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침대와 책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 웅진지식하우스

'나는 언제부터 책을 읽었을까?' 내가 지나온 시간을 조금씩 살펴보았다.
문득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대략 대여섯 살, 혹은 예닐곱 살 언저리였을 것이다. 친척 집에 놀러갔었던 모양이다.
책꽂이에서 서유기를 보곤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너무 재미있어서 푹 빠져 있는데 삼촌이 자꾸 옆에서 밥을 먹으라고 말을 건다. 대답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재미있어서 대꾸도 하지 않고 읽고 있으니까 책 읽는 나를 그대로 들어서 밥상 앞에 앉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책을 읽었다. 어린이 동화용으로 나온 책이니 아무리 글이 많다고 해도 분량이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밥숫가락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공부를 잘 해서 성적을 올리면 으레 무슨 무슨 전집, 위인전 뭐 이런 걸 선물로 받곤 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가끔 나는 책을 읽으면서 모험을 하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세상을 향해 한발 내딛는 느낌으로 책 표지를 펼친다.
그 책에는 평소에 내가 궁금해 하던 세상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나는 활자속에서 그 비밀을 찾는 모험을 하는 것이다.

요 몇 년 새 나는 제법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인문학, 심리학, 진화론 분야의 책에 주로 손이 간다.
읽다보면 해답은커녕 오히려 미궁 속으로 빠지는 느낌에 한숨이 나올 때도 있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게 되기도 한다.
평소에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던 의문들, 딱히 누구에게 물어보기도 뭣해서 그냥 묻어두고 있던 것들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만날 때면 나와 같은 의문을 가졌던, 게다가 그에 대한 해답을 알려주는 저자에게 고개가 숙여지기도 한다.

"침대와 책"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를 배열해서 제목으로 삼은 이 책의 저자는 라디오 PD라고 한다. 매일 밤마다 졸음에 겨워 견딜 수 없는 그 순간까지 침대 속에 파묻혀서 책을 읽는다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을 읽고 쓰는 글이라고 해서 무조건 줄거리를 적어야 한다거나 책을 읽은 느낌을 나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맞는 말인데 나는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그다지 심각하게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 사실이 나를 당황하게 한다.
'나도 어지간히 선입견에 사로잡혀 사는 놈이구나.'라는 생각도...

저자는 자신의 감정과 책에서 만난 문장을 치환한다.
자신의 감정을 구구절절이 나열하지 않고 자신이 읽었던 책의 문장을 빌려온다.
기쁠 때, 슬플 때, 상사에게 깨지고 났을 때, 친구가 힘들어할 때, 사랑하고 싶을 때, 술마시고 싶을 때, 그리고 그냥 살아가면서 그저 그런 날...
그 모든 날들, 그 모든 감정을 다른 작가의 글을 빌어 설명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처방전마저 같은 방법으로 찾아낸다.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저자의 표현력은 참 인상적이다.
가장 내 눈길을 끌었던 표현은 이거다.
"나는 그를 아연이라 부른다."
저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아연으로 부른다고 했다. 이유는 그녀가 읽었던 책 <백년의 고독>에 나오는 문장 때문이다.
"그는 뻬뜨라 꼬떼스의 침실 지붕을 아연판으로 덮어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솟아오르곤 하던 그녀에 대한 깊은 친밀감을 오롯하게 맛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마꼰도에 최초로 아연판을 가져온 사람이 되었다."

아연판과 사랑하는 사람을 연결 짓는 <백년의 고독>이나 그 문장을 기억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아연'이라는 호칭을 선사하는 저자나 참 상상력이 대단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읽은 책에 대한 궁금증은 일지 않았다.
꽤나 많은 책을 소개하고 있음에도 내 눈길은 그 책의 제목이 아니라 그 책에서 저자가 선택한 문장에 머물렀다.
그리고 저자만의 '문장 활용법'에서 언뜻 보이는 감수성이 부러웠다.
아마 저자는 무척 예민하고 날카롭게 벼려진 감수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감수성이 이 책 곳곳에서 저자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드러난다.

낭중지추, 송곳은 주머니에 감추어도 뚫고 나온다고 하던가?
'침대와 책'에서 드러나는 그녀만의 날카로운 송곳에 찔린 무디기만 한 내 감수성이 아파한다.
나의 무딘 감수성에 통증을 선물한 저자의 송곳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앞으로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할 일이 있으면, 나는 저자를 송곳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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