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 때, 아내와 내가 이혼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던 그 다툼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혼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혼을 선택했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어찌 역사뿐이겠는가?
어차피 벌어지고 지나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가정이 있을 수 없는 걸 말이다.
레너드 쉴레인은 지나 사피엔스라는 그의 저서에서 인간은 ‘만약에 ~하다면’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하게 된 순간부터 인류의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면, 설령 초기 원시 부족 형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오지의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만약에 ~하다면’에 해당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집단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언어라는 매개로 의사를 소통하는 인간은 모두 ‘만약에 ~하다면’이라는 가정을 사용한다는 말이다.
나도 인간이고, 제법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몸을 담고 있는 집단속의 인간이니 이러한 ‘만약에 ~하다면’이라는 가정을 수도 없이 사용한다.

인간만이 사용하는 화법이라고 하니, 이 화법을 빌려 오자.
‘만일 그 때 그 일이 없었다면 우린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또 다른 문제가 생겨서 같은 결론을 내렸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행복하고 알콩달콩한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었겠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우리 부부는 남들이 보기에 지극히 행복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아내는 저녁식사를 준비해두고 아파트 앞 벤치에서 아이와 함께 나를 기다린다. 이웃들과 수다를 떨기도 하고, 아이와 놀아주기도 하며...
들어서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고 집에 들어서면 같이 저녁식사를 한다.
나는 밖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아내는 들어주었다. 아내가 이야기를 하면 나 역시 귀 기울여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다.
TV프로그램을 함께 보기도 하고, 허리가 아픈 아내를 대신해서 내가 아이를 씻겨서 마사지까지 해주고 나면 하루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든다.
잘 생각해보니 내 마음 한 구석에 풀리지 않는 응어리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랬던 걸 보면 아내 역시 나 못지않게 단단한 응어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건 어쩌면 금단의 영역이었을까? 나나 아내나 그런 응어리가 있다는 걸 내색하지 않고 살았다.
그렇다면 조금 빠르냐, 늦으냐의 문제일 뿐 그 응어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이혼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았다면 응어리가 터지기 전에 무언가 계기가 생겨서 그 응어리를 풀어버릴 기회가 왔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혼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결론이 나는 것일까?

아내와 이혼을 한 이후, 꿈을 꾼 적이 있다. 그냥 하룻밤의 꿈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꿈의 내용이 꽤나 충격적이어서 무언가 의미가 있을 거라고 느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벌써 4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꽤나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어딘가로 바쁘게 걸어가던 나는 어느 순간 장례식장에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장례식이 다른 사람이 아닌 아내의 장례식이라는 걸 알고 꽤 당황해했었다.
장례식장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콘크리트 건물이었고, 황량해 보이기까지 한 장례식장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눈앞에는 검정색 관이 놓여있었고 아내는 그 안에 잠자듯 누워 있었다.
잠시 후 무언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관에 누워있던 아내는 발목이 잘려 있었고, 그 잘려나간 발목 아랫부분은 관 밖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꿈속에서는 그걸 보고도 심하게 놀라지는 않았다.
단지 ‘어?“하는 생각뿐이었다.
막상 꿈에서 깨고 나서 더 놀라고 무섭고 기분 나빴던 기억이 난다.

그 꿈을 꾸고 난 후, 꿈 해몽을 할 줄 안다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도 모든 미련을 다 끊고 떠났나 보다. 영영 남이 되어버렸나 봐. 오죽했으면 발을 끊고 갔겠어?”

그 말을 들으며 씁쓰레한 웃음을 지었다.
‘아. 내가 그렇게 미웠나 보구나. 발목을 끊고 이승을 떠나는 모습으로 나와의 인연을 끊으려 했을 만큼...’

그래서였을까?
이혼 후, 아이 때문에 아내와 통화를 할 일이 있을 때에도 난 가급적 말을 아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고,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다.
그건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아이를 만나겠다고 하거나 아이가 엄마를 만나겠다고 해서 약속 장소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언제부턴가 둘은 서로를 외면했다. 눈조차 마주치치 않았고, 서로에게 건넬 말이 있을 때는 아이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도 했다.
나는 아내가 나를 거부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을 건네거나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아내는 어떤 생각으로 그랬을까?
나와 마찬가지로 내가 거부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나와는 말조차, 눈길조차 마주하기 싫어서였을까?

생각해보면 아내와도 즐겁고 행복했던 시기가 있었다.
여섯 살의 나이차이, 비록 사설학원이기는 했지만 가르치는 강사와 배우는 수강생으로 처음 만나서 설레는 마음과 어색한 만남을 거쳐서 뜨겁고 절절하게 사랑하는 시기를 거쳐서 ‘이 사람이 내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둘이 함께 살기로, 법적으로 부부임을 인정받게 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육년이 걸렸다.
어색함을 달래려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떨리는 가슴으로 손을 잡았던 기억도 난다.
내 자취방, 그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곳에서 터질 것 같은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첫 키스를 했었다.
친구에게 오십만 원을 주고 덜덜거리는 소형차를 샀던 날, 우리는 밤새 드라이브를 했었다. 운전이 서툴러서 멋지고 폼 나게 달리지도 못했고 구형 승용차라 창문도 손잡이를 돌려서 열어야 했다. 아마 에어컨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여름철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창문 다 열고 다녀야 했으니 참 궁상맞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차를 몰고 멀리 경주까지 둘만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주말에는 강화도로, 양평으로 놀러가기도 했다.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그때를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가 지어지는 걸 보면 제법 행복했던 추억인가 보다.
결혼을 하고 나서 오래된 주공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차렸고, 하도 집이 좁아 옷장마저 들여놓을 수 없어서 철제 행거를 사용했지만 둘만의 보금자리는 제법 아늑한 느낌이었다.
부모님께서 돈을 보태주신 덕에 결혼 2년차에 집을 샀다. 이사 간 아파트에서 딸아이가 태어났다.
이웃들에게는 결혼 3~4년이 지났는데도 갓 결혼한 신혼부부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재미있게 살았었다.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취향도 비슷해서 말도 잘 통했었다.
물론 서로 다툼도 있었다. 제법 거세게 싸운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 때의 그 부부싸움은 나중에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로 기억된다. 부부싸움이긴 했지만 대부분 잠들기 전에 화해를 했었고 그다지 심각한 경우는 별로 없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제법 서로 잘 맞는다고 생각하며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겠다고 다짐을 했었지만, 정작 문제는 꽤나 엉뚱한 데서 터졌다.
그리고 그 엉뚱한 문제가 우리 부부 사이를 조금씩, 아니 꽤 빠르고 급격하게 갈라놓기 시작했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문제,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닌 양쪽 집 가족에 관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사자 간의 문제가 아니니 화해를 하거나 해결을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전혀 진전을 보지 못하고 냉랭해진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서 갈라서게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처음 만난 날부터 헤어지게 된 그 날까지 숨도 쉬지 않고 달려간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난 주말, 아이가 엄마를 만나서 하루를 자고 오기로 약속을 했기에, 약속장소에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아이만 데리고 그대로 떠나는 그녀의 차 뒤꽁무니를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무 그렇게 매몰차게 가지 마. 우리도 한 때는 서로 죽고 못 살던 날도 있었잖아. 마냥 행복하고, 서로가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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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이혼 법정에서

2005년 10월 3일 월요일 오후, 서울 양천구 신정동 서울남부 지방법원 205호 협의이혼대기실.
근 한 달여 만에 아내를 만났다.
아내? 맞나? 그 호칭을 써도 될까? 아직 법적으로는 부부이니 써도 되기는 하겠다.

대기실 앞 소파에 앉아 있는데 층계를 걸어 올라오는 아내가 보였다.
별 생각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가 슬그머니 내렸다.

아내는 지난봄에 내가 사 준 작은 MP3플레이어를 듣고 있었다. 하얀 이어폰 줄이 눈에 띄었다. 아내는 무심한 듯 내 옆에 앉았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며 내게 물었다.
“언제 시작이에요?”
“조금 기다리면 될 것 같아.”
시간을 확인한 아내는 다시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대기실로 들어오라는 안내를 듣고 일어섰다.
안에 들어가니 제법 넓은 대기실은 이혼서류를 손에 든 남녀들로 꽉 차 있었다.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따로 앉은 부부, 여전히 감정이 날카로워서 말싸움을 하는 부부, 또는 마치 이혼하지 않을 것처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손을 맞잡고 있는 부부...
우리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협의이혼확인실이라는 또 다른 문으로 한 쌍의 부부가 들어간다. 불과 오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지나면 문이 열리고 이제는 남이 될 수 있다는 판결을 받은 두 남녀가 나오고, 또 다른 부부가 들어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를 호명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음악 소리에 못 들었는지 내가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서며 천천히 이어폰을 뺐다.

판사, 그리고 두 명의 낮선 사람들이 우리 부부의 이혼서류를 뒤적이며 물었다.
“이혼의사가 있으십니까?”
“네.”

“아이 양육에 관해서는 서로 합의하신 겁니까?”
“네.”

“90일 이내에 관할구청에 서류를 제출하시면 이혼이 성립됩니다. 동일한 내용의 서류를 두 부 드립니다. 이 서류는 둘 중의 한 분만 가셔서 제출하시면 됩니다. 제출하신 날짜로 두 분의 이혼은 성립되는 겁니다. 만일 정해진 기일 안에 서류를 제출하지 않으시면 본 이혼 건은 무효가 됩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만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셔서 정해진 날짜까지 서류를 제출하지 못하면 이혼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 이혼의사가 있으시다면 다시 이혼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네.”

참 빠르다.
저렇게 중요한 사항을 모두 알려주고 친절하게 ‘부부가 남이 되는 방법’을 설명해주는데 오 분도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대기실을 거쳐 층계를 내려가며 물었다.
“점심은?”
“먹었어요. 전 회사 들어가 봐야 해요.”
“응. 내 차로 데려다 줄까?”
“아뇨. 그냥 갈게요.”
“전철역까지라도...”
“됐어요. 알아서 갈게요.”

아내는, 아니 그녀는 그렇게 돌아서서 갔다.

난 안다.
그녀는 지금 태연한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그녀, 12년이라는 시간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 생활을 하며 알게 된 그녀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아까 대기실에서, 음악을 듣는 그녀의 손을 보았었다.
그녀의 긴 손가락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단지 태연한 척하는 것뿐이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돌아서 가는 그녀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아마도 그녀는 눈물을 참기 위해 커다랗게 심호흡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녀, 내 아이의 엄마, 내 인생에서 12년을 함께 했던 그녀는 그런 여자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일이 닥치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여자.
아니 그렇게 차분한 것처럼 애써 꾸미는 여자,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냉정한 척 하는 여자가 그녀다.
지금까지 그녀는 그래왔다. 그리고 그런 애씀이 버티기 힘들 때, 그녀는 항상 내게 안겼다.
내 가슴에 안겨 엉엉 울었고, 넋두리를 했으며, 그렇게 떨리는 가슴을 달랬다.

지금 그녀가 떨고 있다.
눈물을 참고 있다.
후들대는 두 다리를 애써 달래며 서둘러 걷고 있다.
그녀를 안아주어야 하는데...
그녀를 다독여주어야 하는데...
그녀를 달래주고 눈물을 닦아주어야 하는데...
난 그냥 서있다.

갑자기 화가 났다.
아무렇지도 않게 서류를 뒤적이며 이혼을 결정하는 사람들이라니...

그들은 나를, 그녀를 모른다.
그들은 벌써 우리를 잊었다. 아니 애초에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런 그들이 우리의 이혼을 결정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생각해보니 그들은 제대로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자신들의 말 몇 마디와,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남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에게 제대로 눈길조차 건네지 않는 그 사람들이 우리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분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 앉아서 창문을 열었다.
가을이지만 날씨는 제법 더웠다.
담배를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천천히 더 천천히...
그렇게 담배를 한 대 다 피우고 나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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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진화 - 최초의 언어를 찾아서
크리스틴 케닐리 지음, 전소영 옮김 / 알마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언어의 진화(최초의 언어를 찾아서) - 크리스틴 케닐리 / 전소영 - 알마 

인터넷 서점에서 필요한 책을 찾던 중에 눈에 딱 걸린 책이 있다.

[언어의 진화]
‘언어도 진화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소개와 리뷰를 읽어봤다.
궁금증과 호기심을 유발한다. 

일단 책을 주문했다. 도착한 책을 펼치면서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제법 두툼한 분량,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생소한 단어들과 그 이름만으로도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세계 유수의 석학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중에서 그나마 익숙한 이름은 ‘노암 촘스키’ 정도? 그나마 이름만 안다 뿐이지 그의 저서는 읽어본 기억도 없다.)

딱딱한 빨간색의 하드커버에 다시 표지를 씌워서 꽤 고급스러워 보인다.
큼직하게 인쇄된 제목 [언어의 진화] 사이로 부제가 이렇게 붙어있다.
‘최초의 언어를 찾아서’
영문제목은 The First Word - The Search for the Origins of Language'이다.
금색 종이로 두른 띠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언어학과 진화생물학을 아우른 화제작, 정통 인문 독자의 필독서”

솔직히 말해서 책을 펼쳐들기도 전에 부담감과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대단한 인문도서라니... 그냥 편하고 부담없는 책을 읽는 습관을 가진 내게 너무 어려운 책이 아닐까?

만일 같은 주제의 강연을 듣는 것이었다면 나는 분명 강연장에 가는 것 자체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십중팔구는 그랬을 것이다.
책이 좋은 것은 바로 이런 점이다. 책을 주문해서 손에 넣고 나면 그 책을 읽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할 바이다.
내가 그 책을 펼쳐보지 않는다고 뭐랄 사람도 없고, 책을 읽는다고 시시비비를 따질 일도 없다.

일단 앞, 뒷 표지부터 꼼꼼히 훑었다.
뒤표지에는 내가 들어본 이름 ‘노암 촘스키’를 비롯하여 언어학과 관련이 있고, 이 책의 한 단원의 제목이기도 한 인명이 등장한다.
노암 촘스키, 수 새비지 럼버, 스티븐 핑커와 폴 블름, 스티븐 제이 굴드, 필립 리버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진화, 생물, 유전자 등의 주제를 다루는 책에서 몇 번 읽어본 이름들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을 쓴 저자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저자 소개를 읽었다.
호주 출신인 저자 크리스틴 케닐리는 맬버른 대학에서 영어, 언어학 학사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를 취득하고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단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제일 먼저 빨간 볼펜으로 밑줄을 그은 문장은 이것이다.
‘책을 시작하며’라는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낙타’와 ‘바늘’이라는 단어만 있으면 쉬운 일이다.”
언어의 힘에 대한 내용이다. 언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묘사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저자는 이렇게 말을 한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도록 밀어넣을 수도 있다. ‘낙타’와 ‘바늘’이라는 단어만 있으면 쉬운 일이다.] 세상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하지만 말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다.“말로는 뭔들 못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랐다. 이 책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적어도 말로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일 수도 있고, 말로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자가 될 수도 있다.
비록 말뿐일지라도...


그 다음으로는 머리말에 등장하는 [말은 상처를 입히고 유혹할 수 있는 힘을 가졌는데도 우리 인간이 창조한 것 가운데 가장 덧없는 존재이다.] 라는 문구이다.

맞다.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다.
말만큼 하기 쉬운 것도 없고, 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도 없다. 그러면서도 말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도대체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말’이라는 존재가 이토록 대단한 위력을 지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저자는 이 책의 시발점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처음에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말을 사용할 줄 모르던 인간이 진화를 거듭하다가 어느 날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과연 그 사람이 처음 입술을 움직여 한 말은 어떤 것일까?

사실 이 호기심은 호기심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절대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전제일 것이다.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어느 한 사람이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말을 술술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그렇다면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 몇 초라고 딱 잘라서 말을 할 수 있는 시작점이라고 금을 그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호기심이 시발점이 되어 이렇게 두툼한 책 한 권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책의 목차 구성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다.
사실 목차의 구성만 봐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저자는 어떤 관점에서 이 책을 저술하였는지 감이 잡힌다.

1. 언어는 사물이 아니다.

프롤로그
제 1장 - 노암 촘스키
제 2장 - 수 새비지 럼버
제 3장 - 스티븐 핑커와 폴 블룸
제 4장 - 필립 리버만

 2. 인간의 언어란...

제 2부를 시작하며
제 5장 - 이야기할 거리가 있다.
제 6장 - 단어가 있다.
제 7장 - 몸짓이 있다.
제 8잘 - 말이 있다.
제 9장 - 구조가 있다.
제 10장 - 인간의 뇌가 있어야 한다.
제 11장 - 유전자 돌연변이의 결과다.

 3. 무엇이 진화하는가?

제 3부를 시작하며
제 12장 - 종이 진화한다.
제 13장 - 문화가 진화한다.
제 14장 - 왜 진화하는가?

 4. 다음은 어디로?

제 15장 - 논쟁의 미래.
제 16장 - 언어와 진화의 미래
에필로그 : 갈라파고스 섬의 아기들

감사의 말
주석
참고문헌 찾아보기

목차에서 보듯이 저자는 현재 세계적으로 언어학과 관련지어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인물, 또는 가장 의미있는 연구를 진행 중인 학자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프롤로그는 장 자크 루소<인간 언어 기원론 : Essay on the Origin of Language>을 소개하며 언어가 발생하고 진화하는 과정에 대한 루소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한 가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이런 것이다.
언어, 말이라는 것은 다른 인간의 도구와는 달리 절대 흔적이 남지 않는다. 이것은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한계를 만들게 된다.
땅을 파면 지구의 역사만큼 많고도 많은 유물들이 등장한다.
고대적 인간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고, 현재는 흔적도 없이 멸종해버린 온갖 동물들의 형태도 화석으로 나타난다.
공상과학 영화를 보면 이렇게 발견된 화석에서 DNA를 추출해서 해당 동물을 다시 복원하는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렇듯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땅을 아무리 파고 들어가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

오로지 유추만이 가능한 분야가 바로 언어 진화 분야가 아닐까?
이 책에서도 이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에 대해 종종 언급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막막하고 답을 찾을 수 없는 분야가 아닐 수 없겠다.

책의 뒤에 보면 이런 가정이 나온다.
목차에서 “갈라파고스 섬의 아기들”이라는 제목이 바로 그 이야기를 다루는 부분이다.
갈라파고스 섬(실제로 어떤 섬이든 상관없다. 단지 말을 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과 격리될 수 있는 공간을 상징한다.)에 어떤 이유로든 갓 태어난 신생아들이 몇 명, 혹은 몇 십 명 정도 정착하게 된다면 과연 그들이 어떤 단계를 거쳐 언어를 습득할 수 있을까?

물론 가정이니만치 아기들의 양육이나 성장에 관한 부분은 논하지 않는다. 단지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다고 가정할 경우를 말한다.

어쩌면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똑똑히 관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부분에 대해 목차의 앞에서 언급한 석학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내용이 나온다.
“최소 인원이 몇 명이면 되겠느냐”라는 문제부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느냐?” 혹은 “몇 대를 거쳐야 가능하겠느냐?”까지...

그들의 의견이 무조건 옳을 수는 없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그들이나 언어진화학에 전혀 관심 없는 내 입장이나 어쩌면 똑같을 수도 있다.

그들은 언어의 진화에 무한한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고 있지만 어차피 그들의 연구결과는 절대 확인이 불가능한 영역일테니 말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책의 42P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와 관련된 단체에서 언어의 발생기원에 대한 연구와 논의를 부정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 금기가 깨진 것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였고, 그나마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90년대 중반에 발표된 글이 촉매가 되었다고 하니 비교적 최근까지는 연구주제로 선택받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언어의 기원에 대한 고찰을 기피하는 현상은 19세기 프랑스 파리 언어학회의 엄청난 움직임을 거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학회가 공표한 바는 이렇다. “본 학회는 언어의 기원이나 보편 언어의 발생과 관련된 어떤 논의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1872년 런던 문헌학회도 그 뒤를 따랐다.]

현재 언어 진화에 대한 연구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침팬지, 오랑우탄과 같은 동물들을 상대로 의사표시를 하게 하는 훈련을 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소리를 내는 온갖 동물들의 ‘소리’가 같은 종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가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으며, 유전자나 뇌구조와 같은 영역에서 인간과 다른 동물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연구 역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인간 이외의 동물들도 꽤나 다양한 의사표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밀림에 사는 원숭이 한 종은 하늘을 날아오는 독수리등의 맹금류와 땅위에서 다가오는 사자, 표범과 같은 맹수를 구분하여 위험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맹금류에 해당하는 위험신호는 당연하게도 같은 종들에게 나무 아래로 내려가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고, 반대의 경우에는 부리나케 나무 위로 뛰어오르게 할 것이다.

또한 인간과 여타 다른 동물들의 유전자 구조와 뇌 구조를 분석해보면 생각만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고 한다. 불과 몇 % 수준의 차이가 날 뿐이며 그나마 그 차이를 보이는 영역이 언어와 관련되었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요인이 인간에게는 언어를 선물했고 다른 동물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는가?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궁금증이 더해질 것이다.
인간이 지금과 같은 문명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언어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면, 아니 그 의사소통의 수준이 단순한 감정의 전달이나 사실의 전달 수준에 그친다면 지금과 같은 정교하고 엄청난 문명을 이루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말의 힘은 이런 것이다.
오늘 낮, 딸아이가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을 건넸다.
“아빠, 일요일인데 계속 집에만 있으니까 심심하다. 우리 자전거라도 탈까?”
이 이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1 - 나는 딸아이의 그 말을 듣고 하던 일을 잠깐 멈추었다.
2 - 딸아이와 옷을 갈아입고 두 대의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3 - 날도 춥고 차도 많은 비좁은 길이라 초등학교 운동장까지 걸어올라갔다.
4 - 가는 도중에 가게에 들러서 음료수와 쵸코바를 샀다.
5 - 학교 운동장에서 함께 자전거를 한 시간 가량 탔다.
6 -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간략하게 정리해도 이렇다.
물론 이 과정에도 무수히 많은 대화가 이어지고 서로에게 말을 하며 영향을 주었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번호까지 매겨가며 정리한 부분은“아빠~ 자전거라도 탈까?” 라는 딸아이의 말이 없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행동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말은 말 그 자체로 엄청난 위력을 갖는다.
내가 [언어의 진화]라는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게 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제 진화는 끝났다.’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아직 진화는 진행 중이다.’라고 했단다.
내 생각은 ‘진행 중’이다.
진화라는 것이 어느 날 문득 멈추거나 다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그 진화에 의한 차이가 어제와 오늘이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지구의 역사, 진화에 관련된 책들을 보면 몇 백 년이라는 시간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찰나에 불과하다.
몇 천 년, 몇 만 년, 몇 억 년쯤 되는 시간의 흐름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된다.
심지어 현생 인류의 탄생 시기에 대한 예측에서는 몇 만 년이라는 오차범위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맞는 말일 것 같다.

말이라는 것이 한 세대만 지나도 없어지거나 새로 생기는 말이 수두룩한데, 그 오랜 시간이 지났으면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신체 기관에는 거의 변화가 없을 테니 임신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과거 몇 백 년, 혹은 몇 천 년 전의 사람과 직접 마주치게 된다고 가정을 하면 분명 우리는 그들과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의 사이에서 임신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이다.

사실 이 책의 책장을 덮으면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누구도 최초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도 없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것은 확인이 불가능할 것이다.
먼 훗날, 언젠가는 사람에게서 말이 사라지고 또 다른 종 - 가령 조류나 어류 등 - 에게 언어가 선물로 쥐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결국 지금까지의 문명을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어를 선물받은 종이 이 지구를 자신들의 문명으로 뒤덮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진화는 진행 중이며 언어도 그 속에 함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초반부에 이런 가정이 등장한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받아들인 내용 중의 하나인데 내용은 이렇다.
“어쩌면 말은 인간의 몸을 숙주로 하는 또 다른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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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쌈 차차茶 - 인도여행, 90일간의 차밭살이 이야기
김영자 지음 / 이비락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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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쌈 차차茶 - 김영자 / 이비락 

지난 번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이후 또 하나의 [인디라이터 동기]의 단행본 리뷰이다.
오월 김영자 선생님은 인디라이터 동문 중에서도 최고령자(?) 그룹에 속하는 분이다. 하지만 젊은 사람 못지않게 팡팡 튀는 패션 감각은 그녀의 사회에 대한 관심을 대변하는 것 같다. 또한 젊은이들을 뻥뻥 차버릴 것 같은 열정은 그녀가 세상을 살아가는 그 뜨거운 열정을 보여준다.

인디 심화반에서 처음 만난 오월 선생님은 매 수업시간마다 PET병 하나 가득 홍차를 넣어서 가지고 오셨다. 바로 그녀의 책 아쌈 차차茶에 등장하는 바로 그 홍차 말이다. 뜨거운 여름, 그녀가 따라주는 차갑게 식힌 홍차는 이마의 땀을 닦아주기에 충분했다.
오월 선생님은 스스로를 ‘글도 못 쓰는 사람이 책을 내겠다고 종종거리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어쩌면 그 말도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오월 선생님이 국어를 배우던 시절과 지금은 맞춤법도 제법 달라졌을 것이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직업인 ‘아줌마’와 ‘사업가’ 둘을 거머쥐고 달려온 삶에서 글을 쓰는 시간은 충분치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그녀가 빽빽이 기록해둔 글과 틈틈이 찍은 사진을 엮어서 아담한 책 한 권으로 나왔고, 내가 자주 가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그녀의 책을 살 수 있는데 말이다.
분명한 것은 ‘열정과 용기가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평범한 진리이다. 오월 선생님의 책 [아쌈 차차茶]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 책의 원고는 예전 심화반 강좌를 들을 때 거의 읽은 것 같다. 하지만 심심한 A4복사지에 성의없이 프린트된 활자로 읽는 것과 이렇게 깜찍한 크기의 예쁜 책으로 나와서 매 페이지마다 사진과 함께 실린 글을 읽는 것은 그 재미와 감동에서 엄청난 차이를 느끼게 한다.

더구나 인도, 아쌈 여인들의 낭창낭창한 자태를, 비록 사진으로나마 살짝 엿볼 수 있으니 그 즐거움이 더하다.

책 표지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인도여행, 90일간의 차밭살이 이야기’ 

우리는 흔히 여행을 생각할 때 ‘스쳐가며 보는’ 것을 생각한다.
배낭을 메고 투박한 운동화나 튼튼한 등산화를 신고 잘 빠진 디카 하나를 들고 스쳐가며 본다.

여행지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 진정 어떤 모습인지 잘 모른다. 그냥 스쳐갈 뿐이다. 그러면서 디카 액정에 보이는 그림을 저장하기에 바쁘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블로그’‘카페’에 또는 ‘미니홈피’에 올려서 나의 여행을 증명해줄 ‘증거 사진’을 만들기에 바쁘다.
가끔 여행지에서의 예상하지 못한 로맨스를 꿈꾸기도 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또 다른 여행자와의 하룻밤을 상상하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의 여행이다. 기껏해야 사나흘 머물다가 떠나면 그 뿐이다.

그런 여행의 흔적이 그곳 사람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길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어쩌면 나의 등장으로 인해 그들의 삶에 아픔을 줄 수도 있고, 나를 통해 ‘어글리 코리안’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지만 그건 뒷전이다.

오로지 내가 지나간 그 궤적을 따라 증거를 만들고, 적당히 돈을 쓰면서 즐기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여행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쌈 차차茶]는 여행기가 아니다.

도대체 어떤 멍청한 여행가가 한곳에서 석 달씩이나 머물며 그들의 집에서 자고, 그들의 음식을 먹으며 그들과 함께 일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그 나라에서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빈한한 사람들과 말이다.

어쩌면 이 책은 삶의 기록이다.

낯선 이방인이 현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일상에 동화되어 지낸 90일의 흔적, 그것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 오월 김영자 선생님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 아줌마이다. 아니 그냥 아줌마가 아니라 강남, 그것도 대치동이라는 ‘대한민국식 상류사회’에서 생활하며 이벤트 사업을 하고 있는 말 그대로 ‘잘 나가는 강남 아줌마’이다.

그런 그녀가 인도의 아쌈이라는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90일간 함께 한 사람들은 인도의 ‘브라만’이 아니다.

그들의 신분은 '천민'이다. 물론 그들 스스로는 ‘불가촉천민’보다는 낫다며 스스로를 위안한다지만 어쨌든 그들은 평생 찻잎이나 따면서 살다가 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는 지금도 철저하게 신분계급이 존재하는 곳이다.
대한민국, 강남의 잘 나가는 아줌마가 인도의 아쌈 그 오지에서 ‘천민’과 과연 교감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김영자라는 이름은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제일 흔한 이름이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배웠던 국어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철수야, 가자.
영희야, 가자.
바둑이도 함께 가자.

철수, 영희만큼 흔한 이름이 ‘영자’이다.
영화제목도 있었던가? ‘영자의 전성시대’
그렇게 대표적인 대한민국 아줌마의 이름을 가진 그녀가 인도 아줌마와 과연 어떤 일들을 벌일까?

여행자에게 여행지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앞서 말했듯이 스쳐가며 그림만 저장하는 여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피사체’, 또는 사진을 위한 세트장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집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는 여행자에게는 단지 거리의 풍경, 집들의 뭉쳐있는 모습, 시장의 번잡함, 유흥가의 떠들썩함 정도가 스냅사진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녀에게 아쌈은 생활이었다.
아무도 부르는 사람이 없는 그곳을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주위에서는 그런 그녀를 만류하는 사람만 있었을 뿐이고, 그곳 사람들에게도 그녀는 어색한 이방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누군지 알아? 난 대한민국 아줌마야!’를 외치며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렇게 해서 ‘찻잎을 따며 생활하는’ 그들과 생활을 하게 된다.
토굴보다 못한 집에서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일하는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정보조차 찾기 어려운 아쌈에서, 대학교수인 현지 친구조차 극구 만류하는 차밭에 기어이 들어간 그녀는 그들과 살을 맞대고 산다. 말 그대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한솥밥을 먹는다’고 표현할 때는 그만큼 막역한 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그들과 한솥밥을 먹었다.

90일이라는 시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보통 3개월이라는 시간은 한 계절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아무리 춥다고 종종 거려도 석 달이면 끝난다. 더워 죽겠다고 에어컨을 끼고 살아봤자 역시 석 달이면 끝이다.
일상생활에서의 석 달은 딱 그만큼의 시간인 것이다.
석 달 전의 나나 지금의 나나 별반 다를 것이 없고, 그 때나 지금이나 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생활의 터전을 벗어나 낯선 이방인과 함께 그들의 사회 속에서 생활하는 석 달이라면 어떨까?

그 답이 이 책에 들어있다.
그녀가 경험한 석 달은 결코 짧지 않다.
토굴만도 못한 현지의 집에서 보낸 첫날,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며 ‘멍청한 선택’에 후회를 했다. 누구 하나 잡는 사람이 없는데도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한 오기, 또는 자존심 때문에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다지 모양 빠지지 않게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를 궁리하며 하루 이틀을 보내던 그녀는 점차 그들과 동화되고, 그 생활에 익숙해지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결국 아쌈을 떠나던 날, 그녀는 함께 했던 사람들과 펑펑 울며 이별을 한다.

석 달이라는 시간이 그녀에게는 ‘헤어지기에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인연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참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게 한다.
저자 스스로 ‘인생 후반기’를 살아간다는 그녀에게 그 석 달은 남은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인연을 만들었고 분명 그녀의 인생은 그 경험으로 인해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 그 속에서 그녀가 만나는 것들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옷 한 벌, 시장에서 파는 값싼 음식들에도 감격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현지 여인들을 보며 저자는 상대적 우월감을 느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또 다른 형태의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했다.
인도에서 파는 양배추로 만든 한국식 김치를 선보였고, 그들과 어울려 하쯔라는 술도 기울이며 신나게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들과 같이 찻잎을 따기도 했고 그렇게 언니, 동생이 되었다.

이 책은 그렇게 ‘살아가며 겪은 90일’을 기록한 것이다. 

술만 마시면 마누라를 개 패듯 패대는 남자, 그렇게 얻어맞아서 눈두덩이 퉁퉁 부은 여자.
열댓 살 어린 나이에 비슷한 또래의 남자에게 강간당한 여자는 결국 그 강간범과 결혼을 선택하게 되었단다.
‘없어도 너무 없는’ 삶을 살다보니 그 빈한함이 익숙해져버린, 꿈조차 꿀 기력도 없는 사람들.
차 농장 안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악행을 저지르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신분일 여행자에게는 비굴해지는 관리인.

 

여행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은 마네킹이 아니며, 그 마을과 풍경 역시 세트장이 아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이 책 [아쌈 차차茶]를 읽으며 비로소 그것을 실감했다.
그들도 사람이다. 비록 천민이라는 딱지를 평생의 카르마로 안고 살아가지만, 그렇게 평생 찻잎을 따고 그것으로 최저생계비에 턱도 없이 부족한 수입을 올리고, 그렇게 빈한하게 살지만 그들도 사람이다.

그들에게도 가슴 아픈 사랑이 있고 소중한 가족이 있으며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가치가 있다. 그들 역시 꿈을 꾸며, 보다 나은 내일을 바란다. 자식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가난과 아픔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고민하며 살아간다.

이 책은 서너 장 정도의 분량으로 한 꼭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며 읽거나,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며 읽기에도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아쌈이라는 지명이 지구 위 어느 지점쯤에 있는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아쌈이라는 지명이 조금은 친숙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제법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드는 궁금증 하나...
루이엄마 소마리는 떠나는 저자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언니, 꼭 다시 오셔야 돼요.”
과연 그 약속은 언제 지켜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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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을 신은 자전거 - 스타일리시한 라이딩을 위한 자전거 에세이
장치선 지음 / 뮤진트리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 - 장치선 뮤진트리 

장치선 작가가 이 책을 출간하고 어떤 모습으로 웃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부럽다. 젠장... 은 아니고 진짜 함께 웃으며 축하인사를 건네고 싶다.

인디라이터 심화반 수업을 함께 듣던 그녀는 그 뜨거운 여름 내내 이 원고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얼핏 생각하면 “여자가 쓴 자전거 이야기”는 왠지 무언가 살짝 어긋난 느낌이 든다. 물론 이것 역시 내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편견에 따른 감정적 오류이리라.

이 책 제목을 듣는 순간, 그런 편견이나 감정적 오류 따위는 그냥 날라가 버렸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니 이 책의 제목은 말 그대로 “촌철살인”에 다름 아니다.

촌철-살인 寸鐵-殺人 |상위어 : 살인, 촌철
발음 : 촌ː철살인
품사 : 명사 
한 치의 쇠붙이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뜻으로, 간단한 말로도 남을 감동시키거나 남의 약점을 찌를 수 있음을 이르는 말.

(다음 국어사전 발췌)

자전거가 하이힐을 신다니!
이거야 말로 제대로 이 책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해준 그녀만의 센스가 아닌가?
(처음 이 원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리뷰를 쓰게 된다면 꼭 이 말을 해야지!’하고 맘먹고 있었다. 드디어 써먹었다. ㅋㅋ)

보통 ‘책을 쓴다’라는 말을 듣거나 ‘작가’라는 직업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보통 ‘어떤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전문가쯤은 되어야 두툼한 책 한 권을 완성할 내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작가가 되고 싶다’라는 꿈은 보통 사람이 꾸기에는 너무도 높은 벽이라고 지레 포기하기 쉽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런 편견이 여지없이 깨진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장치선 작가의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라는 책이 돋보인다.
그녀는 이 책 곳곳에서 자신은 ‘자전거 전문가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그냥 편하게고 스타일리쉬하게 자전거를 타고 싶어 하고, 그렇게 타고있음을 스스로 언급하면서 아마추어 바이크 족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그녀는 자전거를 타기 위해 탱탱한 쫄복을 입지도 않고, 헬멧이나 보호 장구를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아버지의 추억 속에서 시장표 짐자전거를 이야기하고 있고 자신이 타는 자전거는 수백수천을 호가하는 장비가 아니라 십만 원 언저리면 살 수 있는 접는 자전거라고 말한다.

자전거 전문가라 말할만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코웃음을 칠만한 수준의 자전거를 갖고 있고, 여전히 능숙하게 라이딩을 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입담은 라이더들의 코를 누르기에 충분하다.
어쨌든 몇 십 년 자전거를 타고, 차 한 대 값을 투자한 사람들도 자전거에 관한 책 한 권을 내지 못했지만 그녀는 이렇듯 멋지게 “하이힐을 신은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책이 아마추어 자전거 애호가가 쓴 적당한 수준의 글장난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책을 들여다보면 여기저기에서 그녀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뒤졌는지 알 수 있다.
단순히 인터넷을 뒤져서 글 몇 줄 복사해온 수준은 물론 아니다.

[Part 2 스타일로 즐긴다]에는 그녀가 직접 발로, 아니 페달을 밟으며 두 눈으로 확인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북촌에서, 청담동에서, 홍대거리는 물론 저멀리 상주에 직접 가서 거리를 누비며 취재한 글을 만날 수 있다.
그녀는 북촌에서 페달을 밟으며 느끼는 감정과 함께 곳곳에 숨은 카페를 소개하고, 맛집을 알려주고 있다.
심지어 자전거를 세워두기 적당한 카페를 찾아 헤맨 이야기는 제법 그럴듯하다.
외제차가 즐비한 청담동에서 당당하게 ‘자전거도 발렛파킹이 되는지’ 확인하기 위한 도심 속 모험담을 이야기한다.
홍대거리, 그 사람 많은 곳에서는 과연 어떻게 페달을 밟을 수 있을까? 그 답 역시 이 책에 숨어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상주라는 도시가 대한민국 최대의 자전거 천국인지도 몰랐다.

전문적으로 스피드를 즐기거나 험로를 찾아서 떠나는 MTB매니아들에게는 이 책은 심심하다 못해 하품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처럼 생활 속에서, 그냥 한강변을 따라 바람을 즐기고 싶거나 동네 한 바퀴 돌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싶어 하는 사람들, 또는 연인과 함께 자전거 데이트를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즐겁고 유쾌한 자극을 주기에 충분한 책이다.

장치선 작가의 자전거가 다음번엔 어떤 신발을 신을지 궁금하다.

이 책을 덮으면서 문득 드는 생각 하나...
‘맞다. 내 차 뒤에 접는 자전거 한 대가 실려 있구나.’
아침에 당장 바람 빠진 바퀴를 팽팽하게 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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