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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청거리는 오후 ㅣ 박완서 소설전집 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1993년 5월
평점 :
품절
휘청거리는 오후. 멋드러진 제목 안에 이렇게나 우울한 내용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난 이제 열 아홉살.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 준비에 가슴 벅차 있는, 마냥 행복하고만 싶은 나이다. 그런 나에게 인생이 이 정도인가 하는 회의를 갖게 한 작가가 갑자기 원망스러워짐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해본다.
한창 젊음을 만끽할 20대가 저물어감을 느낄 때부턴 대체 무슨 맛으로 살아가나..내가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던건 이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30이 되어도, 40이 되어도...70이 되어도...다 그 나이에 걸맞는 행복이 있다는 말 말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초희 엄마의 모습은 나의 그런 막연한 기대를 깨버리기에 충분했다.
허성씨가 사랑했던 곱디 고운 처녀와,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도록 바가지를 긁어대는 아줌마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힘들다. 결혼을 기점으로 여자는 다 변하는걸까? 혹시 나도 그렇게 변하게 될까? 정말 그렇다면 내가 진심으로 행복해 할 수 있는 시기는 결혼 전, 그러니까 지금부터 10년 안팎 정도가 되겠다.
허구에 불과한 소설 한 편에 이런저런 심각한 생각들로 '휘청거리는' 내가 우습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은 현실을 반영한다는걸 간과할 수가 없다. 게다가 날 더욱 심각한 생각 속으로 몰아간 인물들은 초희, 우희, 말희 세 딸이었다. 책을 읽는 중간중간 허성씨의 모습과 우리 아빠의 모습이 교차되는 것을 불안하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바꾸어 놓은 장본인들이다.
엄마와 딸들의 수다가 왜 역겹고 짜증나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던져준 장본인들이다. 평소 아빠에게 그렇게 착한 딸은 되지 못하는 나도 세 딸의 뻔뻔스러움에 치를 떨 수 밖에 없었다. 다들 대학 교육까지 받은 엘리트들이란다.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다. 그런데 왜 그때까지도 '부모님=돈'이라는 어리디 어린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이건 허구다.. 설정이다.. 이런 생각으로라도 분노를 조금이나마 삭이고 싶지만 뜻대로 되질 않는다. 그리고 공장 기계가 망가뜨린 아버지의 흉한 손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비록 미관상 흉할지라도, 적어도 세 딸과 부인에게는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아버지의 손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딸은 그 손을 뿌리치며 아빠 때문에, 아빠의 그 문둥이 손 때문에 '어마어마한' 집안으로부터 파혼 당했다고 소리친다.
걱정이 된다. 저런 딸 낳으면 어떡하나ㅠㅜ 이 책은 정말 나의 어린 환상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달콤한 결혼생활, 여자의 순결, 그리고 공주같은 딸자식....이 정도가 나의 환상이었다.
하지만 아직 난 아름다운 세상과 행복할 나의 미래를 믿는다. 혹 그 믿음이 깨진다면, 그 때가서 다시 한 번 이 소설에 빠져보리라. 그리고 공감하리라. 그 전엔 절대 펼치고 싶지 않다. 난 휘청거리지 않고 곧추서서 내 인생의 오후를 보내겠다. 2002.1.21.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