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딜러리엄
로렌 올리버 지음, 조우형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사랑이 축복받아 마땅한 일이 아니라 고쳐야 할 질병으로 여겨지는 세상....
말도 안된다 못박기에는 어느정도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좌절을 유발하는 동시에 기쁨과 행복이란 치료약을 선사하기도 하는 근본적인 감정이 사랑이기에 이것만 없으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문제가 되는 일도 없는 통제 가능한 세상이 될 거라는 발상이 가능한 것이다. 사랑만 없으면 만사가 평온할거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 된 듯한 이 책은 어쩌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법한 사랑에 대한 원망과 혼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랑이 치료해야 할 병으로 취급되는 세상에서 산다면 사랑에 의해 울고 웃는 일은 아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배신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고 치정에 의한 살인 같은 극단적이 사건도 더이상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공평하고 평온한 삶이 기쁨과 행복을 안겨줄 수 있을까? 오히려 사람들은 사랑이란 감정과 함께 사랑이 동반하는 많은 것들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정도는 평온한 세상을 위해서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기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과 폭격으로 인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도시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다. 그들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사랑이란 격렬한 감정을 질병으로 규정한다. 만 18세가 되면 누구나 평가를 받아야 하고, 치료 후에는 국가가 정해준 상대와 결혼해 정해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심지어 자녀조차 국가가 배당한 인원만 가능하다.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기본적인 감정의 자유가 빼앗긴 삶을 별 무리없이 받아들인 사람들은 마치 평온한 삶을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듯 하다.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좋은 집안의 사람과 짝이 되고 그래야만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레나의 엄마는 사랑이란 질병에 감염되어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 후 레나는 이모집에서 살게 된다. 레나 역시 정해진 법에 따라 평가를 받기 위해 준비하고 레나의 이모는 레나가 엄마처럼 그 병에 걸릴까 염려되어 평가일에 레나가 모범적인 답변을 하도록 몇번이나 다짐을 받는다. 그러나 레나는 마음 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의문이 고개를 내밀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답변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평가를 망치고 만다. 천만다행으로 평가장에서 일어난 소란 덕에 그날의 평가는 무효가 되고 재평가를 받은 레나는 좋은 점수를 얻어 무사히 배우자를 지목받는다. 레나를 돌봐준 이모의 부유한 가정환경 덕분에 시장의 아들과 결혼하게 된 레나는 평가일에 본 알렉스를 우연히 다시 만나고 그 후로 감정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모든 감정이 통제된 세상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사는 삶이 과연 행복한 것인지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문과 불신이 사랑이란 감정에 불을 붙이고, 레나와 알렉스는 자신들에게 찾아온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삶을 버린다. 편안한 인생 대신 자유로운 인생을 꿈꾸며 이들이 택한 길은 위험하지만 그렇기에 더 가치있는 것이었다.
가늘고 길게 살고자 한다면 인생에서 사랑을 배제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사랑 때문에 애태울 일도 눈물 흘릴일도 없을테니..그러나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지로 통제하는 것은 곧 인간의 행복 그 자체를 빼앗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머리와 마음으로 긴 시간을 살아간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느낄 수 없다면 행복도 없다. 아프더라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어 다행이다.
지금이야말로 평가에 대해 절대로 의구심을 가져서는 안 될 시기인데. 나는 마음속으로 해나를 원망했다. 이건 다 그 애가 밖에서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했기 떄문이다. '정말로 행복해지려면 가끔 불행을 견디지 않으면 안 돼.' '제한된 선택.' '우리는 우리를 위해 선택된 사람들 중에서 선택할 수 있을 뿐이야.'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선택을 해 준다는 게 나는 좋았다. 스스로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선택하도록 할 필요가 없다는 점 역시도. 해나 같은 사람에게야 옛날 같은 방식도 괜찮을 것이다...(중략) 해나 같은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서 제정신인 남자가 나른 선택하려 들리 없다. 그런 이유로 나는 '승인된 상대'라고 인쇄된 깔끔한 서류를 받아 볼 수 있다는 게 도리어 기뻤다. 아무도 나를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았다.(아주 가끔 누군가가. 단 한 순간이라도 나를 예쁘다고 여겨주길 소망하긴 하지만 말이다.) 설령 내가 눈이 하나밖에 없다고 해도 아무 상관없을 것 같다. P.33~34