함께 한반도 남쪽을 강타한 스타1이 우리 세대의 청년들에게 ‘스타(크래프트)리그’라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이벤트를 만들게 했기 때문이다. ‘e스포츠’란 그럴듯한 포장지를 뒤집어쓴 ‘스타리그’는 10년 동안 자생적으로 발전해왔다. 그리고 스타2 발매는 스타1이 구축해온 스타리그의 세상에 거대한 지각변동을 몰고 올 것이 분명하다.

    스타크래프트의 제작사인 블리자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스타리그라는 괴물의 활동을 지난 10년간 방관해왔다. 블리자드는 처음에는 자신이 만든 게임을 그토록 사랑하는 청년들에게 감격했을 거다. 하지만 그후 블리자드는, 이 청년들이 ‘옛 게임’을 계속 즐기느라 ‘새 게임’을 거들떠보지 않는 상황이 별로 좋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저작권’을 침해하는 스타리그를 방관했지만, 차후의 신작에서는 e스포츠조차 블리자드의 자장 속에서 실행되는 그런 시스템을 구현하고자 했다. 블리자드 계정의 배틀넷에 접속하지 않으면 아예 대전이 불가능한 스타2의 시스템은 그러한 의지의 반영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reset’을 강요하는 그런 ‘Game’이다. 소비자가 오늘 쾌감을 준 상품에 내일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의 시장경제는 존속할 수 없다. 어린이는 끝없이 장난감을 버리고 청년은 끝없이 철지난 게임에 ‘Delete’키를 누른다. 이처럼 끝없는 ‘단절’과 ‘망각’이 반복되는 세계에선 ‘서사’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이 현기증 나는 레이싱의 현장에서도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충동을 가진 동물이다. <토이스토리> 시리즈가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앤디가 우디와 버즈를 버리지 않기를, 그리하여 우디와 버즈의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스타리그의 서사는 <토이스토리>가 그랬듯 자본주의의 최첨단 이미지를 뒤집어쓴 채 그것의 비인간적 속도에 저항하는 그런 위안의 ‘서사’였다. 그리고 그런 서사를 만들어낸 위대한 게이머 중 하나, ‘천재 테란’ 이윤열이 스타2 공식 발매 하루 전날 스타2로의 전향을 선언했다. 일각에선 그가 ‘영예로운 프로게이머’의 지위를 버리고 ‘상금 사냥꾼’으로 돌아섰다고 비판한다. 후배들을 위해 ‘명예로이 퇴진’하지 않고 ‘기득권’을 누리려 든다고 비난한다. 어이가 없는 소리다.

    한국e스포츠협회는 게임단에 팀스폰서를 하는 기업들이 모여서 구성된 단체다. 그들은 스타2리그를 주관하기 위해 블리자드와 저작권 협상을 했지만 실패한 바 있다. 그래서 각 기업이 운영하는 게임단은 소속팀 프로게이머가 스타2를 즐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프로게이머는 협회의 룰 안에서 계속 스타1리그에 출전하거나, 협회가 인증하는 프로게이머 신분을 포기하고 새로 형성되는 스타2리그에 출전하는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가진다. 한쪽의 길은 ‘영예’롭고 다른 한쪽의 길은 기득권을 추구하는 길인가? 협회야말로 프로게이머들의 권리는 방기한 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블리자드와 협상하다가 오늘날의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새로운 게임에 도전하고 싶다’는 열망보다 게이머에게 더 본질적인 것은 없다. 프로게이머라는 호칭은 협회의 인준이 아니라 그 열망이 가져오는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법이다. 이윤열은 여전히 프로게이머다. 팬들은 그의 결정과 누구도 박탈할 수 없는 그의 명예를 지지할 것이다.

 

 

경향신문 한윤형의 최근 기사다.  

프로게이머의 명예.. 

아..참..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아쉽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9-30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웅본색 Ⅰ&Ⅱ 컬렉션 디지팩 SE (2Disc)
오우삼 감독, 장국영 외 출연 / 대경DVD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오우삼의 최고 역작. 특히 1편의 형제애는 아름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웃 사람 1 - 미스테리심리썰렁물 시즌 3 강풀 미스터리 심리썰렁물
강풀 글.그림 / 문학세계사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강풀의 스토리를 이어가는 힘이 느껴진다. 이웃사람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블루레이] 본드 50 :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 한정판 박스세트 (23disc)- 22 타이틀+보너스 디스크 수록
가이 해밀턴 외 감독, 숀 코너리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2년 11월
330,000원 → 330,000원(0%할인) / 마일리지 3,300원(1% 적립)
2012년 10월 28일에 저장
품절
30대, 평생 일자리에 목숨 걸어라- 직장생활 길어야 10년, 평생 먹고 살기 프로젝트
김상훈.이동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10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2010년 11월 01일에 저장
품절

신 중안조- [초특가판]
임초현 감독, 이수현 외 출연 / 유니원미디어 / 2006년 9월
9,900원 → 2,900원(71%할인) / 마일리지 30원(1% 적립)
2010년 09월 27일에 저장
품절
신주쿠 사건(1disc)- 아웃케이스 없음
이동승 감독, 다니엘 우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9년 9월
9,900원 → 9,900원(0%할인) / 마일리지 100원(1% 적립)
2010년 09월 27일에 저장
품절


1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