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고…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다 읽고 정말이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전율만이 온 몸을 휘감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 내 나이 스물에 난 전혜린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 때 최초로 내 인식의 세계를 일깨우고 넓혀 주었던, 그래서 내 삶의 정신적 지주의 표본으로 삼았던 사람이 바로 전혜린이었다. 그녀가 체험했던 뮌헨의 슈바빙 지대에서의 삶을 읽으면서 난 최초로 독일이라는 이국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뮌헨의 몽마르트르라고도 하는 슈바빙은 가장 정신이 자유로운 곳. 목적을 가진 생활 때문이라면 내일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 생활, 따라서 온갖 물질적인 것에서 해방되어 타인의 이목에 구애되지 않는 생활을 하는 곳. 언제나 아무도 안 사는 그림을, 안 읽을 시를 쓰면서 굶다시피 살면서도 오만과 긍지를 안 버리는 슈바빙 구역에 사는 그들 모두의 자유로운 생활을 나는 미치도록 동경했다. 인종적 편견이 없고, 히틀러 정권 밑에서의 레지스탕스도 완강할 수 있었던 슈바빙. 끊임없는 탐구와 실험과 발표가 전통이나 인습에 반기를 들고 행해지고 있는 곳이 슈바빙이었다.

까만 골덴 바지와 까만 쉐타를 입은 젊은이들이 한 잔의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몇 시간이라도 토론을 해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는 무관심한 음식점의 분위기가 몹시 부럽기도 했다. 뮌헨에 가면 제일 먼저 그녀가 자주 들렸던 제에로오제라는 카페에 가서 그녀의 고독을 피부 깊숙이 느껴보고, 그 곳의 젊은이들을 직접 내 눈으로 만나고 싶었다.

독일 대학생들의 광적일 정도의 공부에의 정열, 온갖 낭비에 대한 극단적인 인색함(특히 시간), 그들은 대학 생활 4년간을 문자 그대로 주야를 안 가리고 인식에 바치고 있었다. 언제나 완전한 정신이 집중 통일되어 있는 것, 의식이 활짝 깨어 있는 것, 지식을 지식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독일 대학생의 일반적인 특질인 것 같다고 그녀는 말한다.

딸 정화를 관찰하며 쓴 독특한 필법의 육아 일기는 생생한 감동을 자아내게 했다. 그렇게 소중한 보물인 정화를 두고 그녀는 어떻게 삶을 마감할 생각을 했을까? 그녀의 글을 읽는 동안 내내 그녀가 너무도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임을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녀의 글에서 이미 죽음의 카타스트로프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음과 같은 글에서 난 그녀의 죽음을 서서히 예감했다.

그렇다. 그녀는 삶에 너무나 철저했으면서도 늘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느끼지 않았을까? 그녀는 먼 곳에의 그리움을 갖고 있었다.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을 그녀는 갖고 있었다. 집시의 생활이 가끔씩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된 그녀였다. 오염되지 않은 원시적이며 야성적인 순수를 갖고 있는 바다를 보며 그녀는 충만해 했었다. ]

그러나 때때로 그녀는 아주 작은 것으로 만족하는 보통 여자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 지금 나는 아주 작은 것으로 만족한다. 한 권의 책이 맘에 들 때 또 내 맘에 드는 음악이 들려올 때, 또 마당에 핀 늦장미의 복잡하고도 엷은 색깔과 향기에 매혹될 때 또 비가 조금씩 오는 거리를 혼자서 걸었을 때, 나는 완전히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 진한 커피, 향기로운 포도주. 생각해 보면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들이 너무 많다.' .................................

그녀는 서른 둘의 나이로 겨울에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을 떠났다. 이 세상에 사랑하던 모든 것을 남기고 떠났다. 그녀는 어쩌면 7,80을 살다 간 어떤 인생보다도 온갖 열정으로 쏟아 부은 일생을 살다 간 자유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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