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정의 라드츠 제국 시리즈
앤 레키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2013년 발표된 앤 레키의 첫 장편 소설 『사소한 정의』는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평단과 독자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이끌어 냈다. 네뷸러상과 휴고상, 영국판타지문학상, 아서C.클라크상, 로커스상 등 여러 상을 수상하며 2014년 폭스 TV에 드라마화 판권이 팔리기도 했다.


 어릴적부터 열성적인 SF 독자였으나 실제로는 중년이 되어서야 작품 쓰기를 시작한 앤 레키는 2005년 지역 글쓰기 모임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첫 장편소설인 『사소한 정의』를 완성하는데 6년이 걸렸다고 한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지도를 받으며 글쓰기를 하는 앤 레키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듯 하다)




 이 소설의 배경은 멀고 먼 미래, 정복과 확장으로 3천 년간 우주를 지배해온 라드츠 제국이다. 라드츠 제국의 중심엔 복제를 통해 수천 개의 몸으로 존재하며 제국의 3천 년을 지배해온 절대 군주 아난더 미아나이가 있다. 


 라드츠 사회는 보호-피호 관계를 바탕으로 한 위계질서가 작용하며 그것은 개인과 개인, 가문과 가문 간에 사회적, 재정적 울타리와 부양제도로 기능한다. 이러한 보호-피호 관계는 새로이 '병합'된 지역이 기존의 유력 라드츠 가문으로부터 피호권을 제공받음으로 온전히 라드츠 사회에 포섭되게끔 하며, 전체 라드츠 제국을 이루는 기본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다. (즉 먹이사슬 최종 끝, 라드츠 우주의 모든 가문을 피호민으로 거느린 것이 아난더 미아나이인 것이다.)  


 라드츠 제국은 이러한 신분제 말고도 '정의, 공정, 이익'을 실현하는 군주에 대한 신뢰와 '병합'을 통해 인류를 문명화 시켜야 한다는 사명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구축되어 있다. 이러한 제국에서 장교의 위치는 매우 중요한 지위이다. 인류 문명화를 위한 '병합'을 실행한다는 점에서, 또 새로운 행성계에서 새로운 가문들과 접촉함으로 가문의 부와 영향력을 확대하는 기회를 창출해낸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띈다. 


 라드츠 제국의 전함은 세 종류로 나뉘며 자체 관문을 형성하여 빛보다 빨리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저스티스급은 병력 수송선이고 실제 전투의 주축은 소드급이 맡는다. 가장 규모가 작은 머시급은 주로 초계함으로 쓰인다. 


 이러한 함선들에는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들이 탑재되는데 함선의 인공지능은 인간 장교들의 몸에 이식된 삽입장치들을 통해 그들의 모든 정보를 전달받으며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수 있다. 또 과거 병합 과정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의 몸을 생명중지 상태로 보관, 비축해두었다가 필요한 만큼 꺼내 인공지능의 보조체로 이용한다. '효과적으로 죽어 있는' 보조체들의 몸은 인공지능의 수족이 되고 또다른 몸이 되어 이곳 저곳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보조체는 인간이 아니며 함선에 부속된 장비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렇다고 인공지능이 인간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브렉은 2천년 간 병력 수송선으로 존재하다 파괴된 저스티스 토렌 호의 인공지능이 남긴 단 하나의 조각(보조체)이다. 


 그는 온전한 하나의 저스티스 토렌이었던 시절 그 스스로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어떠한 사건을 통해 본체인 함선 저스티스 토렌과 제각기의 보조체간 연결의 차단을 경험하게 되고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스스로가 어떤 사건에 휘말렸는지도 모른 채, 분리된 '아난더 미아나이'들의 상충된 명령으로 자신이 가장 아꼈던 장교 '오온'을 죽이고, 자신으로 하여금 '오온' 죽이게한 '아난더 미아나이'에게 총을 쏜다. 그 결과 저스티스 토렌은 파괴되고, 그에 부속된 보조체였던 제 1에스크 19번만이 저스티스 토렌의 명령으로 탈출을 감행한다. 자신의 나머지들이 파괴되던 순간을 뒤로 한 제 1에스크 19번은 스스로에게 브렉이라는 이름을 주고 자신을 파괴하고 오온을 죽게한 '아난더 미아나이'의 존재 자체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이 소설은 총 3부로 나뉘어 있으며 1부에서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복수를 준비하는 브렉, 과거 오온과 그들을 둘러싼 사건에 대해 이야기 된다. 2부는 아난더 미아나이를 죽이기 위한 무기를 구하는 브렉과 1부에서 그가 구해낸 장교 세이바든과 브렉의 관계 변화, 두 사람의 라드츠 제국으로의 입성 등이 그려진다. 3부에서는 브렉의 존재를 알아차린 아난더 미아나이들과의 접전, 아난더 미아나이들의 분열로 인한 내전이 시작된다.   


 세계관의 구성이며 인물들의 구성이 무척 섬세한 소설이다. 앤 레키는 정말이지 전혀 새로운 우주와 전혀 새로운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작가의 섬세함이 가장 빛을 발하는 지점은 라드츠 문화에 있다. 라드츠인들은 성별 지칭하는 대명사를 '그녀'로 통일한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지만 라드츠 인들은 특정 성별을 지칭하지 않으며 대명사로 지칭할 때에는 여성으로 생각되는 대명사 '그녀'를 쓴다. 이것은 무척이나 모험적인 시도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남성이라고 생각했던 존재를 여성형 대명사로 지칭할 때 독자였던 나는 당혹스러웠고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다. 젠더적인 측면에 대해 그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기법으로서 사용되는 이러한 대명사는 무척이나 특별하다. 


 또한 인물들이 살아 숨쉬는 것이 너무 재밌다. 


 인공지능에 불과했던 저스티스 토렌, 그리고 그에 소속되었던 제 1에스크(어차피 둘은 하나인 '나'이지만)가 특별히 아꼈던 '오온'대위를 자신의 속성(아난더 미아나이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절대적 정의, 가치)으로 인해 살해하고, 마찬가지로 그러한 속성 때문에 아난더 미아나이(아난더 미아나이의 정신체는 분리된 상태이었으므로)에게 총을 겨누었을 때 일어났던 존재론적인 고민. 오온을 죽였다는 데에서 오는 스스로를 향한 분노, 상충된 명령을 내린 아난더 미아나이의 존재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분노를 해갈하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브렉. 


 '세이바든'과 브렉의 관계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세이바든은 저스티스 토렌의 장교였으나 이후 다른 함선의 함장으로 전출된 인물이었다. 저스티스 토렌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장교. 함선을 잃고 생명중지 되었다가 1,000년만에 깨어 났고 낯선 닐트에서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브렉에게 구조된다. 브렉의 입장에서 보자면 원래 좋아하지도 않았던 인물이지만 자신의 본체 저스티스 토렌을 떠올리게 하는 세이바든은 저도 모르게 구했으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존재. 세이바든의 입장에서는 1,000년전엔 유력가문의 인물이었으나 생명 중지 상태에서 깨어나니 자신을 아는 존재들은 다 죽었고 가문도 사라졌다. 그 어디에도 의지할 끈 따위 없던 상태, 그런 와중에서 브렉의 도움으로 그의 곁에 있게 되면서 초반에는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브렉을 대하는 태도와 감정이 호감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인물관계를 바탕으로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로맨스 코드는 아난더 미아나이와 라드츠 우주를 둘러싼 음모의 판을 조밀하게 엮어주는 끈이 된다. 오온과 브렉, 브렉과 세이바든. 내가 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이 소설을 직접 읽어 본다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소한 정의』 를 흐르는 로맨스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사소한 정의』는 라드츠 3부작의 첫번째 권이다. 2014년 『사소한 칼』, 2015년 『사소한 자비』로 완결이 났다. 한국에서는 아직 시리즈의 첫 권만 번역 출간된 셈이다. 이것은 그저 먼 미래의 우주와 AI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안에는 음모와 애정, 전혀 새로운 우주의 문화 등이 굉장히 잘 짜여진 건축물처럼 존재한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생각했다. 다음 권이 읽고 싶다고. 

 『사소한 칼』과 『사소한 자비』는 되도록 동시출간 되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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