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황보영조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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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주 불편한 책이다.

만약 당신이, 역사의 선순환발전이라든가, 민주주의의 이상론적 목표라든가, 혹은 웹 2.0에서 말하는 참여와 집단지성등의 가치관을 믿고 있다면 페이지마다 불편한 문장들이 가득하다. 아니, 불편하다 못해 분노를 느끼게 되는 문장들로 수두룩하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

대중은 자신의 삶을 우수한 소수로 구성된 상층권위에 맡길 필요가 있다. 우수한 자들이 없다면 인류는 본질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대중이 독자적인 행동을 시도하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는 일이다. 진실로 반역이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거스르는 경우다.

문명의 진보는 문명의 배후를 열심히 배우고 많은 경험을 하는 것, 즉 역사를 배우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역사지식은 새로운 상황에 처한 삶의 갈등에 적극적인 해결책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시대에 범한 순진한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한다. 대중의 행동은 즉흥적일뿐 아니라, 오랜 기억도 역사의식도 없는 사람들에 의하여 좌우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수한 인간은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데 반해, 평범한 인간은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자신에게 만족한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은 대중이 아니라 우수한 인간이다. 우수한 인간은 어떤 탁월한 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지 않을 경우 그 삶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그는 봉사의 필요성을 압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 이런 필요성이 부족할 때 그는 불안감을 느끼며, 자기를 강제할 더욱 복잡하고 힘겨운 새 규범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규율에 따라 사는 삶, 곧 고귀한 삶이다. 고귀함은 권리가 아니라 요구와 의무를 통해 드러난다. 곧 고귀한 의무(Noblesse oblige)이다. “제멋대로 사는 것은 평민의 삶이고 귀족은 질서와 법을 동경한다.”(괴테) 귀족의 특권은 본래 양도나 은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획득된 것이다.

천재는 자신과 바보의 차이가 언제나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는 것에 놀란다. 그래서 눈앞에 닥친 어리석음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런 노력 속에서 지성이 존재한다. 반면에 바보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분별력이 뛰어난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어리석음 속에 부러울 만큼 평온하게 안주한다. 마치 서식하는 구멍에서 곤충을 끌어낼 방법이 없는 것처럼, 바보를 어리석음에서 끌어내어 잠시나마 암흑세계를 벗어나게 하고 습관에 젖어 있는 멍청한 시각을 보다 날카로운 다른 시각과 견주어보게 할 방법은 없다. 바보는 평생 바보고 빠져나올 구멍도 없다. 그래서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는 어리석은 자가 사악한 자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말했다. 사악한 자는 이따금 쉴 때가 있지만 어리석은 자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귀족이란 용어를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현존 상태에서 의무와 요청의 세계로 뛰어드는 용감한 삶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고귀한 삶은 통속적이거나 소극적인 삶과 대조를 이룬다. 소극적인 삶은 외부의 힘이 탈출을 강제하지 않는 한 정지 상태로 자기 자신을 격리시킨 채 언제까지나 그 속에 안주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식의 사람을 대중이라고 부른다. 무리가 많기 때문에 대중이 아니라 소극적이기 때문에 대중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히 플라톤식 철인정치에 경도된 엘리트주의자의 푸념이라든가, 혹은 시대착오적인 세습귀족예찬론자의 헛소리로 치부하기는 곤란하다. 실제로, 대중에게 권력이 주어진 것을 ‘발전’으로 볼 경우에만 오르테가의 이런 주장이 ‘반동’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르테가는이 책에서, 실제로 대중에게 권력이 주어진 것을 ‘발전’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듯 하다. 이러한 주장은,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대두 등의 강력한 증거로 뒷받침되고 있다.

오해를 피하자면, 오르테가가 말한 “대중은 게으르고, 오만하고, 무지하며 자만에 빠져있다 “라는 명제는, “대중이 그러하다”라는 결과라기 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대중이다”라는 원인으로 파악해야할 것이다. 또한 오르테가가 말하는 ‘귀족’이란 유럽의 역사 속에 보이는 봉건주의적 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소수 - 고귀한 노력을 거쳐 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앞장섰던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진정한 사회의 진보는 ‘소수’에 의해 이루어지고, 대중은 그 ‘소수’를 잘 따라올 때 진정한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인데, 한편 오르테가는 이 ‘소수’가 소위 말하는 ‘전문가’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전문가들이란 자신의 전문영역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식자’임에도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는 곳에까지 끼어들어 대중을 오도하는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자유민주주의는 대중들에게 권력을 쥐어줬지만, 대중들은 지금까지의 사회를 발전시켜온 ‘깨어있는 소수’의 합리적 권위를 벗어나는 반동을 일으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것은 역사의식과 시대적소명에 대한 반역이나 다름없다는 것이고, 이것이 이 책의 제목 “대중의 반역”의 뜻이다.

글쎄, 아마도 대부분의 좌파적 지식인들, 혹은 시장의 합리성이나 대중권력의 선성을 믿는 이들에게는 이 무슨 말도안되는 소리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국익을 위해 윤리따위는 접어둬도 된다”거나, “내가 재미있게 보았으니 평론가들의 혹평은 가치없다”거나, “XX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 같은 대한민국을 보고 있자면 오르테가의 말에 딱히 반대를 할 명분을 찾기 어렵다.심지어 이런 정치적인 주제와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IT쪽에서도 집단지성은 단지 허구일 뿐이다라는 강한 반증이 튀어나오는 바에야, 애초에 대중에게 권력을 주는 것 자체가 과연 올바른 일인가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보게 한다.

물론 이 책을 단순히 대중권력에 대한 반동주장을 담고 있는 책으로 치부하기는 곤란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대중의 반동성을 어떤 식으로 승화시켜 역사의 발전을 향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유럽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그러한 고민에 대한 훌륭한 대안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아쉬운 점은, 오르테가 자신이 처한 시대적, 역사적, 지리적 여건이 그의 이론에 현실적인 제약을 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점. 그가 1930년 스페인 사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여독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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