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체파리의 비법 팁트리 주니어 걸작선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이수현 옮김 / 아작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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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말할 수 있다면 지금의 나를 넘어서는 존재이리라. 그리고 아마 미래에 살기도 할 것이다. 인간이란 저만치 앞서가서 돌아볼 때나 인식할 무엇이 아닐까... 하지만 분명 "인간"은 총명한 아이의 눈에서 볼 수 있는 눈부신 이미지와 관계가 있기는 할 것이다. 삶을 탐험하고, 의문하며, 열렬히 이해해보려 하는, 파괴적이지 않은 탐구심. 나는 그 정신이 우리 모두의 핵심이라 본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본명은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 1915년에 태어나 1987년 자살로써 그 생을 마감한 소설가. 아프리카에서 야생 고릴라를 본 최초의 백인 여성, 화가이자 예술 비평가였으며, 1950년대에는 CIA 정보원, 제대 후 실험 심리학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던 학자. 1967년에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SF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그녀는 1960년대 말부터 10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다양한 소재와 흥미진진한 주제의식을 과시하는 중단편들을 써냈다. 

 

 그녀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라쿠나 셸든 등의 이름으로 글을 써왔고 대중은 그녀를 중년의 남자 라고 생각해왔으나 1976년 우연한 계기로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이라는 자신의 본명, 자신의 삶을 들키게 된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와 라쿠나 셸든이 동일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바로 그녀였다는 사실은 당시 SF 팬덤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고 이것이 바로 '팁트리 쇼크'이다. 정체가 밝혀진 뒤에도 그녀는 꾸준한 작품활동을 해왔으나 1987년 알츠하이머 병을 앓던 남편을 총으로 쏘고 그 본인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번 아작 출판사에서 출간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체체파리의 비법>은 <Her Smoke Rose Up Forever>를 두 권으로 나누어 옮긴 것이다. (앞으로 나올 다음 권도 기대된다.) 책의 서장에는 6줄에 걸친 팁트리 주니어의 말이 쓰여 있는데 그 중 '삶을 탐험하고, 의문하며, 열렬히 이해해 보려 하는, 파괴적이지 않은 탐구심. 그것이야 말로 "인간"의, 우리 모두의 핵심'이라는 말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SF소설가 듀나는 이 책 『체체파리의 비법』의 추천사 중에 이런 말을 썼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여성적 목소리와 남성적 목소리의 경계는 훨씬 흐릿한 법이고 그 경계선을 나누는 것은 개별 목소리가 아니라 그들을 보는 편견입니다. 

(중략) 

 앨리스 셸튼이 팁트리라는 가면을 쓰면서 얻은 것도 그런 중립적인 자유였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셸든은 남자를 흉내냈다기 보다는 여자들에게 주어진 제한과 불필요한 관심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썼던 것이죠. 



 팁트리 주니어가 활동하던 1960년대와 2016년인 지금, 남녀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나 역시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을 타고 났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자라면서 수많은 불평등을 경험해왔다. 남성이 남성으로 태어난 덕에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것들, 여성이 여성으로 태어난 탓에 당해야 했던 차별 같은 것들.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제한적이고 불필요한 관심의 대상이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소설들은 여성성을 지닌 인간, 혹은 사회적 약자들이 겪어온 수많은 불의를 많이 다루고 있다. 그녀의 세계는 넓고 다양하며 선구적이었다. 


 



 * 단편별 정리

 

 - 체체파리의 비법(1977)

 

 줄거리에 대해 설명하기 보다 등장인물인 앤이 앨런에게 보낸 편지의 문구를 인용하는 것이 낫겠다. 



 셀리나 피터스는 신랄한 평을 몇 가지 내보냈어.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충분히 많은 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생활 방식이라고 부른다.같은 거. 난 사태가 번지고 있다고 생각 하지만, 정부에서 언론에 문제를 확대하지 말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상황을 아는 사람이 없어. 


 바니의 효소가 전나무 나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앤지가 말해줬어. 수컷이 암컷과 접촉한 후 교미를 위해 뒤로 방향을 돌리지 못하게 막아서, 수컷이 암컷의 머리와 짝짓기를 하게 만든다나 봐. 이가 빠진 시계태엽처럼. 암컷들은 어리둥절하겠지. 

 


 며칠 전 있었던 강남역 살인사건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체체파리의 세계에서 살고 있구나.




 - 접속된 소녀(1973)


 구질구질한 길거리 소녀였던 P. 버크가 아름다운 생체 인형 델피가 되어 만나게되는 새로운 삶. 


 이 이야기는 절대 밝고 찬란한 내용이 아니다. 자본주의와 외모 지상주의, 미디어의 허상과 원격조정 생체-인형 등을 결합하고, 간접 광고가 세상을 지배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사이버 펑크, 어찌 보면 디스토피아적인 세계이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1973)


 화자인 루스는 남자다움이 부족한, 위협적이지 않은 남성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가 남성인 까닭에 여성에 대한 이해에는 한계를 보인다. 이 소설은 외계인과의 조우를 다루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딸과 함께 외계인을 따라 떠나고 마는 파슨스 부인의 말이다. 


 "오, 트라우마 같은 건 없었어요, 돈. 그리고 전 남자들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건 마치, 날씨를 미워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일 테죠."


 "여자들에게 권리 같은 건 없어요, 돈. 남자들이 허용할 때를 빼면 없죠. 남자들이 더 공격적이고 더 강력하고, 남자들이 세계를 돌려요. 다음에 또 진짜 위기가 일어나서 남자들을 뒤흔들면 우리의 소위 권리라는 건 마치 연기처럼 사라질 거예요. 우린 언제나 그랬던 대로, 소유물로 돌아가겠죠. 그리고 잘못된 일은 모두 우리의 자유 탓이 될 거예요. 로마의 멸망이 그랬던 것처럼요.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여자들이 하는 일은 생존하는 거예요. 당신네 세계 기계의 틈바구니에서 하나둘씩 살아가는 거죠."


 

 -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1976)


 우주 여행과 시간 여행, 전 세계적인 질병, 복제, 서로 다른 미래 문화와 사회에 대한 상상, '여자들만 사는 세상'을 SF만의 방식으로 그려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로리머'의 존재이다. 로리머의 과거와 생각을 통해 성차별의 본질을 집어 낸다. 


 로리머는 사회가 생각하는 '남자다움'을 갖지 못하고, 우두머리 수컷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 하며, 여성들에게 비웃음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 평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전히 강력한 남성상을 동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로리머와 그 일행이 우주를 여행하는 동안 로리머는 일행들로 부터 별 것 아닌 취급을 받는다. 우등한 남성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약자로서의 위치를 갖고 있다. 알파 수컷들 사이의 베타 수컷. 그것이 로리머의 자리이며 후에 미래의 여성들과 만남을 갖게 된 후로 더욱 도드라지게 엿보인다. 


 

 - 아인 박사의 마지막 비행 (1969)


 정보부 요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보고서 형식의 소품이다. 생태학적인 통찰과 대규모 바이러스 공격으로 인한 멸종 아이디어에 미친 과학자의 환상을 담고 있다. 



 - 덧없는 존재감 (1975)


 죽어가는 지구에서 새로운 집을 찾아 나선 우주선 켄타우로스 호와 선내 의사인 애런 케이가 주인공인 중편으로 우주 탐험물의 형식을 취한다. 


 새로운 행성을 찾아 우주를 탐험하던 켄타우로스 호는 선발대였던 로리에 의해 아름다운 행성을 발견하게 되고 그 행성의 미지의 생물을 선내에 들이게 된다. 미지의 생물은 신성과도 맞닿아 있으며 유혹적으로 사람들을 끌어 당긴다. 로리는 그것을 치유함, 녹아듦, 완전함 등으로 이야기하며 애런과 함께 가려 하지만 애런의 적극적 저항으로 인해 미지의 생물을 따라나서지 못한다. 


 기발한 소재와 상상력. 



 - 비애곡 (1980)


 기존 문명의 종말 이후를 다루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이다. 멸망 후가 그 배경이나 고요하고 평화롭다. 


 인간 대부분이 '강'을 통해 은하 세계로 떠나가고, 주인공 자코는 먼저 떠난 가족들을 따라가려다 있을 리 없는 사람의 존재를 발견하고는 정박하게 된다. 검은 피부에 묘한 그물 모자를 쓴 마른 소녀, 피치시프는 은하로 떠나지 않을 생각이다. 최후의, 최후의 인간이 되어 아이를 낳고 기르며 이곳에서 살아가는 일, 그것이 그녀의 꿈. 자코는 피치시프와 함께하며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남고자, 이미 떠난 아버지와 가족들을 찾아 강의 진원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정말 시의적인 글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페미니즘적 생각과 SF적인 상상력들은 굉장히 공격적이고 전투적이다. 많은 이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여성 우월주의 적인 성향을 읽어내곤 하는데 사실 그것은 잘못된 이해라고 생각한다.


  수천년간 지탱되어진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 속에서 학습된 여성의 위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남성이 남성으로 나고 자라 누린 특권들은 그 스스로가 약자가 되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오른손잡이의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은 왼손잡이의 불편을 알 수 없고, 생물학적 남성은 생물학적 여성이 겪는 사회 부조리와 불평등, 차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겐 그저 기분 나쁨이고 불편함일 뿐인 일들이 여성들에게는 위협이고 생존에 직결된 문제인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읽어보아야 하는 소설이다. 나는 특히 <체체파리의 비법>과 <보이지 않는 여자들>,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를 추천하고 싶다. 체체파리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얼마나 파슨스 부인의 선택을 얼마나 동경할 수 밖에 없는지. 젠더 문제는 그저 여성의 문제만이 아니며 세상에 수많은 로리머들 역시 생각되어져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생물학적 남성이건, 여성이건. 그 누구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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