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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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쪽

아마카는 십 대이고 말랐다는 점만 빼면 제 엄마의 판박이였다. 그 애는 이페오마 고모보다도 더 빠르고 결단력 있게 걷고 또 말했다. 눈만 달랐다. 아마카의 눈에는 이페오마 고모 같은 무조건적인 따스함이 없었다. 그것은호기심 어린 눈, 많은 질문을 하지만 많은 대답을 받아들이지는 않는 눈이었다.

124쪽

"오빠가 왜 이페디오라랑 사이가 안 좋았는 줄 알아요?"

"이페디오라가 오빠 면전에 대고 자기 생각을 말했기 때문이에요. 이페디오라는 진실을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죠. 하지만 오빠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진실에 대해서는 꼭 싸우려 들잖아요. (………) 아버지가 조상님 방식을 따르기로 한 것에 대해 하느님이 벌할실 거라면 오빠가 아니라 하느님이 벌하시게 놔두란 말이에요."



165쪽

나는 한 번도 대학에 대해, 어느 학교에 가고 무엇을 전공할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때가 되면 아버지가 결정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171쪽

"은수카에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단다." 아마디 신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는 가수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내 귀에 가져온 효과는, 어머니가 내 머리카락에 바른 페어스표 베이비오일이 두피에 가져오는 효과와 똑같았다. 저녁 식사 때 나는 그의 영어 섞인 이보어 문장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내 귀가 말뜻이 아니라 말소리를 좇았기 때문이다. 그는 참마와 채소를 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입에 든 음식을 삼키고 나서 물을 홀짝이기 전까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페오마 고모의 집에 자기 집인 양 편안해했다. 어느 의자에 못이 튀어나왔는지 알았고 남의 옷에서 실밥을 떼어 줄 수 있었다. "그 못은 내가 저번에 박아 넣은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더니 오비오라와는 축구얘기를, 아마카와는 정부가 얼마 전에 구속한 기자 얘기를, 이페오마 고모와는 가톨릭 여성 단체 얘기를, 치마와는 이웃집 비디오 게임 얘기를 했다. 사촌들은 어제만큼이나 재잘댔지만 아마디 신부가먼저 무슨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기에 달려들듯 대답을 쏟아 냈다.



180쪽

"예쁘지 않니?" 이페오마 고모가 물었다.

"저것 좀 봐. 꼭 하느님이 붓으로 장난치신 것처럼 초록색, 분홍색, 노란색이 섞인 잎을."

"네." 내가 말했다. 이페오마 고모가 나를 계속 쳐다보길래 나는 고모가 정원 얘기를 할 때 내 목소리에 오빠 같은 열의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궁금했다.





216쪽

아마디 신부의 자동차에서는 그의 냄새, 맑은 쪽빛 하늘을 연상시키는 산뜻한 냄새가 났다. 지난번에 그를 봤을 때는 반바지가 무릎 한참 아래까지 내려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위로 당겨 올려져서 검은 털이 드문드문 난 근육질 넓적다리가 드러났다. 그와 나 사이의 공간이 너무 좁고 너무 밭았다. 이제껏 신부에게 그렇게 가까이 앉았던 건 고해 성사 하는 회개자였을 때뿐이었다. 하지만 아마디 신부의 향수가 폐부 깊숙이 들어와 있는 지금은 회개하는 마음을 갖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죄책감을 느꼈다. 내 죄악에 집중할 수 없어서, 그가 얼마나 가까운 지 외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서.


캄빌리가 아마디 신부에게 향한 마음을 느끼면서 떠오른 작품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가시나무 새]다. 정말 마음 절절한 울림을 주었던 원작과 영화까지 새록새록 떠올랐다.

 
자료 출처: 알라딘 문고

222쪽

"그보다는 훨씬 복잡해, 캄빌리. 어렸을 때 마음속에 의문이 많았는데 사제가 되는 게 해답에 가장 가까웠어." 그 의문이 무엇인지, 베네딕트 신부도 같은 의문을 가졌을지 궁금했다. 그러고 나서 아마디 신부의 매끈한 피부를 물려받는 자식이 없으리라는 것, 그의 각진 어깨가 천장 팬을 만지고 싶어하는 아들의 다리를 받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자 터무니없지만 강렬한 슬픔이 느껴졌다.


260쪽

어머니가 시선을 피했다.

"은네, 너는 쉬어야 해."

"이페오마 고모를 불러 주세요. 제발요."

어머니가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울어서 퉁퉁 부었고 입술은 갈라져서 허옇게 일어나 있었다. 한편으로는 일어앉아 어머니를 안아 주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밀어버리고 싶었다. 아주 세계 밀쳐서 의자에서 굴러떨어지게 만들고 싶었다.

268쪽

"기운 차린 걸 보니 좋구나." 아마디 신부가 마치 내가 온전히 다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훑어보며 말했다. 내가 미소 짓자 그가 포옹하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의 몸이 내 몸에 닿는 것이 긴장되면서도 기분 좋았다. 다시 몸을 떼면서 치마와 오빠와 오비오라와 이페오마 고모와 아마카가 잠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디 신부와 단둘이 있고 싶었다. 그가 여기 있어서 마음이 따뜻하다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그의 피부색과 똑같은 구운 점토 색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그에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85쪽

오빠는 닭을 집어 들어 아마카가 가져온 대야게 담긴 뜨거운 물에 던져 넣었다. 오빠한테는 어떤 정확성, 차갑고 냉정한 외곬인 면이 있었다. 오빠는 빠르게 깃털을 뽑기 시작했고 닭이 백황색 껍질로 덮인 홀쭉한 형태로 줄어들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깃털이 다 뽑힌 닭을 보고서야 닭 목이 그렇게 길다는 걸 알게 되었다.

334쪽

"왜 거절한 거야?" 오비오라가 물었다.

"나도 몰라. 자기들 기분이 좋으면 주고, 안 그러면 거절하는거지. 네가 어떤 사람 눈에 쓸모없는 인간으로 보이면 일어나는 일이란다. 우리는 어느 방향이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걷어차도 되는 축구공 같은 거야."

337~338쪽

나는 아마디 신부의 독일 주소를 공책에 베끼고 또 베꼈다. 쓰는 방식을 계속 달리해 가며 또 베끼고 있을 때 그가 돌아왔다. 그는 내게서 공책을 빼앗아 덮어 버렸다. 나는 "보고 싶을 거예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대신 "편지할게요."라고 말했다.

"내가 먼저 보낼게." 그가 말했다.

눈물이 뺨을 흘러내린 줄 몰랐다가 아마디 신부가 팔을 뻗어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문질러서 닦아 줬을 때에야 알았다. 그리고 그는 나르 두 팔로 감싸 꼭 끌어안았다.

360쪽

나는 아마디 신부가 말하는 것을 믿는다. 또박또박 쓴 그의 기울어진 필체를 믿는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말했고 그의 말이 참이기 때문이다.

나는 새 편지가 오기 전까지 그가 가장 최근에 보낸 편지를 늘 가지고 다닌다.

그의 편지는 내 마음속에 있다.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길고 자세하기 때문에, 내가 가치 있는 사람임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내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몇달 전 그는 내가 이유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는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일, 그냥 이유가 존재하지 않거나 필요치 않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362쪽

오빠가 이곳에 들어온 뒤 한 달이 지날 때마다 조금씩 굳어 갔던 그 눈은 이제 야자수 껍질처럼 딱딱해 보인다. 우리에게 눈의 언어가 정말 있었던 적이 있는지, 아니면 전부 내 상상이었는지 헛갈린다.


나이지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한 십대 소녀의 이야기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로부터 멀다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캄빌리가 원하는 것이 국가와 인종, 시대와세대를 넘어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하고 누구나 누려야 마땅한 어떤 것이라면, 여전히 그것을 얻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분투하고 투쟁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한국 사회에 속한 우리와도 전혀 무관한 일이 아님을 떠올린다면,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던지는 메시지는 언제나 유효하고 의미 있는 질문일 수밖에 없다.

-- 딸에 대하여 저자, 김혜진 --


재미있게 읽혔다.

그리고 몇해전에 관람했던 사우디 아라비아 영화 [와즈다]가 떠올랐다. 

<이 영화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들은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왜 여자는 자전거를 탈 수 없죠?" 세상을 바꾼 10살 소녀의 유쾌한 반란!

제 이름은 와즈다. 요즘 최고의 관심사는 바로 자전거!

이웃집 압둘라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가 항상 부러웠는데 마침 단골 가게에 내 맘에 쏙 든 초록색 자전거가

새로 들어왔죠! 엄마에게 졸라봤지만 여자는 자전거를 타면 아이를 못 낳는다며 절대로 안 사주신대요.

팔찌도 만들어 팔아보고, 몰래 연애편지도 전달하면서 돈을 모아봤지만 800리얄까지 언제 모으죠? OTL...

그런데 학교에서 무려 1000리얄이라는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린 코란 경전 퀴즈대회가 열린대요!

이건 분명 제가 대회에서 우승하고 자전거를 살 거라는 신의 계시임이 분명해요!

꿈 속에서 저는 이미 제 초록색 자전거를 타고 압둘라와 경주를 하고 있었는걸요?

대회는 앞으로 5주 후!

전교의 문제적 학생이었던 와즈다는 과연, 대회에서 우승하고 자전거를 탈 수 있을까?

자료 출처: 네이버 영화


"집에서도 매일 지켜야 하는 일과표가 있어?" 아마카가 물었다.

"재밌네. 그러니까 이제 부자들은 매일매일 뭘 해야 할지도 결정을 못해서 그걸 가르쳐 줄 일과표가 필요하구나." - P158

"저항은 때때로 좋은 것일 수도 있어." 고모가 말했다. "저항은 대마초 같은 거거든. 제대로만 쓰면 나쁜 게 아니야." 고모가 한 말의 신성 모독성보다 그 진지한 말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 P182

가끔 아마카와 파파은누쿠가 대화를 할 때면 두 사람의 낮은 목소리가 서로 휘감겼다. 그들은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이해했다. 두 사람을 보면서 내가 절대 가질 수 없을 뭔가를 향한 갈망을 느꼈다. 일어나서 나가고 싶었지만 내 다리가 내 것이 아닌 양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워서 부엌으로 갔다. 파파은누쿠도 아마카도 내가 나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P205

나는 정원의 시든 아가판투스꽃이 줄기에서 떨어지는 것을 쳐다봤다. 늦은 아침 바람에 파두가 바스락거렸다.

"소리 지를 필요 없어, 아마카." 마침내 내가 말했다. "난 오라 잎을 다듬을 줄 모르지만 네가 가르쳐 주면 되잖아." 그런 차분한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몰랐다. 나는 아마카를 쳐다보고 싶지 않았고, 그 뱁새눈을 보고 싶지 않았고, 그 애를 자극해서 또 한 소리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킥킥대는 소리가 들리길래 내 귀를 의심했지만 아마카를 보니 역시나 그 애가 웃고 있었다.

"너도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수도 있구나, 캄빌리." 아마카가 말했다.

그러고는 오라 손질법을 가르쳐 줬다.

- P211

아마카가 말했다.

"게다가 이제는 성모님이 아프리카에 나타나실 때도 됐잖아. 왜 항상 유럽에만 나타나시는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아? 성모님은 원래 중동 출신이시라고." - P174

"저건 히비스커스죠, 고모?" 오빠가 철조망에서 가까운 나무를 쳐다보며 물었다.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있는지 몰랐어요."

이페오마 고모가 웃으면서, 아주 진해서 거의 파란색에 가까운 보라색을 띤 꽃을 만졌다.

"다들 처음엔 그렇게 반응해. 내 친구 필라파가 식물학 교수인데 여기 살 때 실험을 많이 했단다. 봐, 이건 하얀 익소라꽃인데 빨간색만큼 활짝 피지 않아." - P162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오빠랑 나는 차에서 현관까지 가는 사이에 홀딱 젖었다. 빗줄기가 너무 세서 히비스커스 덤불 옆에 작은 웅덩이가 파여 있었다. 젖은 가죽 샌들 속 발이 가려웠다. 아버지가 거실 소파에 웅크린 채 울고 있는데 너무 작아 보였다. 키가 커서 문을 지나갈 때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바지를 맞출 때는 항상 남들보다 천을 더 써야 하는 아버지가 지금은 자그마해 보였다. 꼭 구겨진 천 두루마리 같았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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